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애
1. 개요
劉艾
(? ~ ?)
후한 말의 인물. 한실 종친
2. 생애
초평 (190~193년), 동탁의 장사(長史)였다. 산양공재기에 동탁이 장사 유애에게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 라며 과거 장온의 부관으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유애가 “손견이 비록 때에 맞춰 계획을 살폈지만, 원래 스스로는 이각이나 곽사만 못합니다. 듣자하니 미양정(美陽亭) 북쪽에 있는데, 보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적들과 싸웠다가 거의 다 죽고, 인수마저 잃어버렸다 하니, 이것은 그가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 답하며 산동의 반동탁연합군이 곧 무너질거라 하자, 동탁은 “다만 두 원씨(원소,원술)와 유표, 손견만 죽이면, 천하는 스스로 복종하여 나를 따를 뿐이오.”라 하였다.
흥평 원년(194년), 삼보에 가뭄이 들어 헌제가 시어사(侍御史) 후문(侯汶)를 시켜 태창(太倉)의 쌀, 콩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미죽(糜粥-죽이나 미음)을 만들게 했으나 하루가 지나도 굶어 죽는 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황제는 부휼(賦卹-진휼,구휼)하는 데에 농간이 있지 않나 의심하니 친히 어좌(御坐) 앞에서 죽을 만드는 것을 시험해보고는 이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시중(侍中) 유애(劉艾)를 보내 유사(有司-담당 관리)를 꾸짖게 했다. [1]
흥평 (194~195년)에 시중, 건안 원년(196년)에 종정, 팽성상으로 있으면서 어가를 호송한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2]
건안 3년(198년), 여포가 서주를 점령하면서 팽성에서 쫓겨나 조정으로 돌아갔다.
건안 19년(214년)에 종정으로 있으면서 헌제의 명으로 태상사 대사농 안양정후 왕읍(王邑)과 함께 위공국으로부터 귀인(조조의 딸들)을 맞이했고, 건안 21년(216년)에 사지절(使持節) 행(行) 어사대부(禦史大夫) 종정(宗正)으로 있으면서 조조를 위왕으로 책봉하는 사자가 되었다.
저서로는 영제기(靈帝紀)와 헌제기(獻帝紀)가 있다.
[1] 이때 시중(侍中) 유애(劉艾)에게 명해 쌀과 콩 5승(升)으로 임금 앞에서 죽을 만들도록 하니 세 그릇에 가득찼다. 이에 상서(尙書)에게 말했다, “쌀과 콩 5승으로 죽 세 그릇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쇠약해지니 어찌된 일인가?”[2] 원굉의 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丁沖, 충집种輯, 상서복야 종요鍾繇, 상서 정부郭溥, 어사중승 동분董芬, 팽성상 유애劉艾, 풍익馮翊 (태수) 한빈韓斌, 동군태수 양중楊衆, 의랑 나소羅邵, 복덕伏德, 조유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沮儁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議郎 후기侯祈, 상서尚書 풍석馮碩, 시중侍中 대숭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