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방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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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조선 초기에 국내외의 다양한 한의학 관련 문헌을 집대성한 저술로, 국가 기관이 편찬한 동양 최대의 의학 서적이다. 세종대 초판본은 365권, 세조 ~ 성종 대의 산삭교정(刪削校正)본은 266권 264책이다. 세조 대의 산삭교정본 원본이 일본 궁내청에, 이를 필사한 중인본이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1433년 약재 서적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이후, 의학 전반에 걸친 서적을 편찬하고자 노력했지만, 당시 조선 내의 문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은 1437년부터 1439년까지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는 사신과 역관들에게 중국 내의 다양한 의학 문헌을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때 수집된 문헌들은 명초에 저술된 것뿐만 아니라 원ㆍ송ㆍ당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폭넓었다.
이렇가 수집한 문헌들을 1442년부터 약 3년간 취합하여 365권의 방대한 도서로 정리하였다. 취합 작업에는 문관과 의원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기존에 수집된 문헌들을 단순 분류하고 묶어 놓았을 뿐이라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그 내용도 이론ㆍ임상적으로 검증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것들도 많았다. 또한, 300책이 넘을 정도로 분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활자로 간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사실상 의방유취를 완성하고 간행하도록 한 사람은 세조였다. 세조는 즉위한 후 기존에 취합된 의학 서적을 재정리하고 내용을 다듬어 의방유취를 완전한 판본으로 만들어 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1465년부터 12년에 걸쳐 수정ㆍ교정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업의 총괄 책임자는 양성지로, 수많은 문관과 의원들이 동원되었다. 결국 1477년 266권으로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총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인 총론에서는 진찰론ㆍ처방법ㆍ의학의 일반 이론 등을 서술하고, 두 번째 부분에 임상적인 내용을 담았다. 임상 내용에서는 당시 한의학에서 규정하는 질병들을 총 95문으로 나누고, 그 상세를 기술하였다. 임상 내용 역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에는 황제내경소문[1] 에서부터 의경소학[2] 에 이르는 153종류의 서적에서 시대 순으로 인용하여 관련 학설과 이론을 싣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두 번째 부분에는 첫 번째 내용에 대응하는 처방을 취합하여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의방유취는 한의학사 연구가들에게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적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다. 다만, 양이 워낙 방대하고, 문체가 난해하다보니 각론적인 부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일단 세종의 명으로 1445년에 임시적으로 출간된 365권 의방유취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산삭교정(刪削校正), 이합정리(離合整理)하라 명하여 1477년에 최종 출간된 266권 의방유취는 복간본으로 완전히 전하는데, 이 복간본은 일본판이다. 세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의방유취를 총 30부 인쇄하여 조선 정부가 관리하는 여러 서고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도중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서고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들어갔고 나머지 분산 원간본은 모조리 소실된다. 이 원간본은 세조가 만든 활자인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여러 본이 복간되었다. 현재 이 원간본은 일본의 궁내성 도서관에 보관되는데 12권이 분실되고 총 254책만이 남았다.
시간이 흘러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궁내성에 비장된 을해자본 의방유취 원간본이 정작 고국인 우리 나라에서는 망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일본인 의사 기타무라가 한일 양국의 의학 교류를 기원하는 의미로 일본판 복간본 2질을 조선 정부에 기증하였다. 즉, 이 기증 이전에는 국내에서 의방유취를 구할 수도, 의방유취에 따라 의학을 연구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 2질 중 1질은 한국 전쟁 도중 북한이 조선 왕조 실록을 비롯한 고문서와 고도서를 노획하는 과정에서 함께 획득하였고, 나머지 한 질은 연세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현재의 의방유취 국문 번역본은 북한 의학 과학원 동의학 연구소에서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 이것을 1994년 여강 출판사가 영인본으로 출간[3] 한 바 있다.
의방유취에는 중국의 당, 송, 원과 명나라 초기의 저명한 의서 152편과 고려 의서 어의촬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중국에서는 유실된 명대 이전의 의학 고서가 30여편이나 원문 그대로 실려 있어 중국에서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료이다. 중국에는 1861년 일본의 활판본과 1982년 인민위생출판사 배인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향약집성방이나 동의보감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오히려 중국에서 예부터 그 가치를 알고 높이 인정하는 점이 흥미로워 일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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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조선 초기에 국내외의 다양한 한의학 관련 문헌을 집대성한 저술로, 국가 기관이 편찬한 동양 최대의 의학 서적이다. 세종대 초판본은 365권, 세조 ~ 성종 대의 산삭교정(刪削校正)본은 266권 264책이다. 세조 대의 산삭교정본 원본이 일본 궁내청에, 이를 필사한 중인본이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2. 편찬 과정
1433년 약재 서적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이후, 의학 전반에 걸친 서적을 편찬하고자 노력했지만, 당시 조선 내의 문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은 1437년부터 1439년까지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는 사신과 역관들에게 중국 내의 다양한 의학 문헌을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때 수집된 문헌들은 명초에 저술된 것뿐만 아니라 원ㆍ송ㆍ당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폭넓었다.
이렇가 수집한 문헌들을 1442년부터 약 3년간 취합하여 365권의 방대한 도서로 정리하였다. 취합 작업에는 문관과 의원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기존에 수집된 문헌들을 단순 분류하고 묶어 놓았을 뿐이라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그 내용도 이론ㆍ임상적으로 검증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것들도 많았다. 또한, 300책이 넘을 정도로 분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활자로 간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사실상 의방유취를 완성하고 간행하도록 한 사람은 세조였다. 세조는 즉위한 후 기존에 취합된 의학 서적을 재정리하고 내용을 다듬어 의방유취를 완전한 판본으로 만들어 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1465년부터 12년에 걸쳐 수정ㆍ교정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업의 총괄 책임자는 양성지로, 수많은 문관과 의원들이 동원되었다. 결국 1477년 266권으로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3. 내용
이 책은 총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인 총론에서는 진찰론ㆍ처방법ㆍ의학의 일반 이론 등을 서술하고, 두 번째 부분에 임상적인 내용을 담았다. 임상 내용에서는 당시 한의학에서 규정하는 질병들을 총 95문으로 나누고, 그 상세를 기술하였다. 임상 내용 역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에는 황제내경소문[1] 에서부터 의경소학[2] 에 이르는 153종류의 서적에서 시대 순으로 인용하여 관련 학설과 이론을 싣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두 번째 부분에는 첫 번째 내용에 대응하는 처방을 취합하여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의방유취는 한의학사 연구가들에게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적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다. 다만, 양이 워낙 방대하고, 문체가 난해하다보니 각론적인 부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4. 현존 판본 관련
일단 세종의 명으로 1445년에 임시적으로 출간된 365권 의방유취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산삭교정(刪削校正), 이합정리(離合整理)하라 명하여 1477년에 최종 출간된 266권 의방유취는 복간본으로 완전히 전하는데, 이 복간본은 일본판이다. 세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의방유취를 총 30부 인쇄하여 조선 정부가 관리하는 여러 서고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도중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서고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들어갔고 나머지 분산 원간본은 모조리 소실된다. 이 원간본은 세조가 만든 활자인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여러 본이 복간되었다. 현재 이 원간본은 일본의 궁내성 도서관에 보관되는데 12권이 분실되고 총 254책만이 남았다.
시간이 흘러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궁내성에 비장된 을해자본 의방유취 원간본이 정작 고국인 우리 나라에서는 망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일본인 의사 기타무라가 한일 양국의 의학 교류를 기원하는 의미로 일본판 복간본 2질을 조선 정부에 기증하였다. 즉, 이 기증 이전에는 국내에서 의방유취를 구할 수도, 의방유취에 따라 의학을 연구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 2질 중 1질은 한국 전쟁 도중 북한이 조선 왕조 실록을 비롯한 고문서와 고도서를 노획하는 과정에서 함께 획득하였고, 나머지 한 질은 연세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현재의 의방유취 국문 번역본은 북한 의학 과학원 동의학 연구소에서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 이것을 1994년 여강 출판사가 영인본으로 출간[3] 한 바 있다.
5. 중국에서의 평가
의방유취에는 중국의 당, 송, 원과 명나라 초기의 저명한 의서 152편과 고려 의서 어의촬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중국에서는 유실된 명대 이전의 의학 고서가 30여편이나 원문 그대로 실려 있어 중국에서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료이다. 중국에는 1861년 일본의 활판본과 1982년 인민위생출판사 배인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향약집성방이나 동의보감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오히려 중국에서 예부터 그 가치를 알고 높이 인정하는 점이 흥미로워 일부 가져왔다.
중국도 의학 서적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본이 중국 의서라고는 하나 방대한 양을 모으고 취합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니 그 가치는 더욱 높다 할 수 있다."본 서는 중의약학中医药学, 임상실용临床实用, 의사문헌医史文献, 판본 보존版本收藏 등 방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의방유취는 중국 명조 이전의 의학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이미 산실된 고대의 책들을 대량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을 수정 없이 원문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의방유취는 중의학과 한의학을 집대성한 거작으로 "의학 서적 중 으뜸이요, 방술의 대관医籍之冠、方术之大观"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