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감
1. 移監
수감자를 다른 교도소로 옮기는 것.
2. 후한 말의 인물
- 이감(삼국지) 문서 참조.
3. 전한의 인물
李敢
? ~ 기원전 118년
한나라의 장군. 당시의 유명한 지휘관 이광의 삼남이 된다. 낭관이었던 큰형 이당호와 대군태수였던 작은형 이호는 일찍 죽었다.
기원전 121년, 이광은 낭중령의 신분으로 4천여명을 이끌고 우북평에서 출발, 박망후 장건은 1만여명을 이끌고 길을 달리해서 출격했는데, 갑자기 이광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흉노 좌현왕의 4만 군대가 이광을 포위했다.
이광의 병사들은 멘붕에 처해 모두 패닉 상태였으나, 이광은 자신의 아들 이감에게 명령하여 적에게 돌격하게 했다. 이감은 수십여기를 이끌고 수만군대에 돌진하여 적기병을 정면돌파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저놈들 별 것 아니라고 자신감있게 말해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별 것이 아니든 어쩌든 일단 싸워야 했기에, 이광은 부대를 원형으로 하여 밖을 둘러보게 하였고,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흉노병사들을 향해 활을 쏘아대었다. 이광 본인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를 쏘아대어 흉노 부장들을 쳐죽이며 분전했고, 날이 저물고 포위가 여전하자 겁에 질린 병사들도 이광의 이런 용맹한 태도를 보고 용기를 얻어 열심히 싸웠다.
다음 날, 이광이 여전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울때, 장건의 부대가 도착하여 적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너무 지쳐 추격하지 못했고, 이광의 부대는 전멸의 위기를 넘겼지만 몰골은 완전히 패잔병 꼴이었다. 장건은 행군을 지체하여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속죄금을 내어 목숨은 건졌다. 이광은 딱히 공이랄 것이 없어,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도 아무 보상도 없었다. 사기 흉노 열전에 따르면, 이광의 4천여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죽었고, 흉노는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광이 사망했을 당시, 이감은 곽거병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광이 죽자 이감은 낭중령에 임명되었는데, 이광이 죽은 탓을 위청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여 '''대장군인 위청을 두들겨 팼다!''' 신중한 위청은 짐짓 이 일을 비밀에 부쳤으나, 곽거병은 이 일을 알아버렸다. 분노한 곽거병은 친척인 위청이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사냥터에서 이감을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 그래도 한무제는 곽거병을 아꼈기에, 사람들에게는 이감이 사냥하다가 사슴뿔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이감의 딸은 태자의 중인(中人)이 되어 사랑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는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이우는 이익을 탐하는 변변찮은 성격이라 이릉의 일도 있고 하여 이 때부터 이광의 집안은 기울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