유소(상소)
유소(儒疏)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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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등장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 장면.
넓은 의미에서 유소는 '유학자 등 유교 관련 인물들이 임금에게 상소한다'의 상소의 다른 단어이나, 해당 문서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로 국한하여 설명한다.
임금에게 건의할 정책을 성균관 유생들이 전국의 유생을 대표하여 상소로 올리는 행사다. 권당, 공관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임금에게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중 하나. 성균관 부터 경복궁까지 걸어가면서 올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균관 유생들이 이런 의견이 있으니 임금님은 잘 살피길 바랍니다''' 라는 느낌의 권고였다. 물론 단순한 권고이기도 했고, 전제정치인 조선 특성상 모든 유소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세 번의 유소가 올라갔음에도 그 유소가 수렴되지 않았다면, 성균관은 권당과 공관[1] 이라는, 요즘으로 따지자면 급식 거부, 등교거부를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적극 개진했다.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는 세종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고종 때까지 80여 회 이상 일어났다.
특히 영조는 유소 문화를 장려하였는데, 영조는 유소를 대신들의 상소와 동일하게 대우하였으며 성균관의 역사서 태학지에 의하면 유소 때에는 왕족이라고 해도 유생들의 앞을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다.[4] 영조가 유소 문화를 장려하게 되기 까지는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영조 원년 6월에는 관학 유생들이 영조와 정면충돌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영조가 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유라는 유생은 끝까지 일일이 답변을 해가며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영조는 오히려 감탄하였고, 유생과 대신들의 상소를 동일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붕당정치 시절에도 '''유소'''와 '''권당''' 등의 정치적 행보는 지속되었는데 이는 성균관이 단순한 최고위 교육기관이 아닌 관리, 요즘의 시각으로는 예비 정치인을 양성하는 기관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일 정치인으로 성장할 성균관 유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정치적 발언을 했으며, 또한 국가에서도 그것을 장려한 것. 다만 유소나 권당 등의 집단 행동이 정치적인 이해와 결부되기도 했다.
유소와 더불어 성균관의 정치적 행보가 줄어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붕당정치의 폐단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영조의 정책의 결과였다. 이미 유생 때부터 정치적인 행동을 하면서 파가 나뉘어지자, 영조는 탕평비를 성균관 입구에[5] 세우는 등 성균관에서 정치적 색채를 빼려고 노력했다. 붕당정치가 심해지니, 성균관 유생들은 정치에 신경쓰지 말고 학업에 힘쓴 다음 붕당과 당파싸움과는 거리가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를 의도한 것. 물론 이것에 대한 반발도 극심해 영조가 즉위한 1725년에는 무려 11번의 유소와 3번의 권당이 있었다. 영조 3년인 1727년에는 소론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 등, 영조 즉위 초 성균관은 상기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정치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당파 벗기 운동은 반발이 지나가자 결국 유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했으며 결국 성균관은 단순한 학업의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다만 '유소'의 권리 자체는 영조 치세에 줄어들지는 않았는데, 영조 30년에는 통금에 제한받지 않고 유소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유소 행진은 설령 왕족이라고 할 지라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당연하게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유소 및 권당의 횟수는 줄어들었으며 고종 치세에 이르러서는 단 한 번의 유소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에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되면서 의미가 사라졌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를 중심으로 유소를 주제로 한 퍼레이드형 축제 유소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균관의 총학생회인 재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만약 유생들 간에 이견이 있다면, 충분한 논쟁 후 재회에서 다수결로 결정을 했다. 재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유소를 준비하기 위해 장의와 재회 임원인 재임들은 상소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 이를 '''발론(發論)'''이라고 한다. 그 후 '''대의사(大義事)'''가 진행되었는데, 간단히 말하면 상소문의 대표를 선정 후 상소문을 작성하고, 유생들이 상소문에 서명하는 과정이었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유소를 전달하러 궁궐까지 행진하는 과정인 '''소행(疎行)'''이 시작되기 전, 임금은 명을 내려 유소의 행진을 보좌하는 군졸인 아방사령을 보내주었다. 아방사령은 성균관의 재직, 직동 (성균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공노비)과 함께 먼저 도로를 청소하고,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을 뿌렸다고 한다.... 청소가 끝나면 소행이 시작된다. 반인[8] 들이 행렬을 호위하였으며, 소두가 상소함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를 장의와 소임이 따라갔으며, 의복을 갖춘 생원·진사와 4학 유생들이 뒤를 따랐다. 또한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을 궤 안에 동봉하여 소행을 진행하였다.
행렬이 궐문 밖에 도달하면 상소함을 붉은 탁자 위에 올린 후 모두 앉는다. 그 후 승정원에 소행이 왔음을 알리고 정문으로 상소함을 승정원에 전달한다. 이를 '''소반(疎班)'''이라고 한다. 유생들은 왕의 답변인 '''비답(批答)'''이 내려올 때까지 부근에 천막을 치고 대기한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 경우 '''식당을 차려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만족스러운 비답이 내려오면 소행을 해산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상소문을 다시 작성해 소행을 다시 진행한다.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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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등장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 장면.
1. 개요
넓은 의미에서 유소는 '유학자 등 유교 관련 인물들이 임금에게 상소한다'의 상소의 다른 단어이나, 해당 문서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로 국한하여 설명한다.
임금에게 건의할 정책을 성균관 유생들이 전국의 유생을 대표하여 상소로 올리는 행사다. 권당, 공관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임금에게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중 하나. 성균관 부터 경복궁까지 걸어가면서 올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균관 유생들이 이런 의견이 있으니 임금님은 잘 살피길 바랍니다''' 라는 느낌의 권고였다. 물론 단순한 권고이기도 했고, 전제정치인 조선 특성상 모든 유소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세 번의 유소가 올라갔음에도 그 유소가 수렴되지 않았다면, 성균관은 권당과 공관[1] 이라는, 요즘으로 따지자면 급식 거부, 등교거부를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적극 개진했다.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는 세종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고종 때까지 80여 회 이상 일어났다.
- 세종 :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상언자를 벌할 수 없다.[2] -세종 23년
- 성종 : 김경충이라는 유생의 상소를 기점으로 유생들의 정치 참여와 상소 활동이 기정사실로 인정되었다. -성종 11년
- 인조 : 유소는 왕족일지라도 감히 가로막을 수 없다.[3] -태학지 권6
- 선조 : 대학의 공론은 폐할 수 없는 법이다.라며 비답을 내렸다. -선조 16년 8월
- 영조 : 성균관 유생의 상소는 대신의 상소와 동등하게 대우한다. -영조 원년 6월
특히 영조는 유소 문화를 장려하였는데, 영조는 유소를 대신들의 상소와 동일하게 대우하였으며 성균관의 역사서 태학지에 의하면 유소 때에는 왕족이라고 해도 유생들의 앞을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다.[4] 영조가 유소 문화를 장려하게 되기 까지는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영조 원년 6월에는 관학 유생들이 영조와 정면충돌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영조가 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유라는 유생은 끝까지 일일이 답변을 해가며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영조는 오히려 감탄하였고, 유생과 대신들의 상소를 동일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붕당정치 시절에도 '''유소'''와 '''권당''' 등의 정치적 행보는 지속되었는데 이는 성균관이 단순한 최고위 교육기관이 아닌 관리, 요즘의 시각으로는 예비 정치인을 양성하는 기관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일 정치인으로 성장할 성균관 유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정치적 발언을 했으며, 또한 국가에서도 그것을 장려한 것. 다만 유소나 권당 등의 집단 행동이 정치적인 이해와 결부되기도 했다.
유소와 더불어 성균관의 정치적 행보가 줄어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붕당정치의 폐단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영조의 정책의 결과였다. 이미 유생 때부터 정치적인 행동을 하면서 파가 나뉘어지자, 영조는 탕평비를 성균관 입구에[5] 세우는 등 성균관에서 정치적 색채를 빼려고 노력했다. 붕당정치가 심해지니, 성균관 유생들은 정치에 신경쓰지 말고 학업에 힘쓴 다음 붕당과 당파싸움과는 거리가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를 의도한 것. 물론 이것에 대한 반발도 극심해 영조가 즉위한 1725년에는 무려 11번의 유소와 3번의 권당이 있었다. 영조 3년인 1727년에는 소론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 등, 영조 즉위 초 성균관은 상기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정치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당파 벗기 운동은 반발이 지나가자 결국 유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했으며 결국 성균관은 단순한 학업의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다만 '유소'의 권리 자체는 영조 치세에 줄어들지는 않았는데, 영조 30년에는 통금에 제한받지 않고 유소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유소 행진은 설령 왕족이라고 할 지라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당연하게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유소 및 권당의 횟수는 줄어들었으며 고종 치세에 이르러서는 단 한 번의 유소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에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되면서 의미가 사라졌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를 중심으로 유소를 주제로 한 퍼레이드형 축제 유소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 절차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균관의 총학생회인 재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만약 유생들 간에 이견이 있다면, 충분한 논쟁 후 재회에서 다수결로 결정을 했다. 재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장의 : 재회의 우두머리로 성균관의 학생회장이다. 장의는 재회를 소집하거나 유생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전임 장의 3명의 추천을 통해 뽑은 후 대사성의 인준을 거쳤다.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동재 기숙사에서 1명, 서재 기숙사에서 1명 총 2명이 존재했다. [6]
- 색장 : 매일 아침, 저녁 진사식당에서 출석부를 확인하였다.
2.1. 발론과 대의사
유소를 준비하기 위해 장의와 재회 임원인 재임들은 상소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 이를 '''발론(發論)'''이라고 한다. 그 후 '''대의사(大義事)'''가 진행되었는데, 간단히 말하면 상소문의 대표를 선정 후 상소문을 작성하고, 유생들이 상소문에 서명하는 과정이었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 대의사 : 유소를 진행할 임원진인 '소임'을 정한다. 또한 상소문의 대표인 소두(疎頭)를 선정했는 데, 소두는 인망이 있는 인물이었어야 하며 상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그에 따르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대신 그만큼 혜택도 주어졌는데, 공론의 중심이라는 명예와 이후 관직에 진출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혜택이 중심이었다. 물론 부담도 컸기 때문에 기피하는 사람도 많아 이름만 빌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봉장 : 상소문이 완성되면 소두의 이름을 제일 위에 쓰고, 상소문을 지은 사람과 받아 적은 사람을 차례로 쓴다.
- 화압 : 상소문에 일반 유생들의 유생을 받는다. 이 때 놀라운 점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은 벌을 받았다고 한다. [7]
- 봉함 : 서명을 마치면 상소문을 함 안에 넣고 봉한다.
- 독소 : 또한 유생 한 명이 사람들 앞에서 상소문의 내용을 낭독한다.
2.2. 소행
유소를 전달하러 궁궐까지 행진하는 과정인 '''소행(疎行)'''이 시작되기 전, 임금은 명을 내려 유소의 행진을 보좌하는 군졸인 아방사령을 보내주었다. 아방사령은 성균관의 재직, 직동 (성균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공노비)과 함께 먼저 도로를 청소하고,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을 뿌렸다고 한다.... 청소가 끝나면 소행이 시작된다. 반인[8] 들이 행렬을 호위하였으며, 소두가 상소함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를 장의와 소임이 따라갔으며, 의복을 갖춘 생원·진사와 4학 유생들이 뒤를 따랐다. 또한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을 궤 안에 동봉하여 소행을 진행하였다.
2.3. 소반과 비답
행렬이 궐문 밖에 도달하면 상소함을 붉은 탁자 위에 올린 후 모두 앉는다. 그 후 승정원에 소행이 왔음을 알리고 정문으로 상소함을 승정원에 전달한다. 이를 '''소반(疎班)'''이라고 한다. 유생들은 왕의 답변인 '''비답(批答)'''이 내려올 때까지 부근에 천막을 치고 대기한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 경우 '''식당을 차려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만족스러운 비답이 내려오면 소행을 해산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상소문을 다시 작성해 소행을 다시 진행한다.
3. 같이보기
[1]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출석 체크인 원점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공관은 성균관을 비우고 떠나는 것이었다.[2] 이로 인해 유생들은 유소를 통해 공론을 형성할 명분을 인정받았다.[3] 아이러니한 점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유소를 방해했다가 벌을 받았다는 점이다.[4] 실제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말을 타고 유생의 앞을 지나갔다가 유생들에 의해 노비들과 호위하는 자가 벌을 받았지만, 이에 대해 임금은 오히려 유생들의 뜻을 높게 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5] 2016년 현재에도 명륜 캠퍼스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을 보면 바로 볼 수 있다.[6]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전태수가 연기했는데, 주인공들을 권력을 이용해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7] 하지만 빠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큼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인 점은 생각해 봐야 한다.[8] 성균관 소속의 공노비들으로, 성균관 주변 반촌이라는 지역에 모여살았다. 반촌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세상 반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