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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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5남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묘호는 원종(元宗), 휘는 부(琈). 생전에 받은 군호는 "정원군(定遠君)".[2] 생모는 인빈 김씨이며, 적모(嫡母)는 선조의 정실인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이다. 인목왕후 소생의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선조의 또 다른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임해군과 광해군에게는 이복 형제가 된다. '''인조 이후의 모든 왕통'''은 모두 그의 직계 후손들이다.
임진왜란 뒤에 호성공신[3] 2등에 올랐다. 정원군은 1620년 타계했지만, 3년 뒤 장남 능양군이 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자동으로 대원군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대원군들과 달리 인조가 추존에 성공함으로써 원종이란 이름으로 통한다.
2. 생애
동복 형제이자 셋째 형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하고 넷째 형 신성군도 임진왜란 초기 요절하여[4] 실질적으로 선조의 셋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현대 창작물에서는 광해군을 악인으로 묘사하고자 그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이쪽도 임해, 순화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인간말종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임해군과 순화군 못지않게 행실이 왕족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키는 부정을 저질러 사헌부[5] 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 것. 혈연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6] 이 납치된 사건임에도 오히려 자기집 노비들의 말을 듣고 말리는 종친들을 되려 나무랐다가 새벽이 돼서야 겨우 풀어줬다고 한다. 당연히 하원군네 종들은 그 과정에서 죽이 떡이 되도록 아주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실록의 기사)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는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壺患)을 피하듯 했다'는 부분이 있어, 1년에 10명씩은 무고한 사람들을 이유없이 갖은 핑계대며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이코패스인 순화군[7] 이 '''정원군보다는 덜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얼마나 정원군이 행실 및 인성이 나빴는지 알만하다.
어머니 인빈 김씨가 신성군 사후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아 사이가 좋았기에 광해군 집권 중기까진 종친으로 합당한 예우를 받았다. 선조의 맏이 임해군이 광해군 즉위 2년차인 1609년에 처형되었고 3남 의안군과 4남 신성군은 선조보다 먼저 어린 나이에 요절해 세상을 떠났기에 광해군 바로 밑 아우로서 주로 의전 행사 때 왕실의 종친 대표로 잔치에 참석하거나 명 사신 행차시 접대를 맡았다. 광해군이 옥사(獄死)를 일으킬 때마다 종친들이 지금으로 치면 관제데모에 자주 동원당했는데, 이때 역시 종친의 대표로 '누구 누구를 빨리 작살내십쇼.'라며 거들거나 옥사가 끝나고 나면 역적 평정의 공로로 존호를 올리는데 총대를 메고 광해군에게 가서 '받아주십쇼.' 하는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심해진 광해군의 의심병[8] 은 그조차도 피해가지 못했다. 3남인 능창군이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죽고, 살던 집(사저)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9] 자신도 홧병으로 얼마 못 가 사망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장남 능양군이 아버지와 동생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반정에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광해군의 이복조카였던 자신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 야사에는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있어서 저지른 일이라는데 잘못 찍어 눌렀던 셈이다.
3. 사후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가 되자 정원'''군'''(君)에서 정원'''대원군'''(大院君)으로 군호가 격상된다.
공식적으로는 선조의 뒤를 이은 인조였지만 선조의 계비 소성대비에게 후계자로 추인(鄒認)을 받았고 민생 파탄내고 사대부 사이에서 패륜아[10] 로 찍힌 광해군을 쫓아낸 것 자체는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인조의 정통성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11] 그러나 인조는 좀 더 나아가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숭해서 정통성을 더 강화하려고 하는데, 흔히 이것을 '원종 추숭 논쟁'(元宗追崇論爭)이라 부른다. 인조, 이귀, 최명길 등 외에는 거의 모든 신하가 "전교(傳敎)를 거두어 달라"라며 크게 반대했지만 결국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관철시킨다. 당시 집권 서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원군은 왕세자인 적이 없기 때문에 왕으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인조는 정원군도 선조의 아들이었으니 가능하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러한 인조의 주장에 당시 사대부들은 '''"대통(大統)과 소통(小統)도 구분 못 한다"'''고 인조를 깠다. 당시 조선에서는 혈연(血緣)보다 '종통(宗統)을 누구에게 이어받았느냐'가 중요한데[12] 유교 종법상 '''후임자는 전임자의 아들로 물려 받았기에 광해군은 흑역사 처리되고 선조에서 인조로 직통(直統)으로 물려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로 치면 가문을 물려 받는 것이고 왕실은 종묘와 사직을 물려 받는 사람을 아들로 치는데 인조는 선조의 혈연상으론 손자지만 종법상으론 아들이란 것이다. 어쨌든 인조는 '''자신만의 논리를 위해''' 이귀, 최명길 등 찬성한 소수의 대신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거의 어거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생전에 세자였던 적도 없는 듣보잡, 후궁 출신 왕자가 왕에 추증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조선이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한 나라였기에 이런 절차가 없으면 권력 기반도 흔들렸던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줄 필요가 있겠지만, 이미 반정은 사대부들의 지지와 인목대비의 추인, 명나라 책봉까지 받아서 정통성 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명 청 교체기로 병자호란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쓸데 없는 짓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조는 대외 문제보다 이 문제를 훨씬 중시했고 이때 총애를 받던 김류가 세력을 잃고 이귀와 최명길이 전면에 나서게 되나, 이귀는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대신 그 아들 이시백이 총애를 받았다. 결국 선조 - 정원군 - 인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으로 격상되어 추존왕으로서 '''원종대왕(元宗大王)'''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아내와 함께 종묘 영녕전에 모셔지게 된다. 그리고 아내 연주군부인 구씨 또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로 추존되었다.
결국 문제는 '''서자라서 추존한 게 그른 것이 아니고, 세자 자리에 한시도 있던 적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13] 성종이 자기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한 것은 자신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일단 덕종은 세조의 세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애초에 세자의 지위는 다른 왕자와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다른 왕자는 대군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국왕의 혈육에 불과하지만 세자는 책봉 받은 이상 신하들과 백성들에겐 '''두 번째 임금'''[14] 이다. 다른 형제 종친 및 손위 항렬이라도 세자와 '군신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왕이 되면 추존하는 것이다. 생전에 세자와 부자 관계이며 군신 관계인 세손이 임금이 되면 임금의 아버지[15] 인 세자가, 아들도 임금인데 아버지가 고작 세자에 머물러야겠냐 해서 하는 것이 추존이다.[16] 따라서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아무나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정원군의 '추숭(追崇)'을 주장하는 신료들의 주장 중 명분이 있었던 것은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이었다. 조선 왕조에서 추숭된 9명의 추존왕을 빼고 보면 딱 한 항렬에서만 실제 임금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영조와 정조 사이의 대(代)에서 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정조가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에 입적되고 등극 후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해결되었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고종 때 당시 의리보다 인정상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도 장조의황제로 (황제)추존되어 같은 항렬에서 2명의 추존 왕이 나왔다. 순조와 헌종 사이에도 조-손 관계로 대통이 이어져 추숭 왕인 익종만 있었으나 헌종이 급사하고 아저씨 뻘인 철종이 즉위해 해당 항렬에 실제 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항렬을 비우지 않고 왕통을 잇는 것은 나름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고 선조에서 인조 사이에는 실제로 즉위했던 광해군이 있었으나 폐위 되었으므로 해당 항렬에는 시호를 받은 왕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조의 아들들 중 임해군,[17] 광해군,[18] 의안군, 신성군 등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상황에서 후손을 남긴 왕자들 중에서는 정원군이 가장 맏이[19] 였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 항렬이 종묘에서 비게 된다는 것과 선조의 후손들의 실질적인 맏이라는 점이 그나마 추숭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은 이어졌고, 특히 장유(張維)[20] 는 《전례문답(典禮問答)》을 지어 반박하였는데, 노희공(魯僖公)이 형으로서 민공(閔公)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민공을 고위로 삼았던 《춘추(春秋)》의 기록을 증거로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앞 사람 이어서 바톤 터치 하면 그만이라는 소리. 결국 '대통'(大統)을 중히 여기는게 당시 중론이었던 것이다. 단, 이 경우도 형제 계승이라서 아버지 항렬이 비는건 아니며, 이전에 옆집 명나라 가정제 즉위시에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갈 여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황제를 추존한 사례가 있어서, 아버지 항렬이 아예 없는 인조의 경우는 명분이 조금 더 있었다.
전대인 선조, 후대의 철종과 고종도 각각 자신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과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지 않았다.[21] 이는 당연히 법적인 아버지가 생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큰아버지 가문으로 입적되면 생부를 삼촌으로 불러야 했으며, 다른 먼 친척의 양자가 되어도 그에 따른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 사대부의 대표격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조는 유독 이 문제에 열을 올렸다. 이 때문에 정원군은 방계 종친이자 후궁의 서자로서 조선의 왕으로 유일하게 추숭된 인물이 되었다. 호란으로 떨어진 권위를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서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으나, 병자호란(1636) 당시에는 이미 추존이 끝나 있었으므로 선후가 맞지 않는다.[22] 결국은 인조 본인이 계승 방식이 아니라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았다는 점 때문에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조의 이런 행위는 이후 소현세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더더욱 정통성 논란이 생겼다. 이로 인해 증손자 현종때 터진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덕흥대원군과 달리 김포시 풍무동[23] 에 있는 이 사람 무덤은 어엿한 '능(陵)'이다(장릉, 章陵).[24] 이전에는 흥경원(興慶園)으로 불렸는데, 원래 그 자리는 부인 연주군부인 구씨의 원인 육경원(毓慶園)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성 초기에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가 육경원으로 천장, 앞에서 서술한 이름으로 바꾸고 추존과 동시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고 왕릉 제도에 맞게 '능(陵)'으로 새로 조성하였다.
4. 가족 관계
구사맹의 딸 연주군부인 구씨에게서 3남, 측실 김씨에게서 1남을 얻었다. 첫째가 인조(능양대군), 셋째가 능원대군[25] , 넷째가 능창대군[26] 이며 측실 김씨에게서 둘째 능풍군을 얻었다(능풍군은 일찍 사망). 연주군부인은 인조가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으로 봉작되고 계운궁(溪雲宮)이라 불리었으며, 정원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왕에 추존되자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사후 왕위는 장남 능양군이 즉위하니, 그게 바로 인조다.
5. 어진
이 어진은 원종(정원군)의 원본 어진을 보고 그린 모사본이다. 1936년, 이당 김은호가 세조(조선)와 함께 어진을 모사했다. 고궁박물관에서 발견된 정원군의 어진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일어난 대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이 탔고 신원을 밝히는 글이 있는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오랫동안 신원 미상의 공신 초상화로 명명되었다. 최근에 학자들의 연구로 인하여 이 초상화가 원종(정원군)의 어진인 것으로 최종 판명이 났다.(기사)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는 같은 그림으로 보이며 실제 어진과 비교하면 복식은 비슷하지만, 용모는 어진을 보고 그린 것 같지만, 세세한 모습이 차이를 보인다. 재밌는 점은 열성어진에서 정원군이 쓴 사모가 효명세자가 쓴 사모와 같은 모양인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을 비교해 보면 정원군의 사모의 모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선원보감을 보고 모사하다가 실수로 잘못 그린 듯 하다.
6. 창작물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형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자가 될 야심에 차 있다가 이순신의 반정으로 인해 왕실이 함흥으로 파천하게 되자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에 대해 가진 의심을 이용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군사를 용병으로 쓰자는 의견을 내고 직접 누르하치를 만나러 간다. 회견장에서 술에 취해 누르하치의 야망에 대해 찬동하면서 "내가 조선 왕이 된다면 건주여진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함께 공격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누르하치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누르하치는 정원군의 어리석음을 간파하고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삼아 조선을 지배하려는 계획 하에 선조와 광해군을 비롯하여 정원군의 아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 왕실 가족들을 살해한다. 결말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건주여진으로 가서 꼭두각시인 자칭 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1] 복원 전과 살짝 다른 걸 볼 수 있는데 이유는 1872년 본 어진과 1935년 본 어진 두 개를 합쳐서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고궁박물관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2] 군호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유래했다.[3] 선조때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거의 한달만에 한양이 뚫리자 "왕이라도 살아야 왕위 대통을 이을수 있다."면서 의주로 파천(피란)하면서 따라 나서고 호위한 신하, 종친, 왕자들로 하여금 호성(扈誠)이라는 공신을 책봉하곤 했다. 여담으로 선조는 자기 보호하고 따라나서주는 신하들은 챙겨주면서 전쟁에 나가 싸운 이순신 장군과 김시민 장군, 의병장(특히 곽재우나 김덕령)들은 개풀취급했다고 한다.[4] 신성군의 사망 당시 13세였고, 정원군은 신성군보다 1살 어렸다.[5] 부정부패의 관리 조사또는 감찰하여 탄핵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검찰청 역할.[6] 선조의 형수이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이기 때문에 하원군 부인은 정원군에게 법적으로는 당숙모가 된다.[7] 정원군과는 '''동갑내기 이복형제'''다. 그나마 순화군이 정원군에 있어 동생이다.[8] 이 병을 현대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편집증(遍執症)의 형태를 띄고 있는 정신병 중 하나다.[9] 이때 빼앗긴 집을 허물고 광해군이 지은 궁궐이 경희궁인데 결국 인조가 왕이 되면서 집을 도로 되돌려 받은 모양새가 되었다.[10] 계모인 인목왕후를 서궐(경운궁 즉조당)에 유폐하고, 왕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복형 임해군은 '''사약을 먹이고(사사, 賜死)'''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초가집 가마불로 쪄죽였다(증살, 蒸殺)'''. 임해군은 모두가 죽이자고 찬성했고, 임금이 동생이나 종친을 죽이는 건 당시 왕정 시대에 큰 문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손위 대비를 (공식적으로 폐위는 아니지만) 폄손절목이라는 형식으로 후궁 급으로 대우를 낮추고 감금한 건 당시 유교 윤리로써는 심각한 패륜 행위였다. 왕실은 사대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계모라 하더라도 아들이 어머니를 박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불효였기 때문이다.[11] 반란은 있었어도 광해군을 추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위기였던 이괄의 난도 어디까지나 이괄 책임이었고, 광해군을 핑계 삼아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다른 이를 광해군에게 양위를 받아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하진 않았다.[12] 비슷하게 고종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지만 익종(문조)의 후사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 아버지는 효명세자다. 정조도 진종(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가서 "근본이 둘일 수 없다"는 논리 때문에 당대에는 친부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어른의 사정도 있지만.[13] 이성계의 조상들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유일하게 세자에 오른 적이 없었던 추존왕이다. 게다가 이성계의 조상들도 비록 원나라 벼슬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세습을 받아서 가문을 승계한 사람들이다.[14] 왕과 세자는 군신 관계이자 부자 관계이다. 그러나 세자와 다른 이의 관계는 군신 관계다. 명분을 빼고서라도 보면 세자가 아닌 그냥 왕자는 그냥 대통령의 사적인 아들이고 세자는 부통령급 대우인 것과 비슷하다. 옷부터 다른 왕자나 가까운 종친들은 보라색 옷을 입는데, 세자는 (당연히 부왕보다는 좀 다운된 버전이긴 하지만 어쨌든) '''곤룡포'''를 입는다. 또한 대리청정할 때 한정이지만 왕과 세자를 '대조(大朝)' '소조(小朝)'로 '''병칭'''하기도 한다.[15] 유교에선 부자 관계가 군신 관계보다 중하다. 송 고종이 금 황제를 큰 아버지로 불렀지만 그게 부자 관계보다 나은데, 부자 관계가 되면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어야 한다.[16] 당연히 종법상 아버지만 추존되고 생부라고 추존되는 게 아니다. 정조가 사도세자 대신 효장세자를 추존한 것은 사도세자 대신 영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킨 종법 질서 때문이다.[17]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려가 되어 출가했기 때문에 후손은 없을 듯하다.(임해군 아들 일연 스님에 관한 기사)[18] 세자가 있었으나 반정 후 유배당했다가 자결을 명받아 죽었다.[19] 선조가 당시 살아있을때 유일하게 먼저 정원군의 자식(선조한테는 손자)을 보았기에 정원군의 자식이었던 능양군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20] 인조의 아들인 효종의 장인이다.[21]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 흥선대원군이 왕의 칭호인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황족들의 품계도 올라갔기 때문에 군들이 모조리 왕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지, 대원군을 이전에 왕 취급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고종의 형이 흥친왕이 되었고, 고종의 아들들 역시 군이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 등 친왕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추락하면서 공이 되는 것이고.[22] 링크되어 있지 않은 정묘호란(1627)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시기상 맞지 않다. 그 이전인 1623년부터 이미 이미 친부모에 대한 호칭 문제가 불거져 있었기 때문이다.[23] 조성 당시에는 경기도 김포군 고현내면 당곡리[24] 참고로 아들 인조의 무덤도 똑같이 '장릉(長陵)'으로 불리며, 다른 장릉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에 소재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다. 물론 잘 알려진 곳은 단종의 능.[25] 적자 중에선 2남.[26] 적자 중에선 3남.[27] 야인시대에서 정진영의 아역을 맡은 배우이다.[28] 내 사위의 여자에서 최재영 역할을 맡은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