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필중

 

'''진필중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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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5'''
'''2001'''

'''올림픽 야구종목 메달'''
'''2000'''




'''1999, 2000 KBO 리그 구원왕'''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35번'''
강병규(1991~1994)

'''진필중(1995~2002)'''

박진철(2004)
'''KIA 타이거즈 등번호 35번'''
소소경(2000~2002)

'''진필중(2003)'''

주창훈(2004)
'''LG 트윈스 등번호 35번'''
장준관(2000~2003)

'''진필중(2004~2007)'''

이형종(2008)
'''우리 히어로즈 등번호 39번'''
팀 창단

'''진필중(2008)'''

전인환(2009)

[image]
'''이름'''
진필중(陳弼重 / Pil-jung Jin)
'''생년월일'''
1972년 10월 13일 (52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력'''
역삼초 - 휘문중 - 휘문고(83회) - 중앙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2차 지명 2라운드 전체 11번(OB)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5~2002)'''
KIA 타이거즈 (2003)
LG 트윈스 (2004~2007)
우리 히어로즈 (2008)
'''지도자'''
한민학교 투수코치 (2009~2011)
경찰 야구단 투수코치 (2011~2013)
롯데 자이언츠 드림팀 투수코치 (2016)
롯데 자이언츠 2군 불펜코치 (2016~2017)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1기
4. 해설자 커리어
4.1. 편파해설 논란
5. 지도자 2기
6. 연도별 성적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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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B-두산 베어스, KIA 타이거즈, LG 트윈스, 우리 히어로즈 소속의 투수. 전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별명으로는 진필패가 있다. 홍현우 - '''진필중''' - 마해영 - 박명환 - 이택근 - 정현욱 - 정상호 - 차우찬으로 이어지는 LG 트윈스 먹튀 산맥의 한 축.
데뷔하자마자 자신보다 앞서 지명됐던 송재용을 제치고 선발 투수로 등장해, 그해 1995년 한국시리즈김상진,권명철과 함께 한국시리즈 선발 투수로 등장했다. 150km/h를 넘나드는 강력하고 묵직한 속구가 주 무기로, 전성기 때만 해도 강력한 구위를 자랑했고 이 덕에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도 꼽혔다. 허나 계속된 혹사로 인해 구위를 잃어버리면서 몰락해 버린 비운의 투수다. 당대 비슷한 사례로는 같은 OB/두산에서 뛰었던 박명환이 있다. 다만 둘의 몰락에는 3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LG 시절의 먹튀+삽질#s-1.1로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지만, OB/두산에서 맞이했던 리즈 시절에는 오승환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였다. 김경원, 구대성, 선동열의 아성에 도전했던 몇 안되는 선수. 이 당시 대항마로 유일한 마무리는 삼성의 임창용 정도가 있었다.[1]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선발로만 계속 뛰었으면 혹은 1이닝 마무리로 철저히 관리받던 시절에 뛰었다면 좀 더 나은 업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선수다. 마무리로 뛴다는 선수가 선발로 등판하여 완투까지 할 정도였으니, 투수들이 철저히 분업화된 2010년대부터의 관점으로 보면 아무리 옛날이라도 상식 밖의 투수 활용이었다.

2. 선수 경력



2.1. OB/두산 베어스 시절


[image]
[image]
[image]
풋풋했던 OB 베어스
신인 선발투수 시절
전성기였던 두산 베어스
특급 마무리 시절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후
포수 홍성흔과 함께.
중앙대학교 시절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였다. 4년 간 거둔 승리가 고작 4승. 하지만 1995년 2차 지명에서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가 2차 2순위로 지명하여 계약금 6,000만 원에 입단했다. 사실 여기에는 비화가 있는데, 삼성 라이온즈에서 진필중을 관찰한 후 '2라운드에 뽑을 테니 실력을 숨기고 있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필중이 이를 거절하고 그 해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면서 타 구단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 진필중을 매의 눈#s-3으로 지켜보고 있던 OB 베어스가 기습적으로 2라운드에서 지명했다. 한편, 삼성이 진필중의 2라운드 이전에 1라운드에서 뽑은 선수는 동국대 포수 '''김영진'''(....). 그 이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OB 베어스에 입단한 후 김인식 체제에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활약했다. 특히 마무리 자리에서 묵직한 구위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인 시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995년 한국시리즈로, 3차전의 6이닝 1실점과 2승 3패로 뒤진 6차전 선발로 나와 완투승을 거두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촉망받는 선발 유망주가 된 진필중은 이듬해 191이닝, 13승을 거두며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고, 1997년에도 7승을 올렸다. 그런데 원래 OB 베어스의 마무리였던 김경원이 부상과 혹사로 1997년을 끝으로 내리막을 타자, 1998년 이후로 마무리 투수로 뛰게 되었다.
1998년 158 1/3이닝을 던지며[3] 8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33(4위)를 기록하며 OB의 극적인 4강 진출에 한몫했다. 1999년에도 114이닝, '''16승''', 36세이브를 적립하며 구원왕에 올랐고, 두산이 드림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때 임창용을 1포인트 차로 따돌리고 52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구원왕을 차지했는데, 이 당시 기록한 52 세이브 포인트는 역대 1위이다.[4] 2000년에는 현대 유니콘스마무리 투수 위재영과 치열한 경쟁 끝에 5승, 42세이브를 올려 위재영을 3세이브 차로 따돌리고 2년 연속 구원왕을 거머쥐었다. 당시 42세이브는 1994년 정명원의 40세이브를 넘는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으며, 이 기록은 2006년 오승환의 47세이브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1년에는 이전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성적인 9승 23세이브 평균자책점 3.22를 기록했으나, 당시 약했던 두산 투수진에서 선발과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큰 힘이 되었고, 결국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을 당시의 투수도 그였다.
하지만 이 시기를 마지막으로 진필중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2. 메이저리그 포스팅 신청


진필중은 위의 성과에 힘입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고 2002년포스팅을 신청했다. 그러나 "저 선수는 3가지 구질을 던진다. '''직구와 느린 직구, 더 느린 직구'''다"[5] 결국 스카우트들에게 50달러 등 반 장난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실제 2002년 초에 신청했을 때는 '''무응찰'''이라는 굴욕적인 결과가 나왔고, 2002년 시즌 후 다시 포스팅을 신청했을 때는 포스팅 금액으로 25,000 달러(당시 KRW 3,000만 원)라는 굴욕적인 금액을 제시받았다. 이는 현격했던 한국프로야구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진필중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53km/h까지 던진다던 진필중의 강속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평균자책점은 3점대를 훌쩍 넘어갔다. 많은 세이브 갯수에 가려져 있었지만, 구속이 감소하며 자주 맞아 나가던 불안불안한 마무리 투수였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image]
KIA 타이거즈 시절
결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한 그는 2003년 1월 손혁, 김창희에 현금 8억 원을 얹어 당시 적극적으로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던 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 이후 진필중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김창희는 새로운 인생이 꽃피는 계기가 되었다.[6]
KIA로 가서는 전성기의 구위를 찾지 못하고 4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3.08로 이름값과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고,[7] '서울 연고 팀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태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먹튀로 까이게 된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경기는 2003년 5월 27일, 1위 싸움 중이던 현대에 10:7로 앞선 9회 말에 등판해 아웃카운트 딱 하나밖에 못 잡고 5실점하며 10:12로 진 경기였다.[8] KIA 타이거즈는 이 경기에서 당시 '최다 점수차 역전패 허용'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기존 기록은 8점차). 그리고 2013년 508 대첩이 등장하면서 기록이 깨졌다.] 이 기록을 내주면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KIA는 결국 반 게임 차로 1위를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반 게임 차로 1위를 차지한 팀은 현대 유니콘스였다.[9] '진필패'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이 시기에 생겼다.

2.4. LG 트윈스 시절


[image]
LG 트윈스 시절
2003 시즌 후 FA가 되어 우선협상기간 동안 원소속팀 KIA 타이거즈와 협상을 거부하고 FA 시장으로 나왔고, 해외 진출을 선언한 이승엽을 제외하면 정수근, 마해영과 함께 FA 최대어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투수 보강을 원하던 LG 트윈스와 4년 30억(계약금 10억, 연봉 4억, 옵션 4억)에 계약, 투수 FA 최고액 기록을 세웠으며[10] 타자까지 쳐도 롯데와 6년 계약한 정수근을 제외하면 사실상 당해 FA 최고대우를 받았다.
진필중의 영입을 강력하게 원하던 이순철 감독은 당초 이상훈과 진필중을 더블 스토퍼로 기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상훈이 덕아웃에서 기타를 치는 등의 문제로 충돌한 끝에 이상훈을 양현석, 오승준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하고, 이에 진필중이 단독으로 마무리를 맡게 된다.
그러나 2004 시즌 초반 똥줄 세이브를 몇 개 하다가 탈탈 털리고[11] 마무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본인의 요구에 따라 2005년에 선발로 전환했지만 선발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으며 결국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드러누웠다. 그 후에도 전혀 뛸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구단과의 연봉 싸움만 일삼아서 LG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도 2006 시즌에는 간만에 3점대 후반 방어율을 찍었지만, 출장 경기수와 이닝도 적었고, 중요보직이 아닌 승패와 관계없는 추격조 보직으로 활약해서 특별한 평가를 내리긴 어려운 수준이었다.[12] 게다가 2006 시즌이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인 건 감안해야 한다. 이해 리그 평균자책점은 무려 3.58이었는데 진필중은 3.95를 기록하며 리그 평균보다 못했다. 그리고 LG는 2004년에 최하위를 하고 말았다..
2006년 이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7년 시즌이 끝나고 마해영, 김우석 등과 함께 팀에서 방출당했다. FA 기간 동안 총 WAR이 1이 되지 않는 투수 FA 사상 두 번째 먹튀. 심지어 보상선수로 간 손지환이 KIA에서 4년 간 WAR 5정도 찍은 것 때문에 사상 최초의 보상선수가 FA 선수보다 잘한 케이스가 되었다.
LG 시절 때에 화끈한 방화질과 함께 진필중만이 아닌 다른 선수들마저 같이 불놀이를 하는 덕분에, 타 팀 팬들은 이들을 묶어서 엘지의 방화신기라고 조롱했다. 멤버#s-1로는,
등이 있다. 물론 이후에 멤버들의 방출과 은퇴, 그리고 결정적으로 더 화끈하게 불질러 주는 유명 작가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는 묻힌 별명이 되었다.

2.5. 우리 히어로즈 시절


[image]
우리 히어로즈 시절.
그리고 2008년 5월 우리 히어로즈신고선수로 이적했으나, 2군에서도 탈탈탈 털리다가[13] 한 달만에 신고선수 계약이 해지되어 다시 방출당했다.
그리고 2008년 말에 교통사고까지 당하면서, 선수 커리어는 완전히 끝나 버렸다.

3. 지도자 1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열심히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2009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2009년 한민학교의 투수코치로 지도자로 첫 걸음을 내딛었다.
"투수코치 진필중"의 첫 작품으로는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 140km/h 중반대의 구속을 던지는 파워 피쳐로 변신하여 삼성 라이온즈2010년 2라운드 지명을 받은 우완투수 김현우를 꼽을 수 있다. 코치로 만들어낸 첫 선수의 잠재력을 봤을 때, 코치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해 봐도 될 듯했다.
2011년 11월 자로 경찰 야구단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재미있게도 경찰 야구단의 전임 투수코치는 OB 시절의 선배인 김경원이었다. 김경원 코치가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옮기면서 진필중이 경찰 야구단의 투수코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4. 해설자 커리어


2013 시즌을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14 시즌에는 XTM에서 해설을 맡았고 베이스볼 워너B에도 출연했다. 2015년에는 SPOTV의 중계 방송에 해설로 참여했다.

4.1. 편파해설 논란


해설 수준은 그야말로 최악. 쉽게 말해 마해영의 LG 편파 버전이다. 거기에 본인의 커리어를 칭찬하느라 해설시간을 허비해서 그 수준은 심각했다. 결국 분노한 삼성 라이온즈 팬들이 마해영만 자르지 말고 진필중도 자르라고 워너B 게시판을 초토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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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현장
SPOTV 유튜브 채널에 XTM 해설이 나오면 마찬가지 반응인데, 모두들 분노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20억 먹은 먹튀인데 저 같아도 편파해설 하지요.'''라고 비꼬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똑같이 편파해설을 한 마해영 전 해설위원은 완전히 퇴출되었으나, 진필중은 2015년까지 해설위원을 했다.

5. 지도자 2기


2015시즌 후 염종석의 사퇴로 공석이 된 롯데 자이언츠의 드림팀(육성군, 3군) 투수코치로 선임됐다. 야구 팬들은 진필중의 해설을 안 듣게 됐다며 환호하는 중. 공교롭게도 염종석 전 코치는 진필중이 해설위원으로 있던 SPOTV에서 해설을 하게 됐다.
2016년 8월 18일 코치진 개편으로 퓨처스(2군) 불펜투수로 올라왔다. 이 날 개편으로 크리스 옥스프링이 2군 코치에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오고, 주형광이 1군 투수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했다.
이후엔 양상문 체제로 재계약을 하지 않고 현장에 물려났으며 2019년 1월 7일부터 광진구 <Closer 35> 피칭트레이닝 센터로 오픈을 하였다고 한다. 블로그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5
OB 베어스
36
109⅓
6
2
2
0
3.21
112
40
50
1996
32
191
13
10
4
0
3.11
186
47
69
1997
26
130⅔
7
12
0
0
3.72
152
43
72
1998
'''61'''
(5위)
158⅓
8
6
'''19'''
(5위)
0
'''2.33'''
(4위)
135
47
100
1999
두산 베어스
'''73'''
(3위)
114
'''16'''
(4위)
6
'''36'''
(2위)
0
2.37
84
41
114
2000
'''59'''
(5위)
73
5
5
'''42'''
(1위)
0
2.34
64
25
61
2001
51
89⅓
9
6
'''23'''
(1위[14])
0
3.22
87
41
88
2002
54
62⅓
4
5
'''31'''
(1위)
0
3.47
60
19
5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3
KIA 타이거즈
46
64⅓
4
4
'''19'''
(5위)
0
3.08
64
24
7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4
LG 트윈스
34
32⅔
0
4
15
0
5.23
49
13
23
2005
13
51
3
7
0
0
5.82
58
28
27
2006
25
43⅓
0
3
0
2
3.95
54
15
18
2007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히어로즈
1군 기록 없음
<color=#373a3c> '''KBO 통산'''
(12시즌)
510
1119⅓
75
70
'''191'''
(6위)
2
3.20
1105
383
751

7. 관련 문서


[1] 그나마도 임창용2000년에 안식년을 갖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선발로 전향했었다.[2] 1998년 4월 29일 한화전에서 선발 김상진이 1회 첫 타자 강석천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부상으로 강판하자 뒤이어 진필중이 등판해 9이닝 동안 78구를 던져 3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둔 경기. 즉 실질적으로는 무실점으로 27아웃을 잡아냈으니 완봉인데, 선발 투수가 아니었던 바람에 완봉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 선발투수 예고제 시행 이후 선발 투수가 첫 타자만을 상대하고 내려간 경기는 이 경기가 최초였으며 때문에 위장오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당시 진필중은 불과 며칠 전인 4월 26~27일 2연투를 한 상황이었다.[3] 이해 구원왕이었던 임창용보다도 많은 이닝을 던졌다. 분명 시즌을 불펜으로 시작했는데 5~6월에 땜빵으로 2경기, 7월에 로테이션으로 3경기를 선발로 나와 1완봉을 거뒀고, 심지어는 구원으로 등판해 완봉을 한 경기[2]가 있었다(...)[4]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다 세이브 포인트가 1998년 사사키 카즈히로의 46SP다. 이건 정말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작 1개 차로 구원왕에서 밀린 임창용도..[5] 원래 1950~1960년대에 뛰었던 투수 Stu Miller에 대해 동료 투수 Milt Pappas가 한 얘기이다.[6] 참고로 이 시절 KIA 단장이 정재공이었는데, 그가 영입한 유명 선수만 봐도 이강철(트레이드), 박재홍(트레이드), 진필중(트레이드), 최향남(FA), 조규제(FA), 마해영(FA), 심재학(트레이드)인데 이 선수들 중 이강철을 빼면 하나같이 폭망했다. 이 선수들을 데려오겠다고 유망주인 정성훈을 날리고, 외야 수비 하나는 최고였던 김창희, 중심 타자로 가치가 있는 신동주, 쓸 만한 중간계투 박진철을 날렸고, 이 선수들에게 FA, 고액 연봉, 트레이드 머니로 쓴 돈만해도 상당하다. 여러모로 돈이 아까웠다.[7] 겉으로는 준수해보일지 몰라도 숱한 분식회계와 전반기에만 8블론세이브이라는 불쇼를 펼치면서 후반기 KIA는 사실상 이강철-신용운에 의존하는 게임을 해야만 했다.[8] 이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선수는 바로 두산에서 한솥밥을 먹던 후배인 심정수였다.[9] 여담으로 이날 상대 팀 선발이었던 정민태는 패전을 면하면서 연승을 이어갈 수 있었다.[10] 이후 박명환이 2006년 LG와 4년 40억 원에 계약하며 투수 FA 최고액 기록은 내줬으나, 불펜투수로 한정할 경우 2011년 정대현이 롯데와 4년 36억에 계약하기 전까지 역대 불펜투수 FA 최고액 기록을 8년동안 유지하고 있었다.[11] 그 해 6월 4일 잠실 KIA전 9회초 1:2로 앞선 상황에서는 당시 1년차 신인이던 김주형에게 데뷔 첫 홈런이자 동점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12] 우규민이 1점대 방어율을 찍고 김민기와 경헌호까지 3점대 방어율을 찍었다.[13] 2군 6경기 6⅔이닝 평균자책점 '''8.10'''.[14] 세이브 숫자로는 1위였으나, 당시 세이브왕의 기준은 세이브+승수의 개념인 세이브포인트 제도였고, 신윤호에 비해 승수가 밀리면서 세이브 1위에도 세이브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