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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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즈),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약했던 재일교포 야구 선수. 우완 사이드암 투수이다. 별명은 깡마르고 검은 피부가 닮았다고 해서 '''부시맨.''' 등번호는 17번으로 이후 박충식이 물려받았다.
삼성 라이온즈 구단 역사에서도 후배인 이태일, 박충식 등과 더불어 손꼽히는 언더핸드 에이스이자 전천후 등판도 마다하지 않은 살림꾼. 그리고 공교롭게도 181구의 박충식과 똑같이 181구[2][3][4] 라는 초인적인 공을 던졌던 장사.[5]
2. 선수 경력
2.1. 고교 야구 시절
1972년(고1) 여름 고시엔 대회와 1974년(고3) 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으나 우승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74년 재일동포팀의 일원으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하여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2.2. 일본 프로야구 시절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지명받지 못해 실업팀인 혼다 스즈카 경식야구부에 입단했다가 1977년 열린 1978 드래프트 때 한큐 브레이브스에 6순위로 지명받고 입단했다.
한큐에서만 9년간 있었으며, 대다수 시즌을 1,2군을 오가는 패전처리로 보냈다. 9년간 성적은 78경기 등판 184이닝 1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 4.89.
2.3. KBO 시절
김성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재일교포로 알려져 있던 터라 한국프로야구에서 여러 차례 영입을 추진하였다.
1986년 해태 타이거즈가 영입을 추진했고, 한큐와도 얘기가 잘 돼 해태 입단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김성길 본인이 해태 입단을 거절했다. 재일교포로 이미 해태에서 활약했던 주동식이 해태에서의 푸대접 때문에 만류한 것도 있고, 삼성 라이온즈가 한큐 구단이 아닌 김성길 본인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김성길은 무조건 삼성 아니면 안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해태는 김성길 영입에서 발을 뺐다.
1987년 7월, 한큐에서 김성길을 임의탈퇴 처리하자 여러 팀에서 그를 영입하려 해 그의 몸값은 더욱 올라갔다. 결국 삼성이 4천만엔(당시 환율로 2억원 이상)으로 김성길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1군에서 고작 1승 밖에 올리지 못한 선수를 김일융보다 더 비싸게''' 데려 온 것. 물론 언론에는 낮은 가격으로 발표했다.
1987년에는 시즌 중에 입단해 11경기 밖에 등판하지 않았지만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그 몸값을 톡톡히 해냈다. 1989년에는 14승, 1990년에는 13승을 올렸고 특히 1989년에는 233⅔이닝을 소화하며 김시진을 잇는 삼성의 에이스로 올라섰다.[6]
1991년 시즌, 김성길은 팀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시즌을 시작한다.[7] 그렇지만 본래 마무리투수로 낙점된 김상엽이 부진에 빠지자 시즌중반부터 김상엽을 대신해서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다.[8] 특히 그해 7월에 기록한 5경기 연속 세이브는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9]
위에 언급한 것처럼, 1991년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기존 마무리 보직 외에 중간계투, 심지어 선발까지 보직을 가리지 않고 애니콜로 굴렸다. 이 때문에 '''만 35세의 구원투수가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해서 무려 52경기(14선발) 188이닝을 던지면서 철저하게 혹사당했다.''' 이 혹사는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1차전에 구원등판해 80구를 던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불과 사흘만인 3차전에는 1회에 선발투수 성준을 대신해 구원등판, 181구를 던지며 12.1이닝을 소화하며 13회까지 던졌다. 이는 포스트시즌의 명승부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도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혹사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오죽하면 '투수 혹사'에 관한 인식이 지금보다 희박했던 당대에도 8개구단 팬들이 '''"김성길은 저러다 죽는거 아니냐"'''고 입을 모았을 정도이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식사를 하려고 하였을때 '''밥숟가락도 못들었다.''' 이 정도로 혹사가 심했다니 상상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이다.
김성근 감독 첫 해인 1991년 김성길은 다승 4위, 세이브 2위, 그리고 팀을 정규시즌 3위로 이끄는 등 기록상으로는 최고의 해를 보냈지만 결국 말도 안되는 혹사 때문에 몸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부상을 얻었다.
혹사의 후유증 때문에 부상을 얻은 김성길은 이듬해인 1992년에 급격한 하향세를 보였다. 그해 김성길은 불과 17경기에 등판하여 1승7패1세이브 평균자책점이 5.14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본인이나 김성근에게나 손해인 것이, 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은 롯데에게 불과 1승도 못 건지고 2연패로 탈락했다. 일부 삼성 팬들은, 김성길이 건재했다면 당시 준플레이오프에서 그토록 맥없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고 보고 있으며, 김성근의 혹사 사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예시이다.
1992 시즌이 끝나자 결국 김성길은 신경식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10] 경질된 김성근체제 정리 차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김성길 본인의 부상과 그로 인한 기량의 급격한 하락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된 김성길은 재기를 다짐했지만 이미 그의 나이 서른 일곱. 혹사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1993년) 고작 2승[11] 을 거두는 데 그치며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
재일교포 투수들 중 장명부, 김일융, 최일언 다음 가는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 말년은 초라했다.
대한민국에서 기록은 7년간 211경기 등판 925이닝 54승 46패 39세이브 평균자책 3.38.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택시운전기사, 주유소 직원 등을 전전했다고 한다.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던 2001년 1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4. 연도별 성적
4.1. 일본 기록
4.2. 한국 기록
- 투수 기록
- 타자 기록
5. 이야깃거리
삼성이 1987년 7월 김성길을 영입한 후 선수 등록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당해 2월 28일을 넘기면 군제대 선수, 트레이드 선수 외에는 추가 등록이 불가능하기 때문. 그러나 삼성은 '''한큐에서 트레이드한 것'''으로 등록, KBO는 그걸 그대로 인정했다.
해태와 삼성이 김성길 영입에 열을 올리던 때에 당시 장명부는 김성길에 대해 "4류 투수"라고 말했다. [12] 또, 1987년 8월 12일 한국 프로야구에 첫 등판한 김성길의 투구를 본 한 심판은, "그 정도 투수에게 2억원씩이나 줘야 한다면 진동한은 3억원짜리."라고 평했다. 즉,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오버페이'라는 것이다.
[1] 中京大学附属中京高等学校. 아이치 현의 야구명문교로, 고시엔 출장 횟수가 많다. 많은 일본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했다.[2] 1991년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연장 10회 1사 1루에서 (선발투수 김상엽에 이어서) 마운드에 오를 때, 당시 중계를 담당했던 KBS 이장우 캐스터가 직접 언급한 사실이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181구라는 초인적인 투구를 하고..." 그 외 당시 신문기사들을 찾아보면 180개라는 투구수가 언급된다.19910926 중앙일보.19910930 동아일보. 180구 아니면 181구인데, 당시 이장우 캐스터가 그냥 180구라고 하면 될 걸, 굳이 181구라고 좀 더 구체적인 강조를 한 걸 보면, 181구가 더 정확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몇몇 야구 칼럼니스트들이나 기자들, 그리고 일부 팬들이,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김성길이 200구를 넘게 던졌느니, 198구를 던졌느니(특히 김은식 칼럼니스트) 각각의 의견이 나오는데, 잘못된 기억이다.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앞에 링크된 동아일보 19910930 기사만 봐도) 당시 상대팀인 빙그레 김영덕 감독조차, "김성길이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 180개 정도의 공을 던졌기 때문에 피로회복이 힘들 것이다"고 직접 언급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당시 준플레이오프 3차전은 KBS 지상파 중계였는데 9회까지만 중계하고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었다(라디오중계는 경기 끝까지). 결국 (현장에 있던 직관팬, 관계자, 취재진들을 제외하면) 그날 연장전에서 김성길의 투구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당시는 케이블, 인터넷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KBS에는 매일밤 방송되는 '오늘의 스포츠'(현재의 아이 러브 베이스볼의 지상파 버전)라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있긴 했지만, 연장전에서의 김성길 투구는 보여주지 않고, 연장 13회말 경기를 종료하는 박동희의 마지막 투구만 보여준다.[3] 참고로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 등판한 김성길은, 첫타자 조양근에게 기습번트안타에 3루수 김용국의 악송구가 겹치면서 주자 2-3루를 허용했고, 다음타자 김상국에게 초구 희생플라이를 허용하면서 경기를 내준다. [4] 이후 2패에 몰린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 김성길은 선발등판해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다음날 모 스포츠신문에서는 그를 슈퍼맨으로 지칭한다.[5] 놀라운 것은 이미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5이닝 이상 투구 후 불과 이틀 휴식하고 등판이었고, 삼성과 롯데 모두 1승씩 주고받아 최종 3차전을 치르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81구 경기 당일은 수중전이었다. 경기 내내 비를 맞으면서 투구한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5세였다.[6] 참고로 이 해에 삼성은 팀 평균자책점이 4.42로 7개 구단 중 최하위였다. 그야말로 김성길 혼자 팀을 이끌어 간 것.[7] 개막전 당시 투구내용은 안 좋았지만 이후 6월까지는 팀의 선발진 일원으로 출전했다.[8] 그 전에도 중마무리로 등판한 적이 몇번 있긴 하다. 대표적인 경기가, 당시 이만수가 프로야구 최초 600타점을 기록한 4월 27일 LG전에 4회부터 구원등판해 5이닝을 노히트로 막은 경기이다(이 경기는 토요일 지상파 생중계).[9] 중간에 휴식일없이 5경기를 연이어 등판했다(...)[10] 여담으로 트레이드 대가는 선수가 아닌 쌍방울의 2차 1라운드 지명권.(정영규)[11] 2승5패6세이브 방어율3.93[12] 일본프로야구 커리어를 보면 김성길은 패전처리로도 정착을 못했으니 일본에서도 괜찮은 커리어를 남긴 장명부가 보기에는 그럴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