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마 그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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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Beautiful Beast'''
Die Hyäne von Auschwitz ("The Hyena of Auschwitz") (아우슈비츠의 하이에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악명을 떨쳤던 슈츠슈타펠 여성보조대원이자 여성 수용캠프의 감독관 및 여성 간수 지휘관.
2. 상세
2.1. 나치당 가입
독일의 북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에서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이르마는, 13살 때 어머니가 일찍 자살하여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베르타는, 이르마의 아버지 알프레트 그레제가 인근 주점 주인의 딸과 불륜 관계임을 알고 '''염산을 마시고 자살했다.'''
이후 15살에 이르마는 이상행동을 보여 학교 내에서 왕따를 당하여 학교를 자퇴하였다. 사실 말이 없던 그녀였지만 당시 독일을 강타하고 있던 나치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1]
1938년부터 이르마는 농장과 매장 일 등 다양한 직업을 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 공부를 하였고, 1940년에 독일이 여성보조대원제도란 이름으로 여군[2] 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슈츠슈타펠의 SS 부상병 요양캠프의 간호보조원으로 들어가 2년간 복무를 하였다. 그녀는 그곳의 일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이르마는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나치당에 가입하여 여간수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후, 레벤스르북 강제 수용소 임무를 자원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반나치주의자로서 딸이 수용소 임무를 지원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라벤스브뤽(Ravensbrück)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다른 여간수들처럼 교육을 받은 후 1943년 3월에 그들의 주 근무지인 아우슈비츠로 이동하였다.[3]
2.2. 채찍을 든 여성 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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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채찍을 든 여성 간수가 이르마 그레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이르마는 그곳에서 근무하던 170명의 여간부 중 하나였으나, 아름다운 외모로서 우수한 게르만인의 표본으로 불리며 '아우슈비츠의 금발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용자들에게는 악명 높은 간수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당시 그녀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여성수감자 감독관으로서 3만명의 수용자들을 감독하였고 여간부 서열에서도 2위를 차지하였다. 위의 사진처럼 항상 들고다니던 가죽채찍은 그녀의 상징이었고 수감자들을 채찍과 부츠 등으로 고문하면서 군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하거나,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즉결사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낼 인원들을 직접 골라냈다.
한편, 그녀는 남성 수감자들을 위안부로 삼는가 하면, 특유의 미모로서 많은 남성 간부들과 염문설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이 중에는 그녀가 근무하던 비르케나우 수용소장인 요제프 크라머와 죽음의 천사로 유명한 요제프 멩겔레도 있었다.
1945년 1월에 아우슈비츠가 소개됨에 따라 잠시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에 있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다시 한 번 악명을 떨치며 1945년 3월까지 노동서비스국장직을 수행하였다.
2.3. 최후
이르마는 4월 17일에 요제프 크라머 등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영국군에 체포되어 12월 13일에 베르겐 벤젤로 이송되었다. 그녀와 다른 여간수들은 남성 간부들과 함께 수용소 수감자들의 시신을 치우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당시 영국군들은 그녀의 외모와 나이를 알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재판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쟁범죄를 부인하였으나 결국 유죄가 확정되어 다른 여간수 11명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았다. 1945년 12월 13일, 23번째 생일 몇 달 후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빨리 죽여달라는 유언을 남겼다.[4] 그녀는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사형 과정의 문제로 고통스럽게 죽었다.[5][6]
3. 기타
- 비슷한 인물로는 일제 코흐(Ilse Koch, 1906~1967)가 있다. 영화 나치 일사 시리즈로 나온 그 수용소장 모델. 정확히는 남편이 SS 대원이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장을 지낸 카를 오토 코흐의 부인.
[1] 그 무렵 아버지 알프레트도 나치에 입당했다는 설도 있으며(1937), 1939년에는 재혼도 한다.[2] 엄밀히는 군복과 계급만 있는 군무원에 가까웠다.[3] 당시 신참 여간수들은 이곳에서 교육을 받아 아우슈비츠로 향했는데, 대부분의 신참 여간수들은 배급과 생활환경 면에서 이곳을 더욱 선호했다.[4] '"Schnell"(quickly)'이라고 나지막히 말했다고 한다.[5] 이르마는 롱드롭식으로 처형되었는데 교수형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 방식은 원래 목뼈를 박살내 죽이는 것이지 질식사 시키는 것이 아니다. 전자대로 되었다면 편하게 갔을테지만 하필이면...[6] 형집행은 영국의 유명 사형집행인인 알버트 피에르 포인트가 맡았는데 삑사리 없이 보내기로 유명한 실력자인데 여기서 실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