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무관심

 

1. 개요
2. 상세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
3.1. 전통형 무관심
3.2. 현대적 무관심
4. 정치적 무관심이 불러온 비극
4.1. 비판
5. 어록
6. 관련 문서

政治的無關心
Political apathy[1]

1. 개요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국민(시민)들이 정치에 부정적이고 정치적 문제와 현상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2. 상세


'정치적 무관심'과, 투표 포기와 같은 '정치 불참가'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에 대한 불참가를 야기하고 이는 다시 정부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국민 의사가 정부에 의해서 대표되지 않게 되고 결국 권력은 이러한 불참가자의 필요와 이해를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않아도 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책임지지 않는 책임질 필요가 없는 지배자를 만들게 되어 권력의 남용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정치적 무지를 포함한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불참가와의 사이에는 일종의 순환의 관계가 있다.
이 악순환은 정체된 정치 풍토와 기존의 정치체제의 존속에 유리한 결과(즉 독재)를 낳을 수 있으며 또한 축적된 정치적 무관심이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할 수도 있다(파시즘, 나치즘 등). 이처럼 되면 연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며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즉, 정치적 무관심은 민주주의를 크게 약화시켜 독재가 나올 환경을 만들기 쉽다는 것이다.정치적 무관심의 폐해가 어떤지는 위에 인용한 시를 참조.
반대로 정치적 참가가 일상적인 사회에서는 그 필연적 결과로서 정치적 학습의 기회를 많이 하고 정치적 책임의식이 강해지며 자기의 정치 참여에 대한 자신감과 적극성이 강해진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에너지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정치에 지속적으로 무한정한 관심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정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정치로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생업에 비해서는 순위가 뒤쳐질 수밖에 없다. 생업만큼 중요하다고 자기 자신이 생각하더라도 모든 정치적 이슈를 안다 자부하는 사람조차 중요한 이슈를 놓치다가 뒤늦게 아는 때가 온다. 그래서 정치 전문가인 정치가가 따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넷상에서 정치 이야기를 보기 싫어하는 네티즌들도 정치적 무관심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애초에 넷상에서 터지는 정치 떡밥들이 대개 진흙탕 싸움으로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아 정치 떡밥을 꺼리는 케이스도 많기에 이런 사람들을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네이버미디어다음 등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의 거의 100%가 이미 사회에서 도태된 정치병자들이 퍼뜨리는 유언비어나 악플이라서 이런 걸 보기 싫어하는 정상적인 네티즌들도 많다.
정치적 지지 성향을 중립론자로 밝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중도주의라는 단어를 정치적 중립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자신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치장 심리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는 정치적 무관심이 심한 사회일수록 숫자가 증가한다. 정치적 중립은 단순히 사회적 산술 평균의 중간값인 중도주의가 아닌 이성을 통한 합리적 기준 설정 과정 그 자체이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은 합리적 기준의 설정 과정에서 나오며 그 결과적 편파성과는 무관하다.
또한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 불참가를 포함한 개념이다.따라서 투표한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다. 물론 보이콧의 개념으로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른 방면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말-21세기 초에 들어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위기와 고용 감소에 인해 자기 일만 챙기기 바쁜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선진국의,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각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90년대 이후 경제가 쇠락하면서[2] 정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추락하다시피 하는 수준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으면 대부분의 악법들은 기껏해야 발의 단계까지만 가고 폐기되는게 일반적이다. [3]
이것은 마치 기업에서, 무능하고 돈 훔칠 궁리만 하는 직원을 뽑았다면 그를 뽑은 인사권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 같다. 특히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정치인들의 폭주를 막고 찍어 누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비록 개인 단위에서는 영향력이 미미할지언정, 민심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근대의 군주에 버금가는 막강한 무언가임은 부정할 수 없다.[4][5] 따라서 국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퍼진다는 것은, 왕정시대 때 왕이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에 버금가는 막장이다. 왕이 정치에 관심을 잃었으니, 부패한 관료(정치인)들이 판을 칠 것이 분명하니까. 쉽게 말해서 만력제가 되지 말자는 소리. '''막장으로 유명한 중국 공산당도 경제가 무너지면 민심이 끝장나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경제성장을 하려고 한다.''' 하다못해 김정은도 평양의 경제는 기를쓰고 성장시키려 한다.
다만 정치에 관심있다는 것의 근거와 범위를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 지에는 논의가 필요하다. 가령 선거에서 마음에 드는 후보에게 투표를 했는데, 그 후보를 좋아하는 근거가 살아온 삶, 사상이나 정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잘 생겨서' '착한 사람 같아서' 라면, 이 사람은 투표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후보에 대한 고찰 없이 연예인 인기 투표하듯 나라의 앞날에 관여한 무뇌아라고 봐야 하는가? 또한 지지한 후보에 대해선 알지만 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측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그건 관심 있었던 건가 없었던 건가? 이런 종류의 '어설픈 관심'은 '무관심'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가?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 이상의 정치관련 지식을 얻고 숱한 정치인들의 사상등을 일일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직접 친분이 있는 수준이 아니고선 거의 불가능하다.(이것은 친분이 있어도 확인이 불가하다.다만, 정치적 행보는 언론,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정보가 없어서 몰랐다면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놓치기 쉽고 알려면 매몰비용이 많이 들어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나날이 세분화, 전문화되어가고, 경제적으로도 양극화가 심화되며 그야말로 '먹고 살기도 바쁘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시대다.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싶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도 힘들어진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초창기 온라인 게임을 소박하게 즐겼다가 접은 사람이 10년 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해진 동 게임은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처럼.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



3.1. 전통형 무관심


정치문제가 자기는 다른 세계의 일이며 정치는 특별한 사람, 높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정치를 권력자, 지배자, 특별한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이다. 이 무관심은 '''은연중에 가지게 된 권력에 대한 충성과 복종심이 기저에 깔린 경우가 많다.''' 심하면 권력자는 항상 서민을 위해 고생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지도자의 영도력에 추진력을 실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미치게 된다.
  • 공포형 무관심: 구시대 권위주의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발현되기 쉬운 무관심. 한마디로 우리는 무지하고 힘이 없어 권력자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니, 권력자들이 뭘 하든 시키는 대로 할테니깐 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라는 정치의사의 표출이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가서 고초를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던 권위주의,독재정치를 오래 겪을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 신뢰형 무관심: 현 정치체제나 권력의 작동에 대하여 그 공정성과 정통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원인이 되는 경우이다. 선거 때는 의무적으로 투표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심판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공자 역시 신뢰형 무관심에 관련해서 지적한 바 있다.[6] 요 임금 시대에 어떤 노인이 변장한 요 임금의 면전에서 "이렇게 나라가 잘 돌아가는데 왕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하며 지팡이로 땅을 쳤다는 격양가(擊壤歌)[7]처럼 정말로 정치인들이 믿을 만해서 믿어 주는 경우에는 민주주의로서는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형태의 정치적 무관심이 발생했을 경우엔, 정치 체제가 점점 이상해져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가 시민들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는 이미 헬게이트가 열린 뒤일 것이므로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이다.
  • 무정치형 무관심: 시민들이 정치적 참여에 신경쓸 시간에 자신에게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이익을 주는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정치참여활동으로 얻는 사회적 이익에 비해서 정치참여로 인해 받는 개인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아테네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아고라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날 일을 쉬어도 되도록 참여 수당을 지급했다고 한다.

3.2. 현대적 무관심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체제와 상호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여러 양태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가끔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정치병으로 비꼬기도 한다. 영어로 '얼간이'란 뜻인 'idiot'의 어원도 그리스어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에서 나왔다.
  • 굴절적 무관심: 원래는 강렬한 정치적 관심이 존재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로 인해 정치적 관심이 얕아져 버린 경우를 가리킨다. 기대가 무력감과 실망으로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다가 끝내 정치적 참여를 포기한다.[8] 즉, '내가 투표한다고' 혹은 '내가 투표 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혹은 '이놈이 되나 그놈이 되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극단적으로 이는 대중의 소외 현상을 불러올 수 있으며 권력으로 하여금 현상유지를 가능하게 하여 권력의 폭력화를 허용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권력이 소수집단을 폭력으로 탄압해도 잘 발견되지 않고, 공론화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정치혐오로 인한 투표 포기로 직결된다.
  • 사생활화형 무관심: 사회는 복잡하고 전문화되면서 사회 문제와 현상을 파악하는데 과다한 노력이 들게 된다. 때문에 개인은 거대 담론을 피하고 개인적인 이익과 행복만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들은 공공의 이익과 사회발전보다 자신에게 밀접한 이해관계에 민감해지면서 생기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개인들에게 눈앞에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사소한 이익을 만족시켜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강압을 펼침으로써 눈치채지 않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불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고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소비형 무관심과도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특정인들이나 자신의 이해관계인들에게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결정적인 불이익이 되게 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행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형태에서 소위 '회유와 강압'의 정책이 쉽게 나타난다. 대국적인 식견과 견해를 가진 정치인보다는 당장 지역구 주민이 좋아하는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이 쉽게 당선되는 현상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편한 진실을 숨기는 것을 넘어서, 합리화와 정당화 때문에 잘못을 아예 잘못이라고 느낄 수 없게 만드는 지경에 다다르고 잘못이라 느끼더라도 숨기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 소비형 무관심: 시민들이 소비에 몰두하고 달콤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면서, 골치아프고 어려운 정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는 경우이다. 사회생활형 무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이렇게 되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상호간에 손을 잡고 더욱 대중 매체나 술 등으로 소비형 무관심을 조장하여 이 무관심을 지렛대 삼아 여론조작을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우민화 정책이 바로 이것을 유도하기 위한 것. 어떤 형식이든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할 수 있으면 우민화 정책으로는 성공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5공화국이 국민의 정치 무관심화를 유도하기 위해 3S(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을 실시했다. 70년대 볼 수 없었던 에로영화나 프로 스포츠가 80년대 갑자기 생겨난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인 가축화나 노예화와 다르지 않은 작태로, 눈앞의 작은 것에 만족해, 그동안 가질 수 없던 것들을 소수가 포식하는 광경을 봐야할 눈을 가리게 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우민화 정책 3번 문단 참고.

4. 정치적 무관심이 불러온 비극



4.1. 비판


하지만 이런 것들은 무력으로 국민의 의지를 찍어누르는 강압에 의한 것인지, 국민의 잘못된 판단에 기인한 열성적 지지 등의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은 무관심 이전에 일반 대중이 판단의 근거를 위한 정보획득 자체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의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 = 독재라는 공식은 다소 위험한데, 나치 독일의 경우와 같이 독재대중열광적 지지를 받아 탄생한 경우도 적지 않고, 적극적인 투표결과가 중시되는 민주사회에서 정치적 무관심으로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예: 브렉시트). 대한민국에서도 박정희가 당선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이 87%였고, 이는 가장 최근인 2017년 5월 대통령선거 때의 77%보다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바 있다. 박정희는 이후 6대, 7대 대통령 선거 때도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고 유신이라는 정신나간 독재 체제를 구축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투표율을 통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정치적 관심도와 독재의 위험성 간의 실증적인 상관관계는 별로 없다는 것.
민주국가 기준으로 3권분립 및 언론과 국회의 견제기능이 짓밟히지 않았다면 지도자의 독단이나 권력남용을 '독재'라고 칭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5. 어록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9]

나의 목소리가 국가의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자유 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투표권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치에 관해 알아야 할 의무를 나 자신에게 부과하기에 충분하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10]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 박노해 '꽃 피는 말''''


6. 관련 문서



[1] 영어 위키백과의 표제어. apathy 대신에 indifference/disengagement가 들어가기도 한다.[2] 물론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 쇠락한 수준이지 아직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다.[3] 다만 싱가포르처럼 아예 독재에 언론자유는 세계 최하위인데도 권위주의의 장점이 발휘되어 잘 사는 특이 케이스가 있긴 하다. 사실 삶의 질 이전에 민중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썩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물론 독재 국가에서의 정치적 무관심은 훨씬 더 위험하다.[4] 실제로 손문은 국민과 정치인의 관계를, 황제와 관료의 관계에 비유했다.[5] 근대 민주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전근대 전제왕조 시대에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군주와 관료들이 항상 신경쓰고 민감하게 여긴 것이 바로 민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주들은 밤에 허름한 옷을 입고 잠행을 나가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해 직접 물어보는 등 항상 민심을 신경썼으며, 민심을 곧 신권을 압도할 수 있는 자신의 권력수단으로 삼았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군주에게 있어 가장 큰 정치적 명분이자 권력이니까. 특히, 동양권 국가들은 군주에게 '덕치'를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세뇌에 가깝게 주입시켰는데 이를 통해 이미 전근대 왕조시대조차도 민심과 국민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6] 원문은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즉 천하에 도가 있다면 뭇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얘기.[7] 다만 후세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8] 간단한 예로 들자면 정경유착, 군납비리 등 나라의 근간이 뒤흔들릴 수도 있는 스캔들이 터진다 한들, 정치가와 높으신 분들은 처벌을 어떠한 형태로든 비껴가거나, 받아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행위가 반복되어 국가 시스템 자체에 실망을 느끼게 되고, 특정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장기 독재상황(예를 들면 일본이 자민당 정권이 상당히 오래 가면서 '내가 투표한들 어차피 자민당이 당선되겠지' 라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에 '내가 투표한들 특정당이 당선되겠지'와 같은 절망을 떠안게 되는 현상들이 있다.[9] 사실 이 유명한 말의 시조가 누군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의 것은 1976년도 버전이 기반. 위키피디아 참조[10] 여기서 이 “저질스러운 인간”이란 부패한 권력층이 아니라 멍청한 일반대중을 의미한다. 지식인들이 정치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수준 낮지만 수도 많고 시끄러운 일반 대중들의 뜻대로 지배당할 것이라는 말. 그러니까 이 말은 오늘날처럼 일반대중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명한 엘리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 우민정치를 방지해야한다는 논지였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억울하게 사형당했고, 여기에는 선동당한 시민들의 어리석음이 한 몫 했다. (대화론 중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정황상 플라톤은 스승이 사형을 선고받은 재판을 직접 목격했고, 이 사건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이 되었는지 이후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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