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현(투수)
1. 소개
190cm가 넘는 키와 그런 큰 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땅위 5cm 언더핸드 투구로 유명했던 선수로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를 거쳤다. 하지만 김성근 당시 감독에게 신인 시절부터 혹사를 당해 전성기가 오래 가지 못했던 비운의 투수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65승 54패 21세이브 3.45
2. 선수 시절
수원 유신고를 졸업하고 1988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는 6경기에 출전하여 18 2/3이닝을 던져 7.71의 방어율을 기록하였다.[1]
데뷔 첫해인 1988년을 평범하게 보낸 박정현은 프로 2년째인 1989년에 명성을 날리며 팀의 상위권 도약에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 19승 10패 2세이브 2.15, '''242 2/3이닝'''을 투구하며 신인왕을 품에 안는다. 이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고졸 출신이 신인왕을 수상한 사례이며, 중고 신인왕을 차지한 것이다. 동시에 다승과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2]
당시 박정현은 타격왕 경쟁에 나선 삼성의 2루수 강기웅과 치열한 신인왕 경쟁을 벌였는데, 김성근은 신인왕 경쟁에서 강기웅보다 우위를 실어주기 위해 박정현에게 역대 최다승(그전까지는 MBC의 김건우가 18승으로 신인왕 최다승을 차지하고 있었다.)을 안겨 주기로 결심하고 8-1로 이기고 있던 대 해태전에서 선발 최창호를 강판시키고 박정현을 등판시켜 19승째를 올리게 한다.[3][4] 스탯만 놓고 보면 밀어주기를 하지 않더라도 20승 이상을 노릴 만했지만, 당시 태평양이 지독한 물방망이 타선이어서 힘들게 완투하고도 패전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당대 최강이었던 해태 선동열과도 몇차례의 선발 맞대결을 펼쳐 계속 아깝게 패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그래도 이때 세운 19승[5] 은 현재에도 역대 신인왕 최다승으로 남아 있다.
1989년 선발에 불펜 알바까지 병행하며 정규시즌에만 242 2/3이닝을[6] 던졌던 박정현은 준플레이오프에도 맹활약 하게 된다. 박정현은 삼성과 치른 준플레이오프 1차전(10월8일)에서 선발등판하여 14회까지 완투했다. 박정현이 1차전에서 던진 투구수는 173개였다. 1차전을 승리한 이후 모두 승리에 도취된 사이 박정현은 허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현은 단지 이틀만 휴식한 후에 3차전 5회에 다시 등판했다. 구단 측에 따르면 박정현이 자청해서(?) 구원등판한 것이라 한다. 박정현은 9회 2사까지 역투(투구수 75)했으나 마지막 한 타자를 남겨둔 상황에서 허리를 부여잡으며 마운드에 주저앉아 구급차를 타고 인천중앙병원으로 실려갔다. 이후 태평양은 삼성을 이기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경험 부족 및 타선의 부재로 해태에게 완패한다.
1990년 13승 7패 7세이브 2.63 191 2/3이닝
1991년 10승 12패 3.47 184이닝
1992년 13승 7패 6세이브 3.69 165 2/3이닝
89년 이후에도 그는 태평양의 1선발로 활약하며 4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따 내지만, 혹사로 인해 매년 소화이닝이 줄어들었고, 결국 언더핸드로서 그렇게 많은 이닝을 던진 게 탈이 나서 1993년 시즌에는 재활에 전념하게 된다.
1994년에 복귀를 하긴 했지만 예전의 위력을 전혀 찾지 못했고, 이미 혹사로 몸이 망가진 상태여서 경기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게 된다.[7] 이 때 그의 나이 25세... 이제 전성기에 진입할 나이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단으로부터 재기불능 판정을 받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패전처리 투수로 4년여 동안 암울한 세월을 보내던 박정현은 1998년 7월 31일[8] 조규제를 상대로 팀 동료인 가내영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그렇게 옛 은사를 만나 조금씩 관리를 하며 1999년 부활을 알렸지만, 당시 '''IMF 사태'''의 여파로 쌍방울의 내부 상태는 그야말로 망했어요가 되었던지라 득점지원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고 , 그 해 37경기에 출전해 평균자책점은 3.92로 준수했으나 5승 11패를 찍고 만다.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허덕이던 쌍방울이 해체 후 신생팀인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기존 선수들과 계약하면서 다시 인천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2000년 32경기에 등판해 1승 2패 평균자책점 5.75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시즌 후 SK에서 방출당하며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3. 혹사와 선수생명 단축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대목에서 빼놓지 않는 선수가 박정현이다. 박정현이 선발 투수의 이닝으로 따지면 박정현이 아주 많은 이닝을 던진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극소수 야구팬들도 있다. 하지만 1989년에 선발과 불펜으로 정규시즌에서 '''242 2/3이닝'''을 던지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다시 '''18 2/3이닝'''을 던진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주장은 전혀 납득하기 힘들다. 1989년 박정현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와중에 무려 '''18완투'''(정규시즌 17, 준플레이오프 1)를 했다. 1989년의 박정현 기용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후에도 3년 간 연평균 '''10완투'''를 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가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때 3차전에서 자진(?) 구원등판 9회 1사까지 던지다가 허리 통증으로 주저앉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에도 언론에서 박정현의 무리한 등판을 보고 “원년(1982년) '''박철순'''[9] 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박정현의 부상은 큰 키에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폼임에도 불구하고 마구잡이로 등판시켜 망가뜨렸다는 게 중론이다.[10][11] 오버핸드-사이드암이 팔꿈치와 어깨에만 데미지를 준다면 언더핸드는 몸 전체로 데미지를 분산시킨다. 게다가 박정현처럼 체구가 크고 릴리즈포인트가 낮으면 필연적으로 더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이건 부상을 안 당할래야 안당할수 없는 노릇. 실제로 김성근 감독 역시 이러한 점을 인정했다.
대표적 언더핸드인 김병현같은 선수들은 신장이라도 작지만 4년 동안 매시즌 평균 190이닝을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노예처럼 혹사시켰다는 점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전성기인 1989~1992년 동안 최다 이닝 소화 3위 투수가 박정현이다. 1위는 이강철 [12][13] , 2위는 윤학길). [14] 1994년 복귀하고 돌핀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4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하고 정명원이 40세이브를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그는 이미 한국 나이인 25세의 나이에 추락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겠지만, 신인 시절 보여준 성적과 재능, 잠재력 등을 고려하면 치면 KBO 언더핸드 에이스 계보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다. 다만 신인 시절의 무리한 혹사로 인해 전성기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 그럼에도 한국의 언더핸드 투수를 논한다면 빠지지 않을 투수 중 하나임은 확실하다.
결국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로서, 좀더 오래 팬들의 사랑 속에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음에도 불과 몇년 동안의 반짝 활약만 한채 쓸쓸히 잊혀져 버린 박정현의 사례는 김성근식 혹사가 낳은 또 다른 폐해의 증거로 남게 되었다. 1년 후 김성근은 삼성에 가서도 박정현과 비슷한 잠수함 투수를 또 혹사 시키는데 그는 재일교포 '''김성길'''. 신인 시절부터 혹사당한 박정현과는 달리, 김성길은 91년 당시 '''만 35세'''의 구원투수가 정규리그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해 무려 52경기(14선발) 188이닝, 준플레이오프에서도 2경기 288구 이상을 던지면서 철저하게 혹사당했다.[15] 이후 김성길 또한 삼성 구단으로부터 재기불능 판정을 받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어 1993년 은퇴한다. 그리고 김성근은 또다른 잠수함 투수를 데려와서 혹사를 시키는데 그 선수는 다름아닌 '''김현욱'''.
4. 은퇴 후
2000년대 중반 상무 피닉스 코치로 재직했다가, 이후 고양시의 주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일했다. 2009년 초 주엽고 야구부가 해체하며 물러났다. 최창호의 말에 의하면, 그 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현재 토론토 사회인 야구리그 (MPBL) 감독 겸 선수로 플레이 중. 간간히 오버스로 투수로 등판한다고 한다.
5. 여담
2014년 4월 10일, 마구마구2014 1주년 기념 방송 예고대로 89 박정현의 엘리트 카드 가 업데이트되었다.(다른 신규 엘리트는 95 전준호(가명:박현석), 06 권오준, 02 송진우(가명:박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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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16] 주간야구 잡지의 기사에 의하면 태평양 돌핀스 시절 한솥밥을 먹던 염경엽이(당시 태평양 돌핀스 유격수) 옷에 대한 코치를 해 줬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newhsg/90155358051 현대 유니콘스를 매우 잘 아는 블로그 주인장의 글에 박정현의 딸이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다. 지금은 사라져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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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의 언더핸드 투수 박종훈이 롤 모델로 삼은 선수라 한다. 이 둘은 2015년 8월 15일 문학 두산전에서 경기 전 함께 시구하였다. 은퇴한 지 한참 지난걸 감안해도 팔각도를 조금 올려서 던졌다고 한다. 그만큼 얼마나 혹사 당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17]
마구마구에서 8월 26일자로 엘리트 카드가 추가되었다! 연도는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소속이다. 그리고 마구같은 특이 싱커 때문에 하위 호환 레어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상무 코치를 역임할 당시 상무에서 복무 중이었던 김대우의 미국 진출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기도 했다.
6. 역대 성적
7. 관련 문서
[1] 유니폼은 94년~95년 시절이다. 안타깝게도 저 두 시즌은 박정현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2] 이때 돌핀스의 또다른 선발 최창호와 정명원은 평균자책점 3,4위를 기록하며 돌핀스의 투수력을 입증하였다. 참고로 89년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1위는 선동열.[3] 3년 뒤인 1992년에는 빙그레 김영덕 감독이 송진우를 다승 겸 구원 1위로 만들어 주려고, 같은 수법을 사용한다. 이때의 피해자는 빙그레의 한희민.[4] 이때 박정현은 자기가 경기 안 나갈 줄 알고 식당에서 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코치가 등판지시를 하니 당황해서 빨리 먹다가 급체를 했다고 한다(...)[5] 15개가 선발승이었는데 88년 빙그레 한희민이 거둔(16승 중 14개) 기록을 경신했고, 이 기록은 당시 해태 이강철과 함께 잠수함 투수 최다 선발승 타이기록이었지만 92년 이강철이 이 기록을 깨뜨렸다(18승 중 17개)[6] 역대 KBO 언더핸드 스로 단일시즌 최다이닝 [7] 1994년 37 2/3이닝 ERA 4.54, 1995년 4 2/3이닝 7.71, 1996년 15 2/3이닝 6.89, 1997년 25 1/3이닝 6.39의 성적을 기록.[8] 98년 트레이드 기한 마감일. 최창호 역시 이날 박종호를 상대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된다.[9] 박철순은 이후 기나긴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게 되는 원인이자 원년 이 후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둬 본 적이 없다.[10] 이때만 해도 선수들의 제구 안정을 위해 언더 전향은 수시로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196cm 언더핸드 박진철도 그런 케이스. 하지만 박정현만큼 낮은 릴리스 포인트는 아니었다.[11] 이는 전형적인 김성근 감독 쉴드론이다. '큰 키로 인한 무리한 투구 폼을 가진 투수'라면 그에 맞게 관리해 줘야 옳은 일이다.[12] 그시절의 언더핸드이면서도 이례적으로 롱런했지만 이건 이강철이 괴물이라고 봐야.. 그리고 그 이강철도 1년에 240이닝을 던지진 않았다. 참고로 이강철의 신장은 180cm.[13] 이강철은 투구폼이 박정현보다는 간결해서 무리가 심하게 갈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연성 관리도 있었던지라 롱런할 수 있었다.[14] 다만 1980~1990년대 프로야구는 잘하는 투수 한 명이 선발-중간계투-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경기에서 이기게 하는 투수 운용이 주류였다. 선동열, 송진우 등의 유명 투수들 역시 선발보다는 릴리프로 등판한 적이 많았으며, 웬만한 에이스급 투수들이 이런 식으로 등판하는 것 역시 일상사.[15] 이 때 김성길은 시즌 끝나고 밥숟가락도 못 드는 상태가 되고 만다.[16] 이 글에서 박정현이 당시 프로 6년차라 했으니 대략 1993년경이다.[17] 참고로 가수 박정현은 2012년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고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