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니
그리스어: 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이리니 이 아시네아[1] )
영어: Irene of Athens
생몰: 752?~803
섭정: 780~790, 792~797(공동통치)
재위: 797~802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여제. 레온 4세의 아내로서 780년 남편이 일찍 죽자 어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를 시작하였다. 동로마 제국 최초의 여제이며, 성상옹호를 주창해 성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어로는 아이린. 출신지를 따라 아테네의 아이린이라고들 부르며 발음에 따라 이레네라고도 한다.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은 매우 불안한 정치적 위치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임페라토르, 즉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게르만 족은 아예 로마가 공위상태라고 간주하였다. 이리니는 이런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해 나쁘지 않은 통치를 이어갔으나, 결국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외세와 접촉해야 했고 이로인해 파국을 맞았다.
이전 황제들과는 달리 성상 옹호파였다. 그녀가 기존 황제들과는 달리 그리스 본토 출신이었던 것이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5세부터 극단적인 성상파괴주의는 잦아들고 있었고 이레네 대에 와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이레네는 성상옹호자인 측근 타라시오스를 기용하는 등 성상옹호 정책을 주창했으나, 근위대가 반발하는 등 역풍을 맞았다. 이에 이레네는 근위대를 소아시아 전선에 보내버리고 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불러들였다. 이레네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를 개최하고 성상파괴를 주장한 히에레이아 공의회를 배격하였다. 이에 반발하는 세력은 자연히 젊은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에게 집결했고, 이레네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6세는 정실 부인을 내치고 전쟁에서 패했으며 독단적인 인사를 일삼아 인망을 잃었고 결국 어머니 이레네에 의해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레네는 성상옹호정책을 폈는데, 독특하게도 성상숭배를 옹호했지만 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함부로 건들 수 없던 탓도 있겠지만, 이는 동로마 제국의 고질적 문제인 종교의 통합을 시도한 것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지지세력에게 불만 가져다 주었고, 반대세력 역시 이와 같은 관용에 만족하지 않았다. 성상파괴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부터 왕조의 운명을 걸고 싸운 군부세력이었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 이레네는 종교정책 외에도 테마를 몇 개 더 확립하고, 슬라브 인에게 포교를 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안정된 정책을 이어나갔다. 이레네는 군사적으로 실책은 없었으나, 콘스탄티노스 6세의 군사적 실책으로 불가리아에 많은 조공을 헌납하고 있었고, 이는 사라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포교자체는 성공적이어서 이 때 상당한 수의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성상숭배가 합법화되자 자연히 예술도 부흥하였다. 성상파괴로 단절되었던 비잔틴 예술이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레네의 통치가 안정을 찾을 무렵 위기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찾아왔다. 샤를마뉴는 교황과 동로마 제국이 성상숭배 옹호로 일치해 단결할 위험이 보이자, 프랑크푸르트 종교회의를 개최해 갑자기 성상파괴를 주장함과 동시에,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는 몇 가지 교리(필리오케 논쟁)를 들먹이며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무효라고 교황을 압박하였다. 교황은 이에 프랑크 왕국의 손을 들면서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대립 끝에 결국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샤를마뉴의 서로마 황제 대관으로 이어진다. 샤를마뉴는 이레네와의 결혼으로 동서 제국의 합일까지 바라보았으나, 이에 분노한 귀족들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 의해 이레네가 폐위되면서 무산되었다. 폐위된 이레네는 레즈보스 섬으로 귀양와서 강제로 노동하는 학대를 당하다가 폐위된지 1년만에 사망한다.
이렇게 모후로서 어린 황제를 섭정한 것, 성상을 옹호한 행보는 이후 다시 등장하는 섭정 태후 테오도라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그 끝은 판이한데, 성년이 된 아들과 권력 다툼을 벌인 것은 같으나 테오도라는 결국 아들에게 밀려난 반면, 이리니는 아들의 안구를 적출해 가며 권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실명한 황제는 곧 죽었고, 이러한 잔인한 행위로 이리니는 비판받았다.
2. 창작물에서
크루세이더 킹즈 2의 사를마뉴 시나리오(769년)에서 남편인 레온 4세와 막 결혼한 상태로 등장하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는 771년생이라 등장하지 않는다. 그 후 867년 시나리오에서부터는 동로마 제국위의 과거 소유자 이력에서만 볼 수 있고 친족 살해자(Kinslayer)가 붙어 있다.
3. 같이보기
문명 6에서 중세에 고용할 수 있는 위대한 상인으로 등장했는데 게임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비단 산업을 육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