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1. 소개
1946년 5월 1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5가 1번지에서 출생. 배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와 한일은행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26세의 나이에 조기 은퇴했다.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거쳐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쌍방울 레이더스(1991~1992)-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95~2003)-한화 이글스(2005~2009)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9년 이후 2선으로 물러나 KBO의 기술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 감독'''과 '''킬인식'''이란 상반된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평가가 심히 엇갈리는 감독이다.'''우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도전에 나섭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정식 중
두산 시절에는 '''구단 역사상 희대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통산 6회 우승 중 2회 우승을 일궈낸 미라클 두산이란 팀컬러를 만든 명감독'''으로 요약되지만, 한화 시절에는 부임 초반은 믿음의 야구와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를 기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장기적으로는 투수 혹사 및 지나친 노장 선호, 유망주 홀대, 군입대 선수 관리 미비 등 근시안적인 팀 운영으로 최악의 암흑기를 초래시킨 암흑군주'''로 평가된다. [3] 그러나 한화의 경우, 2군이 훈련장도 2014년에 완성되었고, 지원도 열악한 팀이었던 것은 맞다. '''최근 진짜 전권을 휘두른 암흑군주를 섬기는 친위대의 물타기[4] 와 시대를 착각한 팬들[5] 의 오해가 영향을 미친 부분'''도 분명히 있다. '''전권은 없었고 건의가 프런트에게 무시되던 감독'''이었던 면이 묻힌 것.[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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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통산 5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 이상의 성적4번(우승 2번 포함)을 거둔 감독으로 2017년 1라운드 탈락 참사로 마지막이 안습해졌지만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만으로도 베이징 올림픽 전승 우승의 김경문감독과 더불어 최고의 국제전 감독이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009년까지 980승 45무 1032패 승률 .487.
2. 선수 경력
1965년 실업 야구 팀인 크라운맥주를 시작으로 1967년에서 1968년까지 해병대 야구부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나 해병대 시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25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이 당시만 해도 국내에 스포츠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하던 시절이라 피칭 뒤에 아이싱은 커녕 반대로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면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찢어지고 해진 어깨의 모세혈관이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한일은행 당시 김영덕, 김응용 등 훗날 프로야구 1세대의 명감독들이 한 팀에서 뛰었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선수 경력에 대한 본인의 회상이 최근 본인 유튜브 채널에 올라왔다. #
3. 지도자 경력
4. 비판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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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변화 짤이 매우 인상적인데, 무표정만 나오거나 거기에 가끔 한두개만 환한 표정을 보이는 다른 짤들과는 달리 이 쪽은 우거지상도 포함되어 참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짤이 기사에 실렸다(...). 그리고 이 짤을 본인에게 보여주면서 클락과 추승우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물어봤는데 단순히 잘 못쳐서라고 답했다. 답변 영상은 오리고기 문단의 영상 링크에 같이 나온다.
- 위의 짤에도 나오듯 오리고기를 상당히 좋아한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오리요리(오리불고기, 오리백숙 등)을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두산과 한화의 듀얼팀컬러 이름이 '좋다! 오리고기'다(...)[7] 먹게 된 이유가 뇌경색으로 건강이 좋지 않을 때, 닭고기보다 오리고기를 먹으라는 말을 들었는데 서울에서 대전가는 길에 '오리구이 진흙구이'라는 간판을 본게 기억나서 경기가 우천 취소가 되자 오리고기나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면서 간게 시작이라고 한다. 당시 질문을 할 때 이 항목을 보고 이야기를 해서 일주일에 두세번 먹는다고 써져있는데 그거 한번 먹어서 그렇게 이야기가 나온거냐고 물어봤는데 한번이 아니라고 한다.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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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나지 않은 성품에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가 좋으며 입이 거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선수들에게 욕설도 잘 안한다.[8] 그래서인지 야구계에선 선후배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 TV카메라 앞에서도 늘상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있고 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선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오히려 두산 감독 시절의 팀 컬러에서 알수 있듯 국내 출신 감독 가운데는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자율을 부여하는 감독이며, 두산의 후임 감독인 김경문은 김인식 감독의 자유방임에 익숙한 팀컬러를 바꾸기 위해 상당한 내부진통을 겪기도 했다. 이글스의 전설 정민철이 최악의 시즌을 겪은 직후 김인식이 감독으로 새로 부임했던 당시, 캠프에서 심하게 의기소침해있던 정민철에게 0승드립을 치며 장난스레 다가가 훈련일지용 공책을 선물해주며 다시 해보라고 격려해주었고, 새 감독이 자신을 선발투수라인에서 뺄 수도 있다는 걸 걱정하던 정민철은 감독의 믿음에 힘입어 훈련했고 재기에 성공하였다는 건 이글스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선수포텐셜을 굳게 믿는 유형의 지도자.
- 2004년에 발병한 뇌경색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사진을 찍은 결과 뇌경색으로 죽은 세포가 흔적마저 사라지자 의학계에서는 기적이라며 학계에 보고하려 한다는 뜻을 본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뇌경색 발병 이후 완치되어도 혈관이 막혀 죽은 뇌세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종 신문에서 야구 지면이 아닌 헬스 & 건강코너에서 인터뷰어로 등장하기도. 그래도 여전히 거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듯 하다. 참고로, 저 뇌경색 투병 이후에 술과 담배를 모두 끊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 운전면허가 없는 지하철족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고교 졸업 후 1종 면허를 취득했지만, 쌍방울 감독 시절 여러 차례 교통사고와 얽히며 운전에 대해 자신감을 잃었고, 결국 운전면허를 갱신하지 않아 도로 무면허(...)가 되셨다고 한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당시 정수근이 차로 모시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는 일화가 박명환야구TV에서 알려졌다.
- 식초가 본인을 건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해서 식초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9]
- 한때 천하무적야구단에서 총감독을 맡은적이 있다.
6. 종합적인 평가
위의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이 한화 이글스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문제들로 여러모로 한화 팬들과는 좋은 인연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커리어로 보면 결코 무능한 감독은 아니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갈 명장.'''
해태 타이거즈수석 코치 시절에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중재역이자 투수 육성의 역할을 맡아 해태왕조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며, 감독 생활 초창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광환, 김용희 등과 함께 자율훈련과 분업화로 대표되는 메이저리그식의 신사고(新思考) 야구를 주도했다. 1994년 선수이탈 파동으로 사분오열된 팀을 추스려 우승으로 이끈 점 또한 덕장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80년대 박영길이 내세웠던 빅볼 노선[10] 을 이어받아 세밀한 작전보다 타자의 장타력을 극대화하는 공격야구를 추구, 관리야구와 스몰볼 중심이었던 한국야구의 스타일 다양화에 공헌했다. 베어스 시절의 우동수 트리오나 이글스의 데이비스-김태균-이범호(-김태완) 등 항상 중심타선 만큼은 파괴력있는 거포들로 대부분의 시즌 동안 평균 이상의 득점력과 장타력이 있는 타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에서 타선관리 능력은 손에 꼽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단, 한화는 그가 오기 전부터 뻥야구 구단이었다. 한화의 뻥야구 컬러를 김인식이 만든건 아니다.
투수 육성에도 나름 노하우가 있어서 페넌트레이스 중반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커버하는 즉시전력감의 불펜투수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지만, 두산 시절이나 한화 시절이나 키워낸 투수를 너무 과하게 소모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깎먹었다. 투수 출신 감독 치고는 타자를 보는 안목도 좋은 편이고 한화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퇴색되긴 했지만 두산에서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한화에서의 말년에는 08년에 기회를 붙잡은 김태완을 제외한 한화의 빅뱃 유망주들은 그의 재임기에 2군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것도 이도형, 윤재국, 고동진같은 선수들에게 밀려서.
김인식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최대한 성적을 올릴 수도 있고 리빌딩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구단이 성적을 원하는지 리빌딩을 원하는에 따라 맞추어주는 편인데, 쌍방울에서 지원이 없다고 때려치우고 나오자 같이 일했던 코치들이 다 해고당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그 이후부터는 최대한 구단의 요구에 맞추어주는 편이다. 한화 구단에서 가을야구를 선택하지 않고 리빌딩을 요구했다면 OB(현재 두산)에서 꼴찌까지 하면서 리빌딩을 했듯이[11] 한화도 젊은 선수 위주로 투수를 갈아넣지 않고 리빌딩이 가능했을 것이다.
비슷한 연배나 레벨의 다른 감독에 비해 통산 승률이 낮은 편인데(.487), 이건 김인식 감독이 맡았던 팀들이 대부분 재정과 인프라 지원 면에서 최하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우선 처음 감독을 맡은 팀이 쌍방울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말 다했다고 볼 수 있고 김인식 시절의 두산은 그룹 구조조정의 여파로 도무지 구단에 돈을 쓸 생각이 없어서 매년 주력 투수와 타자를 팔아 구단 운영비에 보태는 팀이었다. 심지어는 '''김동주까지 KIA 타이거즈에게 유동훈+현금 30억원으로 트레이드'''하려다 정보가 새나가서 포기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두산 시절의 김인식은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꾸려낸 팀으로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라도 평가받아야 한다. 김경문 감독 취임 이후 빠르게 세대교체가 된 두산 팬덤에서는 골수팬이 아닌 이상 새로 팬덤에 가세한 팬들 은 거의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한다.
'단기전의 마술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995년 우승 이후 2000년대 초까지는 오히려 단기전 성적이 상당히 나빴지만[12] 2001년에 삼성을 상대로 업셋으로 우승하면서 단기전 능력을 드러냈다. 이후의 포스트시즌에서는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정규리그 성적이 뒤졌다는 건 애초에 팀의 전력이 뒤진다는 뜻이기에 업셋이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01년 한 번이라도 업셋우승을 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 한화에서도 2005년엔 SK, 2006년엔 현대를 업셋하고 3년간 플옵에 진출해서 한번도 업셋을 당하지 않는 등[13] 그 나름의 단기전 실력은 보여줬다. 그리고 만들어준 전력을 가지고 치르는 4번의 국가 대표감독에서 단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2009 WBC, 2015 프리미어12) 단기전에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한화에서 안 좋은 말년으로 인해 한화팬들에게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거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 이 시기에 한화 선수층이 고갈된 건 사실이고 결국 2012년까지도 한대화 감독이 재임기간 내내 리빌딩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그 리빌딩조차도 절망적으로 얇아진 선수층에 선수들 자체의 기본기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2군구장도 없는 판이니 유망주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팀을 손봐야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다른 감독에 비해서도 유난히 원한 맺힌 장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는 세대교체를 등한시하여 팀 체질을 악화시킨 부분에서 흑역사로 취급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지만 이후 김인식 감독보다 더 화려한 경력의 김응용 감독이 9년만에 복귀해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꽤나 많이 주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킬끼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남기고 떠났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부임 이후 김인식 부임 시기에는 상상 못했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2016년, 백인천급으로 몰락해버려서 김인식 감독은 어쨌든 짜내는 거라도 잘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김인식 관련 다큐
그밖에 김인식 감독의 또 하나의 장점으로는 언론에 대해 굉장히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언론을 대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언론의 효율적인 활용은 좋은 능력이다. 일단 충실하게 기사거리를 제공하면서 기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성근 감독처럼 어그로를 끄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반작용으로 언론의 과대평가라는 말도 나왔다. 실제 한화 시절의 실정이 가려진 원인도 언론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준 덕분에 일정부분 가려진 덕도 있다.
여담으로 노리타들이 툭하면 들고나오는 감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김인식에 비하면 김성근의 혹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인식 시절에 기반을 엉망으로 쌓아서 그런거다, (비상식적 운용에 대한 썰이 나오면) 그런건 김인식 시절에나 하던거다 등등. 김인식 감독을 들먹여 김성근의 잘못을 가리는것도 말이 안되지만 아무리 한화시절 실책을 크게 잡아도 야구인생 내내 선수들을 갈아넣고 야구 외적 요소로까지 선수들 억압한 김성근보다는 훨씬 낫다. 게다가 김인식 감독이 안영명, 마정길 등에 가한 혹사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5~16년의 송창식, 권혁, 박정진이 당한 것의 2/3수준에 그친다.[14] 게다가 혹사의 유일한 목적이자 혹사를 정당화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팩터인 성적 면에서도 6년간 단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한 김인식>>>>>2년간 몇 백억 지원받은 김성근이었다...[15]
7. 향후 행보
2011년 8월 OBS의 '명불허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야구감독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통산 980승을 거둔 상태에서 불명예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1000승을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는 듯. 그러나 감독의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작금 야구계에서 기존의 낡은 야구관을 벗어나지 못해 팀을 망쳤던 노감독이 새로운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한화 감독 이후 1~2년도 아니고 5년 넘게 현장떠나서 쉬어버린터라 실전감각에 문제가 많을게 뻔하다.
유능하지만 구세대에 속하는 노 감독이 현장을 오래 떠났다 복귀해서 실전 감각에 문제를 드러낸 사례는 상당히 많다. 2002년까지 SK 감독으로 있다가 3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6년 롯데 감독으로 돌아왔던 강병철은 실전감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며 과거의 승부사 기질까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보였고, 8년 쉬다온 김응용 감독은 한화 감독 기간동안 어메이징한 운용으로 한화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16]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해임된후에 계속 프로팀 감독으로 물망에 오르다 한화 감독에 선임된 건 원체 열성팬이 많은 인사기도 하지만 독립야구단이라도 맡아서 현장에 계속 머무르며 감을 유지했다는 점도 크다.
그러나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에서 온갖 불리한 요소들을 떨쳐내고 승리, 결승에서는 미국까지 꺾고 결국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금 명장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6년 9월 5일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된다. 그러나 16시즌 세이브왕 김세현을 거르고 임창용, 장시환, 도박 징계를 아직 받지 않은 오승환을 뽑고 두산 출신 선수나 노장들을 선호하며 야구팬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그리고 결국 1라운드에서 1승 2패로 탈락하면서 고개를 떨궜다. 2승 1패를 예상했던 야구팬들은 홈런왕 최정, 김세현 등을 뽑지 않은 결과라며 자업자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17] 마지막 3위 결정전에서도 상대적으로 약팀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단기전에 강하다는 이미지가 많이 퇴색됐다. 김응룡처럼 국대감독으로는 더 이상 못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당시 국대의 상황이 워낙 처참했기 때문에 김인식으로서도 손써 볼 방법이 없었다.[18]
7.1. 인터넷 방송
2019년 9월 2일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김인식의 국민야구'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TV에서 인터넷 방송을 한다. KBO 리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아마야구, WBSC 프리미어 12 등 국내외 야구 이슈를 주 소재로 삼는다고 한다. 각종 썰방송도 할 계획이라고 한다. # 강병규[19] , 이혜천, 김태형, 박철순, 김성근, 홍성흔 & 정수근 편도 업로드됐다. 출연 게스트들이 빵빵하며 출연 대기중인 야구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로드 된 동영상의 댓글에 제자 박명환이 댓글을 남기고 갔다.[20]
8. 역대 감독 성적
9. 관련 문서
[1] 호적상으론 1947년생이지만 실제는 1946년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기사에서 하일성이 (김인식) 본인의 고등학교 2년 후배라고한다.[2] 2002는 부산 아시안게임, 2006, 2009는 WBC, 2015는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7은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3]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상기된 김인식, 김응용, 김성근 모두 프로 감독으로서는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지만, 한화에서는 시대에 뒤처진 야구로 인해 말년의 커리어를 대차게 말아먹은 것이 똑같단 공통점들이 있다. 사실 이 3명 말고도 빙그레 시절의 명감독이었던 김영덕을 비롯하여 LG의 신바람 야구를 불러일으킨 이광환과 롯데의 2회 우승을 달성한 강병철 등 명성이 자자한 감독들이 거쳐갔지만, '''김영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한화에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성공했던 김영덕도 한국시리즈에서는 번번히 물을 먹으면서 콩그레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4] 원래 답없는 팀으로 포장하기 위해, 무조건 기원을 김인식 감독에게 갖다붙이고는 한다.[5] 당시의 드래프트를 현재(2015년 이후)로 착각하고는 하는, 김인식 감독 당시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팬들이다. 물론 투수혹사에 유망주 홀대, 군대 관리 무관심 다 맞는 말이지만 당시 한화 프런트가 돈을 펑펑 쓰는 지금의 한화와는 달리 막장도 그런 개막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드래프트 슬롯을 다 안 채웠다.''' 8R출신 국대 포수 양의지와 '''연습생 출신인 한화 레전드 타자''' 장종훈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것 하나만으로 역대 최악의 개막장 확정인데, 설상가상으로 드래프트 이외의 선수 수급 방법으로는 돈 안드는 방출 선수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6] 한대화 감독에게 박찬호와 김태균을 잡아주었으니 우승하라던 시기가 한화 이글스/2012년이다.[7]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김인식이 OB와 한화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8] 박명환야구TV에서 게스트로 초대된 정수근이 언급하길 바보같은 놈이 가장 심한 욕설이라고(...) 물론 정수근 증언영상을 직접 보면 '새끼'까지는 나오는데, 실제로 김인식이 한 말인지 정수근 본인 말투가 섞인건지는 애매하다. 물론 김인식 본인이 했다해도 정수근의 성대모사 톤상 최소한 거칠지 않고 안타까운 감정의 말투였다. 그것도 저 욕했던 상황은 야구의 '레드라이트 도루'로 인한 아웃 상황, 즉 경기 중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감독 지시 위반 도루자를 말한다. 야구계 폭력이 흔했던 80년대는 물론 90년대에도 감독이 도루금지 사인냈는데 했다가 아웃되고 팀이 지면 어두운데 끌려가서 뺨을 맞기도 했다. 그런데도 80년대 지도자 출신이 저정도 욕이면 화를 거의 안 내고 산 거.[9] 김인식 뿐만 아니라 백인천도 마찬가지고 대체적으로 1940년대생은 식초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10] 박영길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당시 전임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컨택 위주의 끊어치는 타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다 실패하고 감독직에서 은퇴했다.[11] 성적이 낮을수록 좋은 신인을 뽑을 수 있다. 또 꼴찌를 해야 하는데 나중에 쓸 투수들을 갈아넣을 필요가 없다.[12] 1998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19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로 연이어 탈락.[13] 물론 두산에게 2번 다 무기력하게 스윕당한 건 조금 문제가 있다.[14] 물론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1시즌 경기수가 지금(144경기)보다 20경기 가량 적은 126경기 체제였던 건 감안할 필요가 있다.[15] 참고로 이 때 한화가 영입한 외부 FA는 내야수 김민재 1명뿐. 그마저도 4년간 14억이라는 적은 금액에 영입한 건데다가 은퇴 후 코치직 보장이라는 조건을 걸고 영입한 거다. 반면 김성근은 FA로만 권혁(32억), 송은범(34억), 배영수(21.5억), 정우람(84억)이라는 외부 FA들을 선물받았고 내부 FA마저 김태균 84억에 눌러앉히고 외국인 선수도 에스밀 로저스나 윌린 로사리오 등 몸값이 100만 달러가 넘는 선수를 사 주는 등 김인식 때와는 다르게 지원을 빵빵 해줬다.[16] 다만 한화 감독 재임 시절 이태양과 최영환 등 여러 유망주들에게 지속적인 기회를 주는 등 이러한 부분에서는 현 감독 김성근에 비교되고 있다.[17] 다만 김세현은 백혈병이 있어서 약을 자주 먹어야 할 정도로 국대에 들어가기 애매한 몸상태라는 점을 감안해서 안 뽑은 것도 있다.[18] 사실 단기전이든 장기전이든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이니 감독이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도 좋다.[19] MC와 게스트 역할이 바뀐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병규가 말을 잘 했고 진행을 잘 이끌어 나갔다. 강병규 본인이 선수협 대변인을 맡게 된 계기를 처음 풀었는데 송진우는 말을 버벅거려서, 이종범과 박정태는 사투리가 심해서 본인이 맡게 됐다고 했다.[20] 일부 팬들은 박명환야구TV와의 합방을 추진해보라고 적었다. 박명환은 스승님이 불러주시면 가겠다는 입장.[21]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22] 드림리그 1위, 전체 8팀중 승률 1위[23]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24] 드림리그 1위, 전체 8팀중 승률 2위[25] SK와의 준플레이오프 승리,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26]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승리,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