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길/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2.1. 1997 시즌


1. 아마추어 시절


고등학교 시절부터 큰 체구와 강속구로 주목받았다[1]. 그가 재학하던 부산상고 야구부(현 개성고)는 야구 명문이기는 했으나 항상 경남고 야구부, 부산고 야구부에 비해서 전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학길은 부산상고 야구부를 떠받치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최동원이 떠난 마운드를 이어받아 홀로 에이스 역할을 했고 상무 야구단에 입대해서도 많이 던졌다.

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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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전역한 후 롯데의 지명을 다시 받아 입단했다. 1년차인 1986년에는 1승에 그쳤으나 2년차인 1987년부터 3년 연속 200이닝을 던지면서 신들린 듯한 피칭을 한다. 1987년 13승[2], 1988년 18승, 1989년 16승[3]을 올리면서 정상급 투수가 된다. 특히 1988년에는 18승 10패 3세이브 3.1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4] 다만 이 시절만 해도 20승도 하지못한 다승왕이라며 폄하를 당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89년은 무려 250이닝을 투구해 16승 11패 2세이브 2.7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0년에는 26경기 등판 143⅔이닝을 던져 3승 12패 4.07의 평균자책점으로 크게 부진했는데, 그간의 혹사 여파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런데 이 와중에 2승이 완봉승이다. 흠좀무..
1991년, 17승[5] 12패 3.2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윤학길은 그 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1992년에도 17승[6] 5패 2세이브 3.6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포스트시즌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7]
참고로 윤학길은 무려 6시즌이나 200이닝 이상을 던져 200이닝 이상 투구 시즌이 가장 많은 투수이다. 2위는 최동원(1983년~1987년)과 정민태(1996년~2000년)의 5시즌. 다만 최동원과 정민태의 경우 연속 시즌 200이닝이다. 윤학길은 1990년만 아니었다면 7년 연속 200이닝도 가능했다.
1993년부터 구위 저하의 조짐이 보였으나 203이닝을 투구해 12완투 4완봉을 곁들여 12승에 3.01의 평균자책점의 성적으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여줬다.[8] 하지만 이듬해인 1994년 급격한 구위 저하와 잔부상의 여파로 4승 7패로 크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1995년은 윤학길이 마지막으로 두 자리수 승수를 기록한 시즌이다. 159와 1/3이닝을 던져 12승 8패 3.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속구 최고 구속이 140km/h정도에 머무를 정도로 확실히 노쇠한 모습을 보였으나 날카로운 컨트롤과 수준급의 커브와 슬라이더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에 거둔 12승은 윤학길이라는 이름값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난 10년간 1600이닝 이상을 던졌던 노장 투수의 기록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해가 마지막이었다. 1996년은 겨우 15경기에 등판해 3승 5패 4.5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크게 부진했다. 다만 9월 13일 잠실 LG전에서 힘겹게 9:4로 4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100완투의 위업을 달성했다'''. 다른 때였다면 진작 교체되었을 상황이었겠지만 100완투 기록이 걸려있는 탓에 끝까지 밀어부쳤다고 한다.

2.1. 1997 시즌


1997년을 앞두고 절치부심하며 충실한 동계훈련과 함께 의욕적으로 시즌을 준비했지만, 결국 선발투수 보직에서 낙마하고 중간계투로 밀려났다. 시즌 초반 구원승을 하나 따내긴 했지만 총 4경기 등판에 3이닝 8피안타 2피홈런 6실점(4자책점) 12.00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초라한 성적과 함께 2군으로 강등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1군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결국 시즌 중인 7월 24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군 투수코치 보좌역으로 코치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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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달인 8월 24일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르고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9]
총 12시즌동안 기록한 성적은 117승 94패 10세이브 3.33의 평균자책점. 1863이닝을 던졌으며, 무엇보다 '''통산 100 완투'''를 기록했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멸의 대기록이다. 세부 내역은 총 75완투승(20차례의 완봉승 포함) 25완투패.
이닝 이터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는지 윤학길 본인은 은퇴 당시 가장 아쉬운 점으로 2,000이닝 돌파를 이루지 못한 점을 꼽았다고 한다.
[1] 원래 2루수였지만 고교 입학 후 투수로 전향했다[2] 11선발승으로 팀내 최다 선발승[3] 14선발승으로 삼성 김성길과 선발승 공동 2위(1위-태평양 박정현 15, 해태 이강철 15)[4] 5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어 해태 이상윤과 13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2위(1위-빙그레 한희민 14)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한다. 윤학길의 처음이자 마지막 다승왕 타이틀.[5] 2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어 해태 선동열과 15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2위(1위-빙그레 한용덕 16)[6] 모두 선발로만 기록하여 해태 이강철과 선발승 공동 1위[7] 신인왕 염종석, 포스트 시즌에서 맹활약한 박동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시즌 내내 선발진의 일원으로 200이닝 이상을 소화해낸 윤학길이 없었다면 롯데의 포스트 시즌 진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8] 그런데 시즌 종료 후 롯데구단은 200이닝을 넘게 먹고 12완투 4완봉에 12승을 거둔 윤학길에게 '''성적 부진'''이라는 사유로 연봉을 깎으려 들었다. 윤학길이 12승 투수의 연봉을 깎는게 말이 되냐며 항의해 결국 200만원 인상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세부 스탯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단지 승패수만 보고 연봉을 책정했던 당시의 후진적인 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이다.[9] 다만 이 시즌 롯데가 48승 1무 77패로 압도적인 꼴지를 기록한 시즌인지라 만원관중은 커녕 텅텅 빈 관중석을 보며 은퇴식을 치렀다고 한다. 혹자는 은퇴할 때까지 '고독한' 황태자였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사진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부분은 윤학길 선수의 딸인 펜싱선수 윤지수의 어릴 적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