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민

 

'''한희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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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3번'''
팀 창단

'''한희민(1986~1992)'''

임헌홍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1번'''
신경식(1991~1992)

'''한희민(1993)'''

장정순(1995~1996)
'''KIA 타이거즈 등번호 80번'''
결번

'''한희민(2006~2007)'''

김정수(2010~2011)


[image]
[image]
빙그레 이글스 시절
삼성 라이온즈 시절
[image]
오리고기 식당을 하기 이전에 찻집을 운영한 시절
'''이름'''
한희민(韓禧敏 / Hei-min Han)
'''생년월일'''
1962년 7월 19일 (62세)
'''출신지'''
충청북도 영동군[1]
'''학력'''
세광고 - 성균관대 [2]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1986년 1차지명 (빙그레 이글스)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 (1986~1992)'''
삼성 라이온즈 (1993)
줜궈 베어스 (1994~1995)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
논산시 리틀야구단 감독 (2014~)
'''병역'''
병역특례[3]
1. 소개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이야깃거리
4.1. 콩라인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image]
빙그레 이글스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으며, 등호는 13번과 21번을 달았다.
이상군과 함께 한화 이글스의 원투펀치를 이뤄 한화의 화려한 에이스 계보의 가장 위에 있는 선수이며 '''한국프로야구 1호 언더핸드 투수'''로 꼽히는 인물이다.
KBO의 1990년대 언더핸드 선발투수 이야기를 하면 이강철, 박충식, 성영재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4]

2. 선수 생활


빙그레 이글스(1985년 창단)의 창단멤버로서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우완 언더핸드 투수였으며 슬라이더와 싱커를 주무기로 많은 승수를 거두었다. 언더핸드 투수 중에서도 몸을 비틀어서 던지던 특이한 투구폼은 아직도 이따금 회자된다.
창단 초기 빙그레에서 한희민은 이상군과 함께 쌍두마차를 이루어 에이스 노릇을 하였다.[5]
1986년 4월 1일 선발 장명부를 구원하며 첫 등판한 한희민은 4월 5일 첫 선발 등판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화려한 데뷔를 한다. 이날 한희민의 완봉승이 이글스 창단 첫 승이었다. 이후 1986년부터 88년까지 탈삼진 3위, 1988년 다승 2위/승률 3위, 1989년 승률 2위를 기록하는 등 팀의 2선발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투수로 활약을 펼쳤다.
김영덕 감독의 타이틀 만들어주기로 피해를 받은 사례 중 한 명이었다. 1992년 시즌 송진우를 다승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시즌 막판 해태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잘 던지고도 5회에 송진우로 교체되었던 것.
이에 앞서 1990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팀이 4:2로 앞선 7회 말 선발 한용덕이 솔로 홈런을 맞아 1점 차로 추격 받으면서 구원 등판했지만, 9회 말 김용철(야구)이만수에게 연속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는 북일파 한용덕의 승리를 비북일파(세광고) 출신인 한희민이 무산시킨 모양새로 비춰졌다.
그 충격 탓인지 스스로 100승을 목표로 하던 한희민은 이유 없는 강판과 코치진의 차별 등으로 결국 1992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는 소동을 벌였고, 1993년 1월 25일 빙그레 이글스가 현금 3,000만 원과 박철희를 받는 조건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 되었다.[6] 관련기사
삼성에서 기록한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이적 후 첫 경기(5월 26일 대구 태평양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선발 승을 거둬 팀 통산 700승에 공헌하였고 6월 23일 대구 LG 더블 헤더 2차전에서 구원 승으로 자신의 통산 80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중간계투 보직 변경에 불만을 품어 2군으로 강등된 후 퇴단하고 다음 해인 1994년에는 대만프로야구에 진출했다. 대한민국 선수 중 최초의 대만 프로야구 진출. 쥔궈 베어스(현 푸방 가디언즈)에 입단해[7][8]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2년 동안 겨우 6승 16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프로 입단을 타진했으나 실패하며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편 데뷔 첫 해 청보에게만 3 완봉승을 기록했고 다음 해 거둔 3 완봉승 중 2승이 청보전이었으며 1988년 4 완봉승 중 MBC전 2승(4월에만 2 완봉승), 롯데전 2승을 기록했다.[9]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간만에 매스컴을 탔는데, 고향 '''영동의 산으로 들어가서 도인이 되었다'''. 도인 같이 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길러 꽁지머리로 묶고, 찻집을 운영하며 평소에 좋아하는 난초를 기르고 있었다.
2003년 초 한화 이글스가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하며 하산했고, 2005년에는 KIA 타이거즈 2군 코치로 선임되었으나, 서정환 감독이 잘리면서 당연히(?) 같이 잘렸다. 이후 2년 동안 광주동성고, 경북고, 강릉영동대, 대전고 등에서 코치로 있었다.
2013년 6월 KBS 2TV에서 방송한 스포츠다큐 승부의 잠수함편에서 그의 투구를 설명하면서 인터뷰를 하였다. 해당영상
그리고 '''다시 입산했다'''.관련기사 의외인 점은 고향 쪽이 아닌 광주 근처로 갔다. 그곳에서 식당 하나를 차렸는데 손재주 하나는 뛰어났던지 시설 등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꽤나 인심이 좋다고 한다. EBS방송에서 그가 운영하는 '''오리식당'''이 방영된 적이 있다. 2011년 5월 대전일보 보도에 따르면 광산구의 저수지 근처 수위가 높아져 충청남도 계룡시 쪽으로 가게를 옮겨 운영하였다.
[image]

2014년 5월 28일 NC 다이노스한화 이글스가 치른 경기에서 관중석에 모습을 보였다[10]. 2017년 현재 리틀 야구단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운영하던 식당까지 접고 야구에 전념한다고 한다.
[image]
2018년 9월 5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와 한화의 경기에 참관하였다. 이날은 논산시 리틀야구단이 초청되어 애국가를 부른 날이었으며, 한희민은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이날 해설이었던 차명석 해설위원도 빙그레 이글스의 레전드가 재능기부라는 좋은일을 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덤으로 이날 선발이었던 김재영도 사이드암 투수였다.

4. 이야깃거리


  • 큰 키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농구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진학한 중학교에 농구부가 없고 야구부만 있어 야구를 시작해 야구선수가 되었다.
  • 그 특이한 투구폼 때문에 엉뚱하게도 마구마구슬러거에서는 나름대로 인기 있는 선발카드로 꼽힌다.
  • 대학 동기이기도 한 前 해태 타이거즈 포수 장채근과는 절친이다. 얼마큼이냐 하면 장채근이 프로 입단 초기에 한희민이 있는 빙그레로 트레이드시켜 달라고 했을 정도다. 한희민이 KIA 코치로 입단해 이후 광주에 정착한 것도 장채근 때문.
  • 그리고 그 장채근은 자신이 받은 공 중에서 최고의 공은 던진 투수는 한희민이라고 말한다. 절친이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절친이어도 자신이 오랫동안 뛰었던 해태 타이거즈뿐만 아니라 KBO 리그에서도 내로라하는 이 던진 공보다 좋은 공을 던졌다고 한 것은 그만큼 한희민이 뛰어난 투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선동열? 한희민이 최고였다”
  • KBO 리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은 1991년 6월 19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빙그레-해태전에서 해태의 선발로 등판한 선동열이 13이닝 완투하면서 기록한 18개이다. 이 경기에서 빙그레의 선발투수가 한희민이었다. 한희민 또한 13이닝 완투하였으며, 당시 프로야구는 시간제한이 있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1 대 1 무승부로 끝났다.
  • 자가용에 경광등과 스피커를 달아 경찰차처럼 꾸미고 길을 가면서 경찰 흉내를 내는 기행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다가 결국 불법 부착물 때문에 경찰에 걸려서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 동시기 같은 팀에서 활약했던 이상군과는 동갑내기지만, 한희민이 1년 유급했기 때문에 연차로는 이상군이 선배다.
  • 홈런 공장장이라는 오명이 있었다. 통산 8시즌 104개에 전성기(86~89년) 57개의 피홈런을 기록했다. 데뷔시즌인 1986년 피홈런 부문 1위를 달성했고[11], 이후 1987년을 빼고는 1990년까지 꾸준히 피홈런 3걸 안에 들어갔다. 이는 언더핸드 투구폼 탓으로, 때문에 바로 뒷 세대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이강철 또한 홈런 공장장으로 유명했으며 이쪽은 롱런했던 탓에 피홈런 역대 3위까지 올랐다.

4.1. 콩라인


'''우승 0회, 준우승 4회[12]'''의 '''완벽한 콩라인'''. 이 정도면 홍진호 에 버금가는 기록이다.
한희민은 당대 최강 팀인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맞아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는데, 4번의 준우승 중 한 번은 롯데 자이언츠에게 당했다.[13]
선수 시절 콩라인이었던 이정훈이나 성준은 코치시절에는 우승을 경험하였지만 한희민은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빙그레
29
175⅓
9
13
0
0
0.409
3.13
136
'''18'''
(1위)
59
'''123'''
(3위)
67
'''61'''
(5위)
'''1.06'''
(5위)
1987
30
'''206'''
(4위)
13
8
4
0
0.619
'''2.36'''
(4위)
156
7
48
'''116'''
(3위)
64
54
'''0.97'''
(2위)
1988
31
'''188'''
(2위)
'''16'''
(2위)
5
5
0
'''0.762'''
(3위)
3.11
'''188'''
(3위)
'''16'''
(3위)
62
'''103'''
(3위)
72
65
1.29
1989
30
176⅔
'''16'''
(3위)
4
'''6'''
(5위)
0
'''0.800'''
(3위)
'''2.50'''
(5위)
130
'''16'''
(2위)
61
74
52
49
'''1.05'''
(2위)
1990
26
157
12
9
5
0
0.571
4.13
154
'''22'''
(2위)
58
62
'''85'''
(2위)
'''72'''
(3위)
1.32
1991
27
115
8
6
1
0
0.571
3.83
111
10
46
55
52
49
1.32
1992
15
66⅔
2
5
0
0
0.286
5.54
66
11
20
41
48
41
1.2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삼성
16
40
4
1
3
0
0.800
3.38
37
4
19
21
16
15
1.38
<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color=#373a3c> 204
<color=#373a3c> 1124⅔
<color=#373a3c> 80
<color=#373a3c> 51
<color=#373a3c> 24
<color=#373a3c> 0
<color=#373a3c> 0.611
<color=#373a3c> 3.25
<color=#373a3c> 978
<color=#373a3c> 104
<color=#373a3c> 373
<color=#373a3c> 595
<color=#373a3c> 456
<color=#373a3c> 406
<color=#373a3c> 1.1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6년
'''12완투'''
(공동 4위)
3완봉
1987년
'''14완투'''
(3위)
'''3완봉'''
(공동 3위)
1988년
'''10완투'''
(2위)
'''4완봉'''
(1위)
1989년
8완투
'''3완봉'''
(공동 5위)
1990년
2완투
0완봉
1991년
1완투
0완봉
<color=#373a3c> '''KBO 통산'''
<color=#373a3c> 47완투
<color=#373a3c> 13완봉
[1] 청주시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영동군 태생이다. 고등학교를 청주에서 보냈다.[2] 체육교육학과 (1982학번)[3]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4] 이들 중 가장 롱런한 이강철이 1998년을 마지막으로 저물면서 언더핸드 선발 계보는 10년 이상 끊어졌다가 2013년 우규민이 선발전환하고 2015년 박종훈이 선발로 1군무대 레귤러가 되면서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우규민은 겨우 5년, 그나마도 마지막은 2년은 허리부상으로 바닥을 치다 도로 불펜전환하여 2010년대에 풀타임 선발로 살아남은 언더핸드는 박종훈 한명 뿐 이다.[5] 다만 한희민은 언더핸드였던 탓에 홈런을 자주 맞았고, 이 때문에 아무래도 마운드의 중심추는 한희민보다는 이상군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6] 이를 두고 한희민이 1988년 선수회 창립 시도때 초대 총무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구단측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7] 당시 삼성과 쥔궈는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쥔궈 팀 사장이 한희민을 트레이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8] 다만 삼성을 빼고는 대만 리그가 KBO와의 선수 협정을 맺지 않아 다른 팀과는 트레이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1994년 겨울에 OB 베어스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였던 장호연을 무상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욕을 많이 먹었다.[9] 순수 신인 단일 시즌 특정 팀 최다 완봉승 기록은 1986년 한희민(VS 청보전) 외에도 1992년 빙그레 정민철(VS 쌍방울전)이 기록한 3 완봉승이 최다 기록이다.[10] 이날 한화는 18:1로 완전히 무너졌다... [11] 당시 피홈런 2위가 이상군이었는데, 이상군은 한희민보다 홈런 1개 덜 맞고 이닝은 68이닝이나 더 먹었다(...)[12] 1993년에 소속 팀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했지만 한희민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다.[13] 당시 롯데는 염종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