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키 사토시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일본 프로야구, 한국 프로야구, 대만 프로야구 3개 리그에서 활동했던 저니맨이며 KBO 리그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다.
2. 선수 생활
2.1. NPB 시절
고교 졸업 후 사회인야구팀에서 뛰다가 1989년 긴테쓰 버팔로즈에 6위 지명을 받고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 입단 후 5년간 불펜투수 겸 임시 선발로 뛰다가 1996시즌 중반에 포수 요시모토 료와 맞트레이드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다. 히로시마에서는 딱히 기회를 받지 못하며 6경기 등판에 그쳤고, 시즌 후 다시 요시모토와 트레이드되어 긴테쓰로 돌아가게 된다.
1999년 동생인 이리키 유사쿠[1] 가 뛰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 구단 역사상 최초의 형제 선수로 기록되지만, 1999년에는 22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0년에는 아예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면서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2001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했는데, 여기서 이리키는 10승 3패 평균자책점 2.85의 성적을 거뒀다. 마찬가지로 그 해 13승을 거두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동생 유사쿠와 함께 올스타전에도 출장했고,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맛보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2년에는 1승 3패 평균자책점 6.66으로 크게 부진했고, 결국 시즌 후 방출 통보를 받았다.
2.2. KBO 시절
2003 시즌을 앞두고 이리키는 두산 베어스와 계약을 맺으며 (재일교포를 제외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선수로 등록된다. 김인식 감독은 진필중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면서 비게 된 마무리 자리를 이리키에게 맡길 계획이었으나 이리키는 마무리 자리에서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김인식 감독은 마무리 투수를 구자운으로 바꾸는 대신 이리키를 선발 투수로 전환시킨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보직 변경이었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리키는 선발 전환 후 리그 최다인 5번의 완투를 기록하는 등 이닝이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중반 합류한 마크 키퍼와 함께 선발진을 이끌었다. 시즌 성적은 39경기(5완투 1완봉) 7승 11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74. 다만 재계약은 하지 못하면서 한국 무대를 떠나게 된다. 승운이 좀 없었던 것을 빼면 훌륭한 성적이었지만, 이 시절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은 투승타타였던지라 10승을 못 거둔 것이 컸다.
굉장히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3. CPBL 시절
2004년 이리키는 대만프로야구 팀 라뉴 베어스(現 라쿠텐 몽키스)와 계약을 맺었다. 11경기 4승 6패 평균자책점 3.39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시즌 중에 퇴출됐고, 시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연도별 성적
4. 기타
- 첫째 동생인 이리키 유사쿠는 현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3군 투수 코치를 맡고 있으며 막내동생 이리키 히로유키도 야구선수였다. 단 히로유키는 프로에 진출하진 않았다.
- 동생 유사쿠와 일본프로야구 통산 승수가 35승으로 동일하다. 심지어 커리어하이도 2001년 시즌인거까지 같고 그해 올스타전에서도 나란히 등판했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잠깐 언급됐다. 맥주와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 프로에 입단하면서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은퇴 후 학생 시절에 만났던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 재혼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 전처에게 줄 위자료와 본인의 낭비벽 등으로 생활고를 겪고 일용직을 전전하는 등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와준게 지금의 아내. 아내 덕에 처남이 운영하는 도시락 체인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몇년 후 그만두는 등[3] 여러가지 일을 했다가 때려쳤다 하면서 아내에게 의존하는 삶을 사는 바람에 아내가 결국 본업인 미용실까지 그만두면서 남편을 재취업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한평생 야구만 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지를 모르겠다고. 현재는 처남이 운영하는 도시락 체인점에서 다시 일한다는 말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이쪽도 저니맨이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마이너리그(뉴욕 메츠,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거쳤다. 여담으로 2006년 메츠 스프링캠프에서 약물검사에 걸리며 5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아 일본인 야구선수로서는 최초로 도핑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선수가 되었다.[2]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3] 튀김 등 각종 요리를 할 때 이것저것 주의를 받는 것을 못 견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