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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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다시는 제가 공을 못 던져도 좋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지금 나가게 해주십시오.'''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image]'''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가 필요하다고 불러주시면 등판할 것입니다. 1992년 당시 그때 그렇게 던진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저는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던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때 너무 행복했습니다.'''
스포츠 2.0과의 인터뷰 中
전성기 시절 주 무기는 슬라이더로, '''염슬라'''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크게 휘는데다 빠르기까지 한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투수였다. 다만 데뷔 시즌부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 후유증으로 기량이 하락했기 때문에[2] , 1993년 이후의 성적은 이전보다 못했다.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후배인 주형광, 이정민과 더불어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 선수, 그리고 코칭스태프 생활까지 모두 고향인 부산에서, 연고 구단 롯데에서만 해낸 전형적인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2. 선수 시절
통산 성적은 93승 133패 3홀드 14세이브 평균자책점 3.76, WHIP 1.28. 17년 동안 1791⅓이닝을 던지며 통산 13위에 랭크되어있다. 기타 기록은 다승 24위와 완투승 20위, 그리고 '''패전 3위.'''(...)[3]
원래는 핸드볼 선수였다. 초등학교때 국가대표로 일본에도 갔다올 정도로 핸드볼도 잘 했는데 6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1992년 롯데에 입단해 17승 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 WHIP 1.01의 엄청난 기록을 세웠고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다. 원래는 지명 후 경성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진학 한 달 전, 경대 앞에서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입원비 마련을 위해 계약금 1천 5백만원, 연봉 1천만원의, 터무니없는 헐값에 울며 겨자먹기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데뷔 첫 해에 17승[4] 을 올리는 대활약을 펼쳤는데,[5] 또한 방어율 1위를 차지해 신인으로서 2관왕을 차지했다. 1985년부터 7년 동안 방어율 부문을 독식했던 당대 최강 선동렬의 아성을 넘어선 것이다.[6]
이러한 활약으로 신인왕과[7] 투수 부문 KBO 골든글러브[8] 를 받는다. 당시 부산에서 그는 인기 스타였고 그로 인해서 롯데 팬들은 당시 같이 데뷔한 서태지를 갖다붙여서 염태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당시 부산고였던 진갑용 선수의 증언
그러나 데뷔 첫 해부터 204 2/3이닝을 던진데다가 준 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의 혹사 등이 더해져 그의 팔꿈치와 어깨는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만다.[9] 1992년 데뷔 시즌에 대한 김형준 기자의 글 강병철 감독은 1992년 시즌 종료 후 염종석의 재활을 주장했으나 롯데 구단은 2연패 욕심에 출전을 강요했고, 1993년 시즌 종료 후 방위 복무를 하게 되면서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다.
포스트 시즌까지 포함하면 무려 235와 1/3이닝을 투구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 몸을 바쳤다. 특히 포스트시즌 동안 30과 2/3이닝을 투구해 4승 무패 1세이브 1.47의 평균자책점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의 1등 공신이었으며, 그 해 기록한 2완봉승은 1986년 김건우(당시 MBC)가 기록한 순수 신인왕 최다완봉 기록과 타이다[10] . 참고로 4승은 1984년 최동원과 함께 포스트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이며 2019년인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봉 재계약시 처음 롯데의 제시액은 고작 1,400만원 인상이었다. 동계훈련이 한창이 2월이 넘어가는 지리한 협상 끝에 결국 2천만원 인상에 보너스를 얹어줘서 마무리짓긴 했지만, 늦어진 연봉 계약 때문에 동계 훈련을 충실히 소화하지 못했고 2년차인 1993년 그 후유증으로 혹독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다. 전반기동안 고작 3승 7패의 성적을 내는 데 그친 것이다.
후반기 들어서야 페이스를 회복하고 승수를 쌓기 시작, 7승을 보태 간신히 10승을 달성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것이 염종석이 마지막으로 거둔 두 자리 승수가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4년부터 방위 복무를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계속 출전을 강요당했고, 제대로 된 동계훈련도 소화하지 못한 채 줄창 등판하다가 결국 팔꿈치 부상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 다음해인 1995년 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에 팔꿈치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 시즌 종료 후 팔꿈치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선수 보호와 관리는 그야말로 개나 주던 시절이었던 1990년대 프로야구니만큼 롯데 구단은 이미 팔꿈치 수술을 확정한 방위 복무 중인 선수에게 계속해서 출전을 종용했고, 염종석은 홈경기 3연전에서 늘 한 경기의 선발을 맡아 팀에 공헌했다. 그 시즌부터 방위복무 대상자는 홈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염종석은 타 선발투수들보다 훨씬 긴 휴식을 보장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팔꿈치 부상을 낫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엔 공을 한구씩 던지고 난 후 연신 오른팔의 팔꿈치를 털어내는 듯한 동작을 보여줬는데, 당시 중계를 하던 중계진도 이 장면을 놓고 '염종석의 팔꿈치 부상이 심각해 공을 던질 때 마다 팔꿈치를 털어내고 있으며, 시즌 종료 후 수술이 확정되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을 정도. 이런 심각한 부상을 안고 홈경기에만 등판했음에도 무려 규정이닝을 초과한 127이닝을 던지며 7승 7패에 평균자책점 2.98이라는 매우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포스트시즌에서도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는 등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참고로 저게 18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거둔 성적인데 평균 소화 이닝이 무려 7이닝을 넘어간다. 팔꿈치가 이미 망가진 선수를 저렇게 썼다는 것은 롯데가 얼마나 몰상식하게 에이스를 혹사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런 롯데의 막장 운영 때문에 1980년대 말부터 롯데 자이언츠를 대표하던 박동희,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은 단 한번도 전성기가 겹치지 않고, 매년 혼자서 혹사당하고 무너지는 비극을 반복했다.[11][12][13]
1993년에 10승을 거둔 이후로는 다시는 10승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그는 Only 롯데에서만 17년을 뛰었는데 (2002 시즌후 FA자격을 얻어 4년 14억+2년 등 4년 총액 16억에 재계약했으나 이후엔 부상으로 2008시즌 후에 FA 재자격을 취득했지만 방출당했다.) 확실히 그 후론 혹사의 여파로 10승 이상을 거둔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수술과 재활로 자리를 비운 1996년과 2000년을 제외하고 매 시즌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솔리드한 선발 투수로 활약해 주었다. 애초에 통산 QS가 130회 이상이다. 하필이면 92~93년을 제외하고 가장 잘 던졌던 해가 팀 역사상 최악의 시즌이었던 2002년이라서 8승밖에 못 쌓았다. '''데뷔 시즌에 망가진 선수''' 치곤 통산 평균자책점이 3점대라는 점에서 그가 혹사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기록이다. 8888577 시절에는 무너진 마운드 속에서 팀 내 최다승을 기록하기도. 2008년에는 주로 중간계투로 투입되어 1패 3홀드 평균자책점 3.65의 성적을 거뒀고, 포스트시즌 경험이 세 차례(92, 95, 99)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준플레이오프부터 롯데는 3연패 안습)
이후 2002 시즌 후에 FA계약을 채결했다. 금액은 4년 16억. 참고로 이 시기에는 투수 FA가 염종석을 빼면 아무도 없었다.
2008년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했다.[14] 이 때 타 구단의 영입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영구결번해 달라는 일부 롯빠들의 요청과, 다시 그것을 반대하는 다른 롯빠들이나 롯까들의 논쟁이 있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 기준으로 투수 중에서 영구결번된 사람이 선동열, 박철순, 김용수, 송진우 등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은 사람 정도고, 롯데 내에서만 봐도 최동원이나 윤학길을 오히려 영구결번으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롯데는 아직 멀었다(...)라는 의견도 존재했다.[15]
이 때문인지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려면 안경낀 우완투수가 있어야 한다는 썰이 돈다.
3. 지도자 시절
2009년 4월 5일 사직 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연수 중에는 "야구야큐"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최동원이나 윤학길이 없는 지금, 롯데에 돌아오면 투수코치가 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오랜 재활 경험을 인정받아 2010년에는 2군 재활코치로 재직했으며, 양승호 감독 부임 이후 2군 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그냥 롯무원이라며 평가가 굉장히 나쁘다. 오죽했겠으면 '''저렴종석(低廉終石)'''이라는 별명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니 과언이 아니다.
2015년 뜬금없이 주형광을 2군으로 밀어내고 새 1군 투수코치가 된다. 여러모로 보여 준 게 없다 보니 롯데 팬들은 걱정하고 있다. 일단 시범경기에서 롯데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이 시작되고 마구잡이식 불펜 운용 등으로 인해 일명 롯데시네마를 개관하여 타 팀 팬들에게는 역전승의 즐거움을 안겨줬으며, 당연히 롯데 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후 kt와의 트레이드로 자신의 뒤를 이을 차세대 에이스 박세웅을 키우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 프로젝트란...
'''1. 세웅아, 밤마다 치킨 한 마리에다가 콜라 한 병 먹고 자거라.'''[16]
'''2. 세웅아, 2군 내려가서 조정 좀 하고 오너라.'''
'''3. 닥치고 살찌워라. 지금 니 구속이 너무 낮다.'''
그럼에도 팬들에게 나쁘게 보였는지 , 결국 2015 전반기를 마치고 주형광을 1군으로 다시 올리기로 하면서 3군으로 내려갔다......
한 마디로 코치로는 '훌륭한 선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는 무능한 코치이다.
상동 2군코치 시절 썰로는 염종석이 투수들 지도는 안 하고 여자 얼빠 팬들과 덕아웃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히히덕거리면서 놀았다는 후문이 상당수에 이르고 투수코치로서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게 이미 2014년 퓨처스리그 성적과 2015년 전반기 투수파트 성적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상동 2군에 있을 때 콜업될 만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투수들은 점점 노쇠화되어 가는데 올라올 선수들은 없고, 이러니 팀이 제대로 돌아갈 일이 있나... 암튼 정민태급의 무능함을 자랑한다.
팬들은 이름값으로 코치하는 이 사람을 제 2의 백골퍼놈, 박현승과 같이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까고 있다. 그가 투수코치가 된 이후부터 위엄 넘치는 업적을 정리한 글. 그 위엄넘치는 업적 요약하자면, 염종석이 2군 투수코치를 맡고 난 다음부터 롯데 출신 투수 중 1군에서 30이닝을 던져 본 투수는 없다는(...) 엄청난 이야기. 이 정도면 코치로서는 거의 빵점 수준이다. 그냥 없어졌으면 하는 코치 중 한명이다.
이종운이 물러나고 조원우가 새 감독이 된 후 10월 12일에 있었던 일부 코치진 개편 때에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으나, 10월 15일에 코치직에서 사퇴하였다. 사실 시즌 후 구단에 사직서를 냈으나, 구단에서 계속 만류하여 사표 수리가 늦어졌다고 한다. 이후 공석이 된 육성군 투수코치 자리에는 진필중이 선임되었다.
결과적으로 박세웅은 이 때 1일 1치킨을 먹인 보람이 있는 것인지 근육이 붙는 데에 성공하고 잘 컸다. 2017 안경 쓴 우완 토종 에이스로 비상하는 데에 성공.
4. 해설자 시절
4.1. 2016년
2016년 2월 22일 SPOTV의 KBO 전지훈련 연습경기 중계방송에서 해설위원으로 데뷔했다. 2016 정규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SPOTV의 해설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연습경기부터 바톨로 콜론의 소속 팀을 콜로라도 로키스라고 잘못 말하질 않나, 이런저런 잘못된 정보 전달로 인해 다수의 팬들에게 신나게 까이고 있다.
해설 경력 초반이라 아주 조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빠르게 발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냥 자격미달 해설이라는 평가가 다수. 민훈기와 더불어 스포티비의 원투펀치를 이루고 있으며 이용철-송진우가 버티는 KBS 해설진의 아성에 안 좋은 의미로 도전하고 있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정규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롯데 중심의 편파해설과 롯데 이외에는 아는 게 없는 티를 내면서 많은 야구팬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있다. 특히 SK 와이번스에 악감정이 있는지 4월 5일 SK와 롯데의 사직 경기에서는 롯데 얘기만 내내 했으며,[17] 4월 8일 SK와 LG의 경기에서는 '''리그를 대표하는 똥차'''인 내야수 김성현을 자꾸 발이 빠른 선수로 소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참고로 김성현은 입단한지 8시즌 동안 통산 도루가 16개다. 그리고 자꾸 인터뷰 때 선수의 안 좋았던 면을 부각시키는 질문을 해서 청문회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4월 15일 수원 kt전에서 만루홈런을 친 최정에게는 타율이 낮다, 이름값 못한다며 깠으며, 이틀 뒤인 4월 17일 결승 만루홈런을 친 정의윤에게도 타율이 낮다면서 또 깠다. 게다가 'SK 있을 때와 LG 있을 때 마음이 어떻게 다르냐'는 그야말로 한참 이슈가 지난 뒷북성[18] 이자 정의윤 본인에게는 곤란한 질문을 하였다. 다행히 정의윤이 질문과 관련이 적은 쪽으로 돌려서 답변[19] 을 하여 넘어가긴 했지만 그야말로 인터뷰에 대한 기본 자세가 전혀 되어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고 또한 내야플라이를 잡는 고메즈에게 공만 쳐다보고 있다고 깠고 , 만루홈런이 터지자 음소거를 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듣다 못한 SK 팬들이 SPOTV 시청자게시판과 페이스북 페이지에 거세게 항의하였다. 결국 SPOTV에서는 일단 구두경고 조치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항의가 계속 들어올 경우에는 해설자 교체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4월 23일에는 캐스터가 야구선수 재활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소리를 했다. 물론 염종석 자신이 오랫동안 재활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은 이해가 가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전부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으며, 이후 경기가 끝나고 수훈선수 인터뷰에서는 서동욱에게 "KIA로 트레이드를 스스로 요청했느냐?"라는 민감한 질문을 해서 또 빈축을 샀다. 본인이 "민감한 부분"이라며 수습하기는 했지만 해설자라는 직분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야구장에서 코치-선수로 만나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4월 29일 두산 vs KIA 경기에서 이범호의 타구가 명백한 홈런임에도 2루타라고 말하면서 SPOTV와 함께 까였으며, 이번엔 두산 베어스를 싫어하는 티를 너무 내면서 두산 팬들마저 분노하게 만들었다.
5월 12일 넥센 vs 두산 경기에서는 새로운 분석이 나왔는데, 편파해설이 아닌 경험부족이라고.. 해설자로서 말은 해야 하지만 무엇을 말할지 잘 몰라서 롯데 위주의 해설을 하게 되는데, 넥센에 관해서도 아는 사실이 나오면 하나라도 더 말하는 모습이 잡힌다는 것. 거기에 넥센팬들은 상당히 만족한 듯. 넥센 팬이 본 염종석과 이용철의 차이
5월 27일 롯데 vs 한화 경기에서는 당일 교통사고를 당해 출전이 불가능한 정우람 선수를 계속 출전 가능하다고 말해 사고난 것도 모르고 출전가능 선수 엔트리도 안 보냐며 한화 팬들에게 욕을 디지게 얻어먹었다. 또한 당시 7회부터 나와서 연투 중이던 권혁에 대해 말하며 8회에 "40여개 정도로 9회까지(3이닝을) 던지면 딱 좋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근데 더 큰 문제는 정말로 그렇게 됐다.'''[20]
대체적으로 해설 내용을 들어보면 데이터는 딱 투승타타 수준이며, 본인이 혹사로 선수생활을 망쳤음에도 혹사에 무감각하다. 투수와 포수에 관해서는 나름 식견이 있지만 나머지 분야에선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설 내용의 80%가 투수의 투구동작, 포수의 투수리드등에 치우쳐 있으며 나머지 20%는 경기 전에 만나봤다는 각 팀 감독, 코치, 선수들 이야기로 누구나 알 수 있는 뻔한 내용이다.
6월 10일, 두산 vs 롯데 경기에서는 롯데 선수들이 두산 선수들보다 한수 위라는 편파발언을 했다. 이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했는지 시리즈 내내 두산 선수의 좋은 플레이에 "~선수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식의 해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롯데 중심의 편파해설은 그대로이다.
안 좋은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 그나마 전반기에 비해서 9월 현재는 많이 공부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는 있지만, 여전히 다른 해설에 비해 편파적인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 그놈의 부산 사투리가 문제.[21] 방송에 나오는 해설가라면 당연히 표준어를 써야하고 표준어를 부득이하게 쓰지 못한다면 최대한 사투리를 자제해야 한다. 그게 시청자에 대한 예의다. 표준어가 왜 '''표준'''어인지 생각해보자. 본인이 부산사람이라고 방송에서 시청자가 거북할 만큼 부산사투리를 쓰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미국 사람 혹은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면 방송에서 영어로 해설할건가?[22][23]
2016년 10월 2일에 방송된 KBS 2TV 다큐멘터리 3일 고척 스카이돔편에서 중계 대기 중 인터뷰를 하며 모처럼 공중파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6년을 끝으로 SPOTV에서는 하차했다.
4.1.1. 이후
2017년에는 LA에서 대학 코치를 맡고 있는 동료 코치의 주선으로 미국에 6개월동안 가 있으면서 美 서부~중부에서 MLB, 트리플A, 더블A 경기들을 관람하며 지냈다고 한다.
2018년 이후에는 KNN 생방송 투데이의 월요일 코너 '야구 좀 하는 남자' 꼭지에 패널로 출연해 롯데 자이언츠의 주간 동정을 전했고, 역시 KNN의 건강정보 프로그램인 '공개클리닉 웰'에 고정패널로도 출연했다.
이외에도 평일에는 중고생들, 주말에는 아는 지인들의 후배 선수들을 모아서 재능기부 형식으로 야구를 가르쳤다고 한다.[24]
4.2. 2020년
그러다 2020년부터 뜬금없이 '''NC 다이노스 경기를 편파중계하는''' MBC경남 라디오 해설을 맡게 되었다. 염종석은 NC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는 부산 출신의 롯데 레전드였던 데다가 SPOTV 해설자 당시의 평도 좋지 않았기에 해설 선임 소식을 들은 대다수 NC 팬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선임 후 첫 해설인 NC 자체 청백전 중계방송에서 예상보다 무난하고 차분한 해설을 선보임으로써 팬들의 우려를 가라앉혔고, 일부 팬들은 기존의 인기 편파해설인 KNN 이광길 해설위원과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며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다.[25] 다만 이 청백전에서는 NC의 장내아나운서로 잔뼈가 굵은 이규래가 캐스터를 하며 염종석의 NC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상당수 커버해줬던 점도 있었기에 앞으로 정규리그 해설에서 이를 어떻게 보완할지가 관건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한편, KNN 러브FM에서 NC 편파중계를 하던 이광길이 이성득의 뒤를 이어 KNN 파워FM 롯데 편파중계로 가게 되자 '''NC 코치 출신이 롯데 편파해설을, 롯데 에이스 출신이 NC 편파해설을''' 맡게 되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팬들 사이에선 "NC 홈경기에서만이라도 둘을 트레이드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다.[26]
NC가 2020 시즌 최장기간 1위 자리를 유지하면서 행복해설을 했고, NC의 창단 첫 통합 우승 역시 현장에서 중계했다.# NC의 홈 전 경기 중계를 하면서 차분하고 해박한 해설로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아무래도 투수 레전드다 보니 마운드에서 투수들의 심리에 대해 빠삭한 면이 강점이었다.[27]
2020년 5월 25일 동의과학대학교 야구부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시즌 종료 후 마이크를 놓았다.
5. 기타
- 스티븐 블래스 증후군이 있었다고 한다. 스트라이크는 잘 던지는데 번트 수비시에 머리가 백지가 되면서 1루에 던지는 걸 잘 하지 못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계기가 좀 안타까운데, 고교 시절 뛰었던 경기에서 1루에 견제하다 공이 관중석에 들어갔고, 이것은 그 날 경기의 패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2학년이었던 염종석은 그 날 시합이 끝나고 선배들에게... 기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확실히 번트 수비나 투수 앞으로 오는 타구처리에 약점이 있었고, 이는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중계진에게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을 정도.
- 롯데를 떠난 지 적지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박세웅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다. 2020년 8월 오랜만에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세웅의 분발을 촉구했다.
- NC가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은 날인 2020년 10월 24일 경기 중계를 앞두고, 20년 넘게 프로 팀에 있었지만 단 한번도 페넌트레이스 우승 현장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본인 소속 팀은 물론이고 상대팀이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
6. 연도별 기록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입상 성적.
7. 관련 문서
[1] 옛 초량중학교[2] 이미 아마추어 시절부터 혹사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게다가 엄청난 구타까지 말이다.[3] KBO 역사상 100패 이상 기록한 선수 + 통산 패배 10위 이내에 드는 투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100승 달성에 실패했다.[4] 15선발승으로 OB 장호연과 선발승 공동 3위이며 롯데 윤학길과 해태 이강철이 17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 공동 1위를 기록[5] 역대 신인 다승 1위는 박정현(19승)이지만, 이는 데뷔 후 2년째에 기록한 것이다. 박정현은 입단 첫해인 1988년에 적은 경기에 출장해서 1989년에도 신인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다.[6] 1992 시즌에서 선동렬은 초반에 부상을 당해 사실상 전 시즌을 결장했다.[7] 2024-11-11 13:06:03까지 유일하게 롯데 자이언츠에서 배출된 신인왕이다.[8] 기록 상으로만 보면 다승왕(19승)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한 송진우가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다승 경쟁자 이강철(18승)에 앞서려고 시즌 마지막 2연전(심지어 상대는 경쟁자인 이강철이 있던 해태)의 첫 번째 경기에서 5회 한희민을 무리하게 조기 교체하는 수법으로 송진우가 다승왕을 확정짓는 19승째를 올렸고,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염종석이 신인으로 팀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점까지 더해지면서, 골든글러브 기자단 투표는 송진우가 아닌 염종석의 손을 들어준다.[9] 이에 대해서 염종석 본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하던 핸드볼 선수 시절부터 어깨 통증이 있었다고 한다.[10] 같은 해 7월 2일 잠실 OB전에서 완봉승을 기록하여 단일시즌 고졸 순수 신인 최초 2완봉승 도달 투수가 됐으나 같은 해 데뷔한 빙그레 정민철 탓인지(3완봉승) 그 해 고졸 순수 신인 최다완봉 2위 기록에 머물렀으며 1996년 OB 박명환이 3완봉승을 기록하여 단일시즌 고졸 순수 신인 최다 완봉승 기록 타이를 이뤘는데 그 이후 순수 신인 2완봉 이상 투수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11] 이 와중에 혼자서 묵묵하게 던지면서 팀의 붕괴를 막은 게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다. 이 당시 롯데의 비극은 윤학길/선수 경력 항목 참조.[12] 이는 염종석뿐만 아니라 주형광에게도 해당된다. 한창 때 막 혹사시킨 후유증으로 주형광은 선배인 염종석보다 더 빨리 은퇴했다.[13] 손민한과 조정훈을 여기에 롯데의 에이스 혹사 계보에 넣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은 엄밀히 따지면 혹사라 보긴 어렵다. 우선 손민한이 몰락한 시기는 2009년부터로 만 34살이었다. 주형광처럼 아마에서 이미 많이 던졌던 선수를 무리하게 몰아세운 케이스도 아니고 입단 후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기를 부여받았으며, 2004년 양상문 감독 시절 마무리 잠깐 한걸 제외하면 거의 로테이션을 지켜준 선발이었다. 일반적인 노쇠화의 수순임에도 손민한이 2000년대들어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투수라는 점과 하락세가 2008년 후반기부터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 겹쳐 오해하는 케이스. 조정훈은 아시안게임 나가려고 본인이 감독과 입 맞추고 등판을 강행한 대가를 치른 거라 아예 논외.[14] 이 때까지 그의 통산 승수는 93승. 100승을 채우고 은퇴하게 해 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롯데에게 '''역시''' 그런 아량은 없었다... [15] 결국 롯데 최초의 영구결번은 최동원 선수가 되었다.[16] '''당연히''' 검사도 맡아야 한다. 안그러면 못 잔다.[17] 사실 염종석 본인의 정규시즌 첫 해설인데다 오랫동안 롯데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지켜보자는 의견이 많았다.[18] 정의윤은 2015년 올스타전이 끝나고 트레이드 되었다.[19] '요즘은 그냥 잘 되는 날이나 안 되는 날이나 야구를 즐기려고 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20] 바로 전날 2.1이닝을 던진 불펜투수가 하루도 안 쉬고 다음날 바로 나와서 3이닝을, 그러니까 2일 동안 총 5.1이닝을 던진 것이다.[21] 부산 사투리(동남 방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남 방언을 쓰는 사람 이외에는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들다.[22]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나운서처럼 표준어와 화법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인력이 아니라 '야구에 대한 지식과 현장의 상황'을 잘 아는 전문 인력으로서 '해설위원'의 역할을 한다는 변호가 가능하다. 즉, 표준어 구사여부는 해설위원의 채용조건이 아니다. 더군다나 염종석처럼 사투리 때문에 비판을 받는 해설위원이라면 '''허구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걸 감안해도 부산·경남 사람들은 표준어 구사에 소극적이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지역민방인 KNN 파워FM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성득도 부산 사투리가 심한 편이다. 오히려 부산MBC 라디오 최효석 해설위원의 표준어 중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부산지역 청취자들이 많다.[23] 미국인에 대한 예시는 심히 무리수지만 굳이 써야 할 상황이라면 통역을 붙이든가 자막을 쓴다.[24] 2019년 9월 16일 김선신 아나운서가 매주 월요일 유튜버로 하고 있는 선트리밍 LIVE 게스트로 정민철 해설위원이 출연해 염종석이 '영남지방에서 유소년 야구 코치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2020년 NC 자체 청백전 중계에서 본인이 말한 내용은 위와 같다.[25] 이광길 해설위원은 감정을 가감없이 표현하는 스타일이기에 편안한 해설을 원하던 일부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다.[26] 이는 부산MBC에서 해설을 맡은 박승호 위원도 마찬가지다.[27] 배재환 코멘트 소이현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