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내청

 


'''宮内庁(くないちょう'''
궁내청 | Imperial Household Agency

[image]
'''약칭'''
IHA
'''설립일'''
1949년 6월 1일
'''전신'''
궁내부
'''소재지'''
도쿄도 치요다구 치요다 1-1(고쿄 내)
(東京都千代田区千代田1番1号)
'''장관'''
야마모토 신이치로(山本信一郎)
'''차장'''
니시무라 야스히코(西村泰彦)
'''상급기관'''
내각부
'''내부부국
(内部部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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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관방(長官官房)
시종직(侍従職)
상황직(上皇職)
황사직(皇嗣職)
식부직(式部職)
서릉부(書陵部)
관리부(管理部)

'''직원 수'''
1,061명
'''공식 사이트'''
http://www.kunaicho.go.jp/
[image]
고쿄 내부에 위치한 궁내청 청사
1. 개요
2. 역사
3. 조직
4. 특징
5. 논란
5.1. 나루히토 덴노 일가와의 갈등
6. 현재 상황


1. 개요


일본 내각부 소속 국가 행정기관으로, 일본 황실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한다.

2. 역사


역사적으로 태정관[1]산하에 중무성이라고 불리는 일본 천황가를 보좌하는 기관이있었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정부기관으로 탄생한 때는 메이지 유신 이후이다. 이때 천황의 보좌 전담기관으로 궁내성(宮内省), 장관은 궁내대신(宮内大臣)이 출범하고,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후에는 황권이 강화됨에 따라 상당히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당시 궁내성은 정계는 물론이고 제실박물관(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 가쿠슈인 등의 문화/교육기관도 휘하로 두고, 직원 수만 무려 6천 명을 넘는[2] 거대조직이었다. 이 궁내성은 구한말의 궁중부서 궁내부(宮內府)에도 일부 영향을 끼쳤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이후, 일본국 헌법 개정에 따라 부서도 개편돼서 기존의 궁내성은 총리부(総理府) 산하의 궁내청(宮内庁)으로 격하되었다가, 2001년 중앙성청 개편으로 내각부 산하 기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의외로 일본 내각과의 마찰이 종종 발생하는 거 보면 겉으로는 내각에 흡수되었지만 실제로는 내부에서는 여전히 흡수되지 않고 자체 파벌인 시종 쪽 파벌[3]이 내각 쪽 파벌 및 신세대 시종들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견제하는 듯하다.

3. 조직


'''궁내청 장관(宮内庁長官)'''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정식으로 임명하고, 천황이 인증(認證)한다.[4] 휘하에 장관관방(長官官房), 3직(職)·2부(部)·2시설(施設) 등의 기관과 지방지분부국(地方支分部局) 1곳을 둔다.
  • 장관 내각관방
    • 비서과(秘書課)
    • 총무과(総務課)
    • 궁무과(宮務課)
    • 주계과(主計課)
    • 용도과(用度課)
    • 궁내청병원(宮内庁病院)[5]
  • 3직
    • 시종직(侍従職) : 일본 황실의 천황일가, 동궁의 황태자 일가, 내외 여러 황족 일가들을 보필하고 보좌, 시종하는 업무.
    • 동궁직(東宮職) : 황태자 또는 황사[6] 일가의 일상을 보좌 및 관리 업무.
    • 식부직(式部職) : 의식(儀式)과 공연 등을 주관하는 업무. 가가쿠 연주자들도 이곳 소속 공무원들이다.
  • 2부
    • 서릉부(書陵部) : 황실 관련 자료, 각종 고문서 등과 전 황족들의 묘지를 관리.
    • 관리부(管理部)
  • 2시설
    • 정창원사무소(正倉院事務所) : 정창원의 유물 관리.
    • 어료 목장(御料牧場) : 황실에 올릴 농산물을 생산하고 관리.
  • 지방지분부국
    • 교토사무소(京都事務所) : 긴키 지방의 일본 황가 관련 성지나 묘지 등을 관리.

4. 특징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1910-1945)를 거치면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이미지가 뇌리에 상당히 강하게 남는 바람에, 천황과 관련된 일을 총괄하는 궁내청이 상당히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부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궁내청은 어디까지나 정부청사가 아닌 궁중사무청인 데다, 사실 일본 역사상 천황이 실권을 쥔 시대는 고대(일본 역사의 시작~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거의 없고, 그나마 있다고 하면 딱 저 일본 제국주의 시절[7]밖에 없다. 현대의 천황은 사실상 궁내청에서 지정해주는 월급을 타서 생활하고, 영국 등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보장되는 군주의 각종 권리들마저 없는, 정말로 '''상징'''뿐인 존재가 되었다. 현재는 궁내청도 그냥 국가의 상징적인 인물을 관리하는 부서, 단지 그뿐이다.
게다가 궁내청은 일본 황실의 생활 전반을 모두 감독하는데, 이 때문에 황족들의 생활 자체는 그들 기준으로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궁내청 운영비만 연간 100억엔 단위[8]이니 황족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사실[9]이나, 이러한 지원을 받는 대신 황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궁내청에 의해 매우 철저하게 모두 감독된다. 결혼(ご婚姻)할 상대가 황실에 적합한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뿐만 아니라 국빈으로서 외국 방문 및 '''그러한 자리에서 입을 옷'''까지 전부 궁내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할 정도이다. 이렇듯 궁내청의 감독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며, 특히나 여성에 대해선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중세에 머무르는 궁내청 수준에 걸맞게, 남성에게 자행되는 것 이상의 온갖 참견질을 다 저지른다. 이를 궁내청 측은 여성들, 특히 며느리들을 괴롭히는 데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2016 브라질 하계 올림픽에 황태자 내외를 어거지로 보냈을 때[10] 황태자비 복장을 수 십년 전에 입었던 옷을 입혀서 보냈던 사건이다.[11]
그나마 공주(신분은 내친왕(內親王殿下))들은 평민 남성과 결혼하면 남편과 시가 식구들을 따라 평민으로 황적이 이탈되어, 황족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12] 물론 왕자들은 평민 여성과 결혼해도 황족 신분을 유지하는 데 이는 사실상 딸은 시집가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되는 것. 하지만 황실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편 일본 황실에 시집 온 여성들은 황실의 딸들과 달리 아주 크게 고생한다.[13] 때문에 황실 신붓감으로 물망에 오르는 여성은 어떻게든 도피[14]하려 하며, 그러지 못하면 미치코 상황후마사코 황후처럼 잡혀오게(…) 된다.[15]
도쿄고쿄(황거)를 비롯하여 교토 고쇼 및 이궁, 별장(어용저), 능묘 등 일본 각지에 상당한 황실재산이 있지만, 이는 명칭에서 느껴지는 어감과는 달리 덴노 일가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유재산이다. 일본국헌법 제88조에 "모든 황실재산은 국가에 속한다. 모든 황실의 비용은 예산에 계상하여 국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라고 못박아 두었다. 따라서 황실이 겉으로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나, 사실은 모든 것은 국가가 제공하는 것일 뿐 덴노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은 없다. 모든 황실의 재산과 비용은 내각총리대신이 포함된 '''황실 경제회의(皇室経済会議)'''라는 조직에서 모두 통제한다.[16]
이러한 역할을 하는 정부 부서가 세계적으로도 드문 관계로, 정식 영문명에도 'Japanese'가 붙지 않는다. 물론 군주제 국가에는 왕실의 사무(事務)를 책임지는 부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왕실 자체에서 운영하고 예산과 인사 모두 국가행정조직과는 분리된 형태이다. 물론 징세나 감사의 형태로 중앙 정부에서 관여하는 것과는 별도지만, 일본처럼 아예 중앙 정부 부서에 속하는 사례는 의외로 적다.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 이후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궁내청에서는 주기적으로 흥신소 등을 이용해서 부마 후보자들에 대한 뒷조사를 비밀리, 암암리에 체계적으로 실시하는데 그 대상은 상류층 자녀, 화족 출신 자녀, 신적강하된 구 황족 자녀[17] 등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에서의 조사를 실시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리스트는 주기적으로 갱신되기에 미혼의 여성 황족을 보유한 미야케의 궁주가 원하면 제공해주지만 원하지 않으면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하며 만일 해당 리스트에 없는 부마 후보자에 대한 뒷조사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궁주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한다.[18]

5. 논란


아무래도 일본에 아직도 남아 있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에 일본 국민들의 관심을 받아서, 다른 정부기관에 비해 일본 언론에는 자주 노출되는 편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일본에서도 궁내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수구꼴통들의 집합체''' 정도로 영 좋지 않은 모양.
당장 생전 퇴위와 관련해 벌어진 2016년 7월부터의 일련의 소동에 궁내청이 대대적인 여론조작을 통해 아키히토 당시 천황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본 언론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고 있으며, 아주 오래 전부터 황태자 내외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는 대놓고 적대시한다고 평가할 정도다. 이런 거에 대해 황태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할 정도로 사이가 상당히 안 좋은 편인 것임에 반해, 이상하게도 후미히토 가문에 대해서는 묘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을 넘어선 형태로 대하는 등[19][20] 궁내청 내부에서의 행동패턴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여담으로, 궁내청 산하의 서릉부와 정창원 관리부에는 한국 고대사 시기, 특히 삼국시대남북국시대의 고문서와 유물들이 많이 소장되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궁내청 측에서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한국 학자들에게마저 일부 자료 공개를 안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그것과 관련해서 한국 공영방송 측에서도 몇 번 취재 요청을 넣어봤지만 거절당했다는 듯. 일부에서 주장하는 일본 천황가 백제인설만큼은 아니어도, 고대사 시기 일본과 백제 사이는 굉장히 친밀했고 서로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설도 도는데, 그 문제에 관련해서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볼멘소리도 종종 나온다. 필사본 화랑세기 떡밥도 서릉부에 있는 원본 화랑세기를 필사해왔다는 주장에서 시작되었고, 정창원은 의혹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한국에 있었으면 국보 지정은 100%에, 하나 더 있으면 한국사 자체가 뒤집힐만한 중요 문화재가 다수 존재하는 것이 제한적인 정보 공개로나마 실제로 밝혀져 있다. 정창원 소장 문화재는 정창원 문서 참조.

5.1. 나루히토 덴노 일가와의 갈등


논란이 시작된 건,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가 2004년 5월 10일의 기자회견[21]에서 대놓고 '''지금까지의 마사코의 경력이나 그러한 것에 근거해 마사코의 인격을 부정하는듯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それまでの雅子のキャリアや、そのことに基づいた雅子の人格を否定するような動きがあったことも事実です)'''라고 말했을 시기였다.人格否定発言
마사코 황태자비는 공무와 관련해서는 궁내청 동궁직에서 통보받은 스케줄에 참석하고 지정해주는 의상을 입는 것만이 허용되었으며, 외부 행사 관련 의견 개진이 불가능했다. 궁내청은 이것을 이용하여, 과거 여러 차례 마사코 황태자비를 엿먹인 전적이 있다. 예전에 마사코 황태자비가 공무를 취소하고 스키장에 갔다는 이유로 욕을 먹은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 최근에도 이와 관련하여 궁내청에서 크게 사고를 친 사건이 있는데, 2016 리우 올림픽 개막식 불참 미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개막식을 앞두고, 브라질 정부가 서한을 통해 나루히토 황태자 부처를 직접 지명하여 개막식에 초청했다. 공문으로 별도로 일본 정부 측에 방문 요청도 했으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참석하는 것이 맞는 상황이고, 실제로 일본 정부도 브라질 정부의 요청을 승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서한을 본 궁내청이 특별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나루히토 부부의 브라질행을 막고, 그 자리에 대신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내외를 보내려 했던 거다.
하지만 궁내청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상급 기관인 일본 정부가 '''"이게 무슨 실례되는 행동이냐?!"'''라는 말로 펄펄 뛰며 궁내청의 움직임을 틀어막았고, 예정대로 나루히토 부부가 함께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때 마사코 황태자비가 입은 옷은, 무려 '''20여년 전 결혼 초에 입던 옷'''이었다. 자기네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마치 엿먹으라는 듯 궁내청이 지시한 사항이라고. (...)
이러한 궁내청의 결정은, 일본 국내에서의 파장은 둘째치고 '''외교적으로 대단히 결례다.''' 하지만 궁내청 놈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자기네가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일본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며, 그 결과 일본 고위 관료층 사이에서 "일국의 황태자비가 외국을 방문한다는데 입을 옷도 사주지 않아 20년 묵은 옷을 입혀야 할 정도면, 궁내청에 거액의 예산을 굳이 줄 필요가 있는가?!"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극우의 선봉에 서 있는 아베 신조 총리도 "궁내청이 조금이라도 사고를 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벼르는 중이라고.'''[22] 그럼에도 궁내청은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인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도 궁내청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준 적이 있다. 아이코 공주가 어린 시절 간염에 걸렸을 때, 궁내청 병원이 아닌 도쿄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이 일로 궁내청은 황태자 내외에게 "왜 궁내청 병원을 놔 두고 도쿄대 병원을 찾냐"고 격노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깽판을 놓았다. 그런데 정작 아키히토 덴노가 비슷한 시기에 궁내청 병원이 아닌 도쿄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궁내청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23]
아이코 공주가 성장한 후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어졌다. 2016년 9월 26일부터 약 4주 동안,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3학년인 아이코 공주는 무단장기결석을 했다. 그런데 궁내청은 이것에 대한 설명을 일절 하지 않고 그냥 "결석 중"이라고만 밝혀, 아이코 공주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반쪽이 되어 나타난 아이코 공주의 결석 이유가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 때문이라는 게 알려졌고, 그제야 일본인들이 비난의 화살을 아이코 공주가 아닌 궁내청으로 돌리게 되었다.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 발표 이후 천황 계승 문제에 대해서도 충돌이 있다. 아키히토 덴노는 "생전에 퇴위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2019년 4월 30일에 퇴위하고, 2019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천황직을 승계하려고 한다"는 것. 이에 대해서 2017년 1월 17일 궁내청 차장이 대놓고 반대 의사를 표출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하지만 궁내청이 아무리 징징거려도 일본 정부는 천황을 결코 거스를 수 없기에[24] 당시 헌법 개정 등을 논의하던 와중에 이번 대에는 예외라는 특별 법안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국회를 통과시켜서 사건을 마무리지은 바 있다. 거기에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궁내청의 추태와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후미히토 일가와 함께 세트로 까이고 있어서 2019년 5월에 즉위한 나루히토 덴노에 의한 궁내청 개혁이라는 이름의 숙청이 진행될 개연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애시당초 궁내청은 나루히토 덴노 집안에 대해서 유독 사사건건 시비나 방해를 하는 집단이였고 그게 너무 지나쳐서 상술했듯이 아베 총리조차도 '''"궁내청이 조금이라도 뻘짓 했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나도 모른다!"''' 라며 불만을 표출하게 만든 사건까지 일으킨 적이 있으니 이러한 조치를 당해도 도와줄 집단은 사실상 넷 우익 집단뿐일 것으로 보인다.

6. 현재 상황


2018년 말 이후에는 후미히토 편을 적극적으로 들진 않는다. 일단은 나루히토의 승계가 눈 앞에 닥친 상황에서 그동안 나루히토와의 충돌을 감안하면 분명 등극 이후에는 천황의 권한으로 시행될 숙청의 칼날을 최대한 덜 맞고 싶었을 테고, 무엇보다 궁내청 관계자가 2018년 12월 후미히토가 생일 때 한 쓸데없는 발언으로 궁내청과 일본 정부를 뒤집은 이후 후미히토 일가를 돌려서 깔 정도[25]로 그 집안이 궁내청의 힘으로도 온전히 수습을 못할 만큼 논란거리를 만든 것도 모자라,[26] 지금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마코 공주아버지보다 한 술 더 떠서,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건 물론이고 2019년 1월 22일에 '''천황 부부[27]후미히토 내외가 니가타 공무로 부재 중일 때 코무로 케이의 A4 용지 1장 분량의 문서 를 변호사를 통해 공개하는''' 대형사고를 쳐[28] 완전히 폭주했다. 이때 궁내청은 새벽부터 완전히 패닉에 빠져 요양 중인 천황 내외와 공무 중인 후미히토 내외에게 바로 보고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코 공주가 공무만큼은 여전히 열심히 하는 거라고.
아키시노노미야 궁저의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아키시노노미야 가문 시종들은 이전에도 키코 비 때문에 고생이었지만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동궁 시종들은 대우가 좋아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정에 의하여 시종을 그만두어 주간지가 나루히토 일가를 공격할 목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면 이들 시종들은 대놓고 나루히토 일가에 대한 온갖 칭찬을 늘여놓았을 정도라고 하는데, 이를 보아 황태자 쪽에서 척만 친 건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 세력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2019년 초 황실도 일본 사회의 시대 변화에 맞춰 나아가야 한다는 나루히토 황태자의 신 천황으로서의 각오가 포함된 발언에서 나루히토의 즉위 이후 궁내청 인사를 대대적으로 숙청할 것을 암시했다. 하지만 즉위하고 나서 아직 얼마 되지 않았고, 2019년 하반기 거의 대부분을 즉위 관련 행사로 가득 찼기에 잠잠하지만, 그렇다고 나루히토 덴노가 손을 놓진 않았는지 새 시종장이 황후의 외교관 시절 직속상관이 유력하다는 정보가 나오는 등 슬슬 물갈이를 할 생각인 모양.
여전히 황사 후미히토 집안과 함께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으로 여러 가지 논란들을 몰고 다니지만, 비밀리에 역대 여왕의 즉위 이후에 관한 궁내청 소장 자료들을 찾아서 여성 천황 등극[29] 이후 필요한 여러가지 정보들을 모으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 일단은 자신들이 살기 위하여 양쪽에 굽신거리는 것으로 보이나 현재 후미히토 내외의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등 무능을 보여주는 꼴이라서, 과연 이들이 나루히토 덴노의 숙청을 피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네들 스스로 나루히토 덴노에게 자기네들을 숙청을 해달라고 시위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2019년 황족 서열 1위에 해당되는 황사로 등극한 후미히토 일가는 대놓고 궁내청과 외무성을 무시해 지인을 이용해서 부탄을 방문해서 부탄왕실과의 교류를 하거나 공무라고는 겨우 2개 남짓이고 나머지는 전부 여행지 투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아야 했던 올 여름 카코 공주의 유럽 순방 모두 궁내청으로부터 공무 취급을 받았지만 정작 2019년 초 일본과 캐나다 수교 기념 행사에 초청되어 간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의 방문이나 나루히토 덴노 즉위 의식이 끝난 밤에 열린 연회에서 아웅산 수치의 부탁을 받아 12월 11일~17일까지 7일간 미얀마 방문 예정인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 모두 궁내청으로부터 공무가 아닌 사적 여행으로 취급받았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궁내청은 천황 및 황족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오로지 상황 부부 및 아키시노노미야 가문만을 위한 기관이냐.'는 등 여러 가지 불만이 많다.
거기에다가 2019년 12월 일본 내에서 열린 일본/헝가리 관련 행사에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가 참석해서 방일한 헝가리 총리와 환담을 나누었음에도 궁내청 공식 사이트 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 황족의 공개 공무 일정 항목에 없다는 사실과 일본 언론 어디도 보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지 몇몇 일본인들은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다면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2019년 12월 11일 마코, 카코 공주 자매가 겨울왕국 2 자선 행사에 공무로 참여했다. 일본인들은 같은 날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초빙을 받아서 미얀마로 출발한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는 일정 대부분이 공적 요소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궁내청에서 사적 여행으로 취급받는 반면, 마코 공주 자매가 영화관 VIP석에 앉아서 만화영화 감상만 하는데 무슨 공무냐면서 궁내청에 비난을 쏟아냈다.[30][31]
2020년 2월 5일 주간문춘 보도를 통해서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가 길거리에서 인터뷰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나갈 때까지 궁내청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일본인들의 분노가 잇따르고 있다.일부는 과거 궁내청이 히사히토에 대해서 언론들을 상대로 선을 넘으면 즉각 법적 조치를 한다는 발언,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이 유독 궁내청측의 공격을 받는 미야케라는 점[32] 등을 언급하면서 궁내청은 황족을 무시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항의하고 있다.

[1] 전근대 시기 일본의 공식중앙관청이 었으나 막부의 등장이후로는 막부의 명령에 반강제로 서명만 해주는 관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교육부의 직원 수가 1천 명을 못 넘는다. 정부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단일 기관이 이 정도로 비대해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무엇보다 궁내청은 복잡하고 중요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천황에 관련된 일'만' 처리하는 기관임을 생각해보자.[3] 이들 시종들은 과거 미치코 상황후 시집살이 항목에서도 보듯 근최근까지 구 황족, 구 화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이며 지금도 그러한 여파가 있어서 나이가 든 시종들은 대부분 구 황족 및 구 화족과의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들 시종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추천제에 가깝게 운영된다고 한다.[4] 보통 사무차관이나 경시총감급 고위 인사들을 궁내청 차관으로 보내서 경력을 쌓게한 다음 차장 임기 종료 후 차기 장관에 임명하는 게 관례. 참고로 장관은 특별직 국가 공무원이나 차장은 일반직 국가 공무원.[5] 본래 황실에서는 고쿄 내 산전(産殿)에서 출산하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당시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1960년 2월 23일 궁내청 병원에서 첫아이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았다. 그 이후부터 일본 황족들도 오래된 관습을 깨고 똑같이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단, 반드시 궁내청 병원에서만 출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히사히토 친왕은 아이쿠(愛育) 병원에서 태어났다.[6] 황실전범에는 황태제가 없기 때문에 황사라고 한다.[7] 메이지 유신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까지[8] 다만 궁내청 예산은 천황 내외와 황태자 내외의 생활비 등이 포함되어 있는 내정비, 외국 국빈에 대한 의전을 제공하고 전국에 산재한 황실 재산 유지 관리 등의 비용을 의미하는 궁정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족들의 품위유지비 및 생활비인 황족비가 포함된 비용이다. 2018년 기준으로 궁내청 총 예산은 연간 114억 6,581만 8천엔 가량[9] 현 천황인 나루히토 일가가 지급받는 내정비는 기본적으로 상황 내외와 같이 사용하기에 얼마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황의 차남이자 2019년에 '''황사(皇嗣)'''(황위를 이을 다음 후계자)가 된 후미히토 일가의 경우에는 2016년도 기준으로 6710만 엔을 받고 있었으며 미카사노미야 일가는 다카히토 생존 기점으로 7381만엔(사후 다카히토가 생전에 받던 3050만 엔이 삭감되어 4331만 엔.), 그 방계인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4331만 엔, 현 상황의 남동생 마사히토 내외가 4575만 엔을 받는다. 2019년 이후 후미히토가 황태자에 준하는 직위를 얻게 되어 이들 내정비를 지급받게 되었는데, 상황 내외 및 현 천황 일가에게 주고 남는 비용이 후미히토 일가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반 황족일 때 받았던 6710만 엔보다 더 쪼들릴 가능성도 농후한 편이지만 내정비 대신 황족비를 계속 받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참고로 2017년 일본 국세청(国稅庁) 조사 기준으로는 일본 사기업 근로자들 평균 연봉이 약 400만 엔이다.[10] 브라질 정부가 분명 황태자 내외를 지목했는 데 궁내청이 멋대로 후미히토 내외를 보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11] 이런 짓거리는 과거 미치코 상황후에게도 했던 적이 있는 데 그때는 시어머니인 고준황후를 비롯해 구 황족 출신자들과 구 화족 출신자들 중에서 궁내청에 있던 시종들이 합작해서 한 멍멍이짓거리였다는 게 차이점.[12] 패전 이전에는 지금보다 직계황족들을 비롯해서 방계황족들까지도 엄청 많았었고, 메이지 덴노의 딸들과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방계 황족에게 시집가서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7년 강제로 황족 신분이 강등되어 다이쇼 덴노직계를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은 졸지에 평민이 되었고, 남은 소수의 황족들은 황실 밖에서, 즉 평민 중에서 배우자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13] 여담으로 궁내청의 간섭만 유명한 게 아닌데, 미치코 상황후마사코 황후가 다른 황족들에게 당한 구박은, 루머가 일부 섞여 있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편이다.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등을 참고.[14] 다른 사람과 급히 결혼한다거나, 해외로 나가버린다거나.[15] 키코 비는 야심이 컸는지,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나 형님 마사코 황후와 달리, 스스로 원해서 황실에 시집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키코 비조차도 일본 황실의 스트레스와 시집살이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퍼져나오고 있다.[16] 해당 조직은 대략적인 예산 관리 조직이 아니라 황실 여성이 결혼하여 황족 신분을 이탈할 때 가지고 가는 지참금까지도 일일히 확인하고 융통성 없게 통제할 정도로 상당히 세밀한 부분까지도 파고든다고 한다. 물론 황실 여성이 황실에서 떠날 때 가지고 가는 지참금이야 관계 규정 등에 의거하여 1억 엔 내외로 정해졌고, 여기에서 최종 결정하는 형태.[17] 2018년 기준으로 패전 이후 신적강하된 11 미야케 중에서 4개가 단절, 2개가 단절 확정인 상황이며 후손이 있어 단절을 피한 6개 18명의 50대 미만의 남성이 살아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미혼은 9명가량이 있는데, 이들 미혼자의 연령대는 최소 10대 중후반부터 40대 초중반 정도로 다양한 편이라고 한다.[18] 그래서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 언론에서 키코 비가 궁내청 측의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왜 이러한 사실을 자기네들에게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냐고 항의했다니 내정자가 생기면 자체적인 조사는 대충이나마 하는 모양.[19] 대표적으로 차세대 천황으로 유력시되는 히사히토에 대해서는, 원인 모를 정도로 강력한 보도규제 조치 등이 있다. 히사히토 출생 전에도 유독 궁내청은 후미히토 일가(아키시노노미야)에 대해서 관대해서, 일본에서도 "황태자 일가를 천대시하고 후미히토 일가는 사사건건 과보호하는 것을 넘어서 우대한다"는 등 불만이 상당부분 있었다.[20] 거기에다가 최근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유독 정식 약혼자도 아닌 코무로 케이에 대해서 과잉 보호만 하면서 해당 논란을 고의적으로 키운 바 있어서 일본 내에서 궁내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21] 이때 나루히토 황태자는 정해진 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늦게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이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22] 국정을 전담하는 총리로서 타 국에 결례가 되는 행동을 무단으로 자행한 궁내청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아키히토 상황 및 나루히토 덴노와의 가치관이 좀 다를지언정 아베 신조는 그 성향상 당연히 황실 전반에 대해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사실 아베의 성향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 정치계에서는 황실에 적대적이면 누구든 그날로 끝이라, 일본 공산당 같은 천황제에 부정적인 이들조차 천황이나 황실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그 황실의 정통 후계자인 황태자와 일개 황자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황태자는 대통령제로 따지면 부통령 정도의 위상이지만 황자는 그냥 종친일 뿐 고위관료도 될 수 없다. 물론 나루히토 현 천황에게 아들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후미히토 또는 히사히토가 천황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소한 20~30년 뒤에 생각해야 할 문제이고,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의 즉위는 완벽히 확실시되었다. 게다가 국가원수는 사실상 자신이니 사고는 딴 놈이 치고 수습은 내가 해야 할 처지니 열을 안 받을 리가 없다.[23] 궁내청 병원의 시설에 대한 것은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병상수는 20개로 이 정도면 동네에서 간단한 수술한 뒤 잠깐 입원만 하는 정도의 병원이다. 급성 간염은 치료만 제때 받으면 큰 위험은 없는 병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어렸기 때문에 규모가 큰 병원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24] 애시당초 황위와 관련된 천황의 명은 절대로 거스를 수 없거니와 어차피 생전에 천황이 자기 자리를 물려준 일은 꽤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가장 최근 사례가 2019년 기준으로 202년 전의 일이니... 애시당초 생전퇴위가 유례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헌법 이후 기준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다.[25] 2018년 12월 후미히토 생일 기념회견에서 한 천황 즉위 행사 중에 종교적인 게 있으니 국비보다는 황실비용으로 처리해야 합당하다고 했다. 이 발언을 두고 궁내청 관계자가 그럴 생각이면 후미히토 저택 개보수비로 투입되는 약 43억 엔(개보수 33억 엔, 임시거처 10억 엔) 등을 최대한으로 줄이시는 것으로 좋은 선례를 먼저 만드시면 어떻겠냐고 돌려서 깐 적이 있다. 사실 후미히토 저택은 원래 지치부노미야 궁저였는데, 궁저였던 1972년에 개수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1997년부터 후미히토 일가 저택으로 사용하기 떄문에 2006년부터 줄곧 저택 노후화가 심하니 개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뤄지다가 겨우 개수했다고 한다.[26]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 카코 공주의 결혼 발언, 후미히토의 즉위 행사비 발언, 히사히토의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 부정진학 시도 의혹 등등등 나열하기도 힘들다.[27] 1월 연초의 공무 이후 2월까지 천황 내외는 공식적으로 휴양 중이었다.[28] 대충 내용이 어머니 빚과 관련해서, '어머니는 돈을 증여받은 것이니 갚을 필요 없다(...).'라는 내용이었다고(...). 거기에 공개한 방식도 각 언론사에 팩스로 이 문서를 보내버렸다고 한다.[29] 참고로 마지막 여성 천황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고사쿠라마치 덴노였다.물론 이 사람은 고모모조노 덴노가 어느 정도 연령대가 될 때까지 천황직을 하다가 조카에게 양위를 물려주었으나 조카인 고모모조노 덴노가 급사하면서 서둘러서 후계를 고카쿠 덴노로 정하였다. 그리고 현 황실은 이 고카쿠 덴노의 직계 가문으로 내려오고 있다. 부자 세습으로 계속 이어져 나루히토 덴노는 고카쿠 덴노의 직계 7대손이다.[30] 미얀마가 동남아에서도 낙후된 국가라 해도 아웅산수지는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딸이자, 현 미얀마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이런 거물급 인사의 초청은 당연히 일본 - 미얀마 간 외교의 일환인지라 일본 외무성 쪽에서도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사안인데, 정작 궁내청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을 단순 사적 여행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미얀마에게도 상당한 결례다. 사실 궁내청이 이런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총리인 아베 신조에게 경고를 받은 적도 있으나 별로 개선할 생각은 없는 모양.[31]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사건 이후, 미얀마가 한동안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것은, 미얀마 또한 피해국가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지라 할 수 있는 국부 아웅 산 장군의 묘소가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웅 산은 미얀마에서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며, 그의 딸인 아웅산 수지의 영향력은 미얀마에서 크다고 볼 수 있다.[32] 이는 쓰구코 공주의 부모인 다카마도노미야 부부가 나루히토 덴노 내외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 때문에 친 아키시노노미야 성향인 궁내청측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을 물 먹이고 있는 이유라고 판단하고 있다.거기에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현 황족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아래라는 점도 이러한 무시행위를 자체적으로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