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식
1. 소개
'''1990년대 세계 최고의 유도 천재 중 1인'''이었지만 국내 유도계의 파벌로 인해 올림픽에 한번도 나가지 못한 유도계의 파벌의 최대 피해자.
1990년대 한국 유도계의 간판 스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93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각종 국제 대회를 휩쓸었는데, 효과 한번 안 내주고(무실점이라 생각하면 된다.) 47연승을 달려 세계 유도계에서도 주목한 선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전기영 선수와의 상대전적 역시 11승 9패로 우위를 점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러나 이렇게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윤동식은 올림픽 메달은커녕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지도 못했다. 전기영이 체급을 올리면서 제대로 꽃을 피우나 했지만 부상으로 세계선수권을 낙마하기도 했으며, 윤동식이 용인대가 아닌 한양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발전에 출전만 하면 경기가 심판들 오심으로 판정이 얼룩져 문제가 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1] 추성훈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기득권의 텃세에 밀린 용인대 파벌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2001년 은퇴를 선언한 뒤에도 유도에 미련이 남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2004 아테네 올림픽을 노렸지만 그마저도 좌절됐고, 이원희 등의 쟁쟁한 후배들에게 밀려 해설자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비운의 유도왕'''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윤동식, 안녕 비운이여[2]
2. 전적
2.1. PRIDE
마사회 코치로 있던 그는 2005년 3월 돌연 종합격투기 진출을 선언하고 PRIDE와 계약을 맺는다. 유도 선수 출신들도 종합격투기계에서 많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동식 역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파이터들 사이에서는 '요시다 히데히코의 천적이었던 전기영보다 강한 선수'로 경계대상이었다고 한다.
약 한 달 동안 준비를 거쳐 2005년 4월, 미들급 그랑프리 토너먼트에서 일본의 프로레슬링 영웅 사쿠라바 카즈시와 경기를 치렀다. 데뷔전이자, 각각 다른 분야에서 정상급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선수끼리의 경기였기 때문에 한일 양국 팬들의 기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윤동식의 종합격투기 이해는 매우 낮았기에 사쿠라바의 공격에 유도에서처럼 거북이 자세로 방어하다가 TKO가 선언되었다. 애초에 종합격투기 경력 8년차에 PRIDE에서 잠시나마 정상급까지 올라본 베테랑 사쿠라바와 초심자 윤동식은 상대가 되지 않는 매치업이었던 것.[3]
이 경기 이후 팬들의 비난은 대단했다. 그러나 종합격투기와 유도의 차이를 확실히 느낀 윤동식은 묵묵히 훈련에 임했고 종합격투기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사쿠라바 역시 윤동식을 따뜻하게 맞아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 후 윤동식의 손을 잡고 링 위로 올라와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퀸튼전에서는 세컨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 23일, PRIDE 30에서 윤동식은 유도 선수 시절 자신이 두 번이나 꺾었던 타키모토 마코토와 일전을 치른다. 초반에 마코토에게 하체관절기를 걸어 궁지에 몰기도 했지만, 마코토가 필사적으로 로프를 잡고 버티는 반칙을 벌이는 탓에 불발에 그쳤고 결국 3:0 판정패를 당한다. 다시 한번 격투기 팬들은 그에게 비난을 서슴치 않았지만 윤동식은 다시 묵묵히 훈련할 뿐이었다.
2006년 2월 26일 PRIDE 31에서 그는 '람페이지' 퀸튼 잭슨과 맞붙었다. 당시 한국의 격투기 팬들은 잔인한 매치업이라며 모두 윤동식이 떡실신을 당하리라 예상했다. 종합격투기 경험이라고는 일본인 두 명과 매치해본 것이 전부인 윤동식이 프라이드 미들급 톱클래스인 퀸튼을 이긴다니, 누가 봐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퀸튼은 특유의 개그센스를 발휘해 "유도는 침대에서까지 쓸모없는 무술이다. 그러나 레슬링은 침대에서도 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라고 했고, 또 "식(Sik)이 링 위에서 아픈(Sick) 모습이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윤동식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레슬링이 언급된 이유는 퀸튼의 베이스가 레슬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윤동식은 타격공세를 뚫고 퀸튼에게 암바를 시도해 위험한 상황까지 몰고가기도 했고, 두 차례 있었던 슬램 시도도 적절하게 막아냈다. 코너에 몰려 스탬핑을 당하는 등 자신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전의 두 경기에 비하면 놀랍도록 발전한 모습이었다. 비록 3:0 판정패를 당했지만, 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에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퀸튼 역시 경기 후 락커룸에서 윤동식을 향해 'You're a good fighter!'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 경기를 통해 윤동식이 이후 보여줄 모습에 대한 기대 또한 당연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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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튼과의 경기 이후 그는 -93 kg인 미들급에서 -83 kg 웰터급으로 내려온다.
웰터급으로 전향한 이후 2006년 11월 5일 무사도 13에서 브라질리안 주짓수의 강자 무릴로 부스타만테와 맞붙었다. UFC 웰터급 챔피언 출신이었으며, 프라이드에 와서도 댄 핸더슨과 웰터급 타이틀을 놓고 맞붙은 강자였다. 모두들 우려하면서도, 이전의 기량 상승을 본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동식은 부스타만테의 주짓수에 끌려다니며 3:0 판정패를 당했다. 이후 프라이드가 와해되자 K-1 히어로즈로 건너왔다.
PRIDE에서 윤동식의 전적은 4전 4패. 하지만 이것은 흥행을 위해 주최 측이 의도한 결과였다. 자국의 유도영웅을 꺾은 윤동식은 애초부터 악역 포지션으로 입성한 것이다. 프라이드 데뷔전에서 가진 인터뷰를 보면 '''일본선수에게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라고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인에겐 지지 말라고 배웠다'''(日本人には負けるなと教えられてきたんだ)는 자막이 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쯤되면 주최 측의 의도가 훤히 보인다. 결국 PRIDE는 윤동식을 흥행을 위한 악역 떡밥 정도로만 다룰 생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쿠라바전을 다른 경기도 아닌 '''한일전'''으로 경기를 몰아가는 바람에 '''프라이드 사상 역대급 야유'''를 얻어먹고 경기를 시작해야 하기도 했으며 퇴장하면서도 야유를 얻어먹었다. 파이터는 물론 경기장 자체가 자신의 적인데 멀쩡하게 경기를 치룰 멘탈의 소유자가 있을까... 지금은 폐간된 스포츠 2.0에 인터뷰에 따르면 이 당시 사쿠라바와 함께 이미 다카다 도장에 소속된 윤동식아 프리로 선전이 되었고, 도장에서의 훈련도 그라운드만 시키는 등 PRIDE 특유의 협작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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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본 선수한테 지거나, 일본 선수를 꼭 이겨야 되거나,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은데.."
'''한국어 아는 시청자가 있었다면 뒤집어졌을 내용'''
MMA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28전 경력의 사쿠라바를 상대했었고 타키모토 전에서는 반칙성 플레이의 피해를 봤다. 퀸튼 잭슨과 부스타만테는 각각 프라이드 미들급 그랑프리 준우승자와 UFC 챔피언으로 3전, 4전의 경력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강자들과의 대결 가운데서 윤동식의 기량은 꾸준히 진화하였다.
2.2. K-1
그 포텐셜이 폭발한 것이 바로 2007년 6월 2일 LA에서 열린 K-1 다이너마이트 USA. 이 무대에서 그는 '노 머시' 멜빈 만호프와 만났다. 무시무시한 타격 능력을 자랑하는 멜빈은 1라운드 내내 거칠게 윤동식을 압박했다. '''거의 죽어가던''' 윤동식은 마침내 2라운드에서 그는 1라운드 내내 타격을 휘두르느라 다소 지친 마누프를 넘어뜨리는 데 성공하고, 곧바로 암바를 작렬시켜 종합격투기 첫 승을 거두게 된다. 이 때 그의 오른쪽 눈은 멜빈에게 맞아 완전히 부풀어 올라 있었다. 2라운드 1분 17초. 멋진 역전승으로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이중에는 영화배우 니콜라스 케이지도 있었다. 한국의 격투 커뮤니티에서도 근성의 승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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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의 출범 이후 그 역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를 옮겨 활약한다.
2007년 9월 젤그 '벤케이' 갈레시치을 상대로 1라운드 암바 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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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0월에는 파비오 실바를 역시 암바로 1라운드에 보내버렸다. 암바로 3연승을 거둔 그는 이제 '암바 대마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008년 4월 29일 DREAM.2에서는 오야마 슌고마저 판정으로 꺾으면서 4연승을 기록한다.
2008년 6월 15일 DREAM.4에서 웰터급의 강자 게가드 무사시에게 판정패하면서 그 기세가 다소 꺾였다. 이 경기에서 패배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게가드 무사시는 윤동식이 힘든 상대였다고 밝혔으며, 윤동식도 무사시는 강한 상대였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2라운드 막판 암바 그립을 잡아내는 등 어느 정도 선전했다.
2008년 9월 Dream.6에서 앤드류스 나카하라에게 TKO패했다. 2009년 7월 Dream.10에서는 제시 테일러를 만났으나 시합 중 발목부상으로 기권했다. 2009년 10월 Dream.13에서 타렉 사피딘을 만나 이겼다. 2라운드를 그라운드에서 가져가고 3라운드를 타격에 내줬지만 2라운드에서 캐치사인을 받고 RNC로 끝내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 워낙 앞섰기 때문. 다만 사피딘이 1라운드에서도 우세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윤동식의 페이스가 점점 떨어졌기에 판정에 이의를 제의하는 의견도 많았다.
2.3. 국내 격투기 활동
2010년 이후로는 이 분이 그렇듯이 교수직으로 활동하고, 스포츠 센터 사업을 하면서 거의 경기를 뛰지 않았다. 이는 일본 격투기계가 몰락하면서 윤동식 선수가 뛸 만한 단체가 거의 사라진 것도 한 몫했다.
2013년 2월 2일 K-1 Koreamax 2013 대회에서 일본의 킥복서 타키가와 료를 상대로 3년 4개월만에 복귀전을 가졌다. 경기는 1라운드 초반에 윤동식의 테익다운 이후 풀마운트를 뺏고, 파운딩을 날리자 타키가와 료가 탭아웃을 하며 매우 싱겁게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 이후 마이크웍에서 아직 선수 생활은 접지 않았으며, 추성훈과 대결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미스매치긴 했지만 파이터로서의 감각은 아직 살아있다는 평.
2013년 3월 23일 레볼루션 1회 대회에 참전하여 국가대표 출신의 복서 정용환을 1라운드 46초만에 암바로 잡아내며 복귀 후 2연승을 거뒀다.
이후 한동안 경기를 갖지 않다가 Road FC와 계약을 맺고 2014년 6월 26일 후쿠다 리키를 상대로 복귀전을 가졌다. 그러나 1라운드 약 3분만에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보이며 무기력하게 백을 내준 채 파운딩을 맞다 TKO패를 당했다.
2014년 11월 9일 ROAD FC 019에서 UFC 출신의 아밀카 알베스[4] 를 상대로 복귀전을 가져 판정승을 거뒀다.
2015년 ROAD FC 024 일본 대회에서 다카세 다이주에게 2:1 판정승을 거두었다. 원래 두 선수는 전에 붙을 예정이었지만 다카세 다이주가 계체에 실패해서 이번에 경기를 가졌는데 솔직히 경기의 재미는 없었다. 판정결과도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모를 정도..
2016년 ROAD FC 031 서울 대회에서 재일동포 '''최영'''에게 2라운드 KO패를 당하였다.
2017년 9월 ROAD FC 042 충주 대회에서 미노와 이쿠히사(미노와맨)과 경기를 하였다. 윤동식이 질 것이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상 외로 미노와맨의 그라운드가 크게 약해져서인지, 윤동식이 마운트 포지션에서 유효타를 넣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2라운드가 되어서도 그런 양상이 계속되어, 윤동식에 승기가 기우나 싶었으나, 미노와맨과 그라운드 대결 도중에 부상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ROAD FC 관계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미노와맨의 서브미션 승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아쉬운 패배로, 윤동식은 9승 10패가 되었다.
3. 파이팅 스타일
파이팅 스타일은 그라운드에 극단적으로 치중된 형태이다. 해외의 레슬러들을 상대하기에는 레슬링 스킬이나 파워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스탠딩에서의 타격기량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MMA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상태에서 데뷔했기 때문에 데뷔 초에는 적응에 문제가 많았다. 특히 유도 등 그래플링 수련자는 종목 특성상 타격훈련을 집중적으로 보강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실 나이 문제는 최무배나 김민수를 비롯하여 요시다 히데히코 등 많은 엘리트 체육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안이다.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이미 전성기를 보내고 왔다는 얘기가 되니까. 하지만 이것은 어찌보면 MMA에서 반쪽짜리 선수였던 것에 대한 자기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다니엘 코미어 역시 31살에 MMA로 넘어왔지만 UFC 2체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리고 킥복싱을 가장 잘하는 레슬러로 분류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윤동식의 플레이 스타일이 반쪽짜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선수 본인의 문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자인 상태에서 강자들과 맞붙어 끝까지버티며 시합을 펼쳤고, 경기 내용 역시 경기마다 어느 정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선수였다. 경기마다 엄청난 근성을 보여주었던 선수이기 때문에, 여러 격투 커뮤니티에서 윤동식의 근성은 높게 평가되었다.
4. 수상 기록
5. 기타
- 사쿠라바 카즈시는 데뷔전에서 뼈아픈 첫 패배를 헌납한 상대였으나 이후에는 합동훈련도 하고 사쿠라바가 윤동식의 세컨드를 봐주기도 하는 등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사쿠라바를 따라 DREAM으로 간 것이 이후 윤동식의 커리어에 엄청 도움이 되었다.
- 그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팀 윤은 FEG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MMA 체육관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최홍만 등 한국 선수들의 세컨으로도 자주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FEG가 어려움을 겪으며 활동이 크게 줄어 2010년에 이르러서 팀 윤도 활동이 크게 줄었다.
[1] 재미있는 사실은 라이벌 관계였던 전기영 역시 용인대가 아니라 경기대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전기영은 은퇴 후 용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2] 훗날 윤동식의 인터뷰로, 담담한 어조 사이에서 당시의 파벌 문제에 대해 윤동식이 느꼈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3] 아래의 자막 조작 건만 봐도 알 수 있듯 윤동식은 PRIDE 입장에서 순전히 떡밥 용도에 불과했다.[4] 원래 상대는 호안 카네이로였으나 부상으로 루이스 라모스로 교체됐고, 라모스마저 부상을 입으며(...) 알베스가 대체 선수로 들어왔다. [5] 다만 무릎이고 발목이고 오른쪽 왼쪽 수술안한곳이 없을정도이고 발가락,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격투기를 해야할 상황이었다. 늦은나이에 좋지않은 몸상태에서 다른 격투기술을 습득하는게 어려움을 감안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