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수흥은 1905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유학자 설산(雪山) 이일영(李日榮)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던 이일영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이일영은 동문수학한 채상덕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채상덕은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단체 의군부 총재로 활약했다. 이일영은 두번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재혼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일영은 이때문에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세번째 결혼을 갈망하던 중 19살 되는 처녀와 장가를 들어 7년만에 금지옥엽같은 아들을 얻었다. 이에 대해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이 일화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일영과 아내 이씨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일영의 친척들은 이씨의 가문이 비천하다고 여겨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이씨 역시 남편이 나이를 속인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수흥은 이런 상황에서도 고향에서 꿋꿋이 성장하여 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학업에 충실했다. 그러던 1915년, 부친은 어머니 이씨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30여 석 추수한 것을 팔아서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는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기려수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부친 일영은 결혼을 두 번 했지만 아들이 없고 다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었는데 또 상처를 하게 되었다. 일영은 다시 부인을 얻으려고 했으나 이미 나이가 50에 가까웠으므로 마땅한 상대를 구하지 못하던 중, 원주의 이씨댁에 규수가 있음을 듣고 청혼을 하니, 이씨댁에서 신랑될 사람을 보기를 원하므로 일영은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어 선을 보였다. 결국 혼담이 이루어져 결혼을 하려 갈 때에는 흰머리에 물을 들이고 갔다고 한다. 결혼을 하여 10년이 지나 아들을 낳으니 이 아이가 바로 수흥으로 늦게서야 낳은 귀한 아들이라 심히 애지중지했으나 친척들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이일영의 둘째 사위 송범수가 후에 이수흥의 일로 일본 경찰에게 심문을 받을 때 증언한 바에 따르면, 부친 이일영은 처가 정부를 만들어 가출하고 행방불명이 되었고 재산을 모조리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첫째 사위 강긍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일영은 재산을 다소 소유하고 있었지만 처 이씨가 정부를 사귀고 재산을 모조리 빼돌린 채 정부와 함께 야반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이일영은 강긍수의 집에 1년간 기숙했고 이수흥은 그 사이에 서울에서 일본인의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행방불명되었으며, 그 후엔 송범수가 이일영을 부양했지만 이일영은 절망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근심 속에 살아가다가 1926년 8월 28일에 사망했다고 한다.그 후 일영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씨 부인은 그녀의 남편이 늙었음을 매양 불만스럽게 여기던 중, 서울로 이사를 한 후로는 가정 생활이 더욱 원만하지 못하니, 이때 수흥의 나이 14세였다. 처음 수흥은 비록 내 어머니가 비천하기는 하나, 내 스스로가 몸과 마음을 닦아 행실을 바르게 한다면 친척들도 결국 잘 대하여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항상 자신의 입장을 격려하여 왔으나 마침내 어머니가 다른 데로 개가를 하고 말았다.
2.2. 불교에 귀의하다
이수흥은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고 정부와 함께 야반도주한 뒤 안성 일촌에 살고 있는 큰 누이 집에 약 1년간 기숙했고, 서울에 가서 인쇄소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가출해 3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다. <기려수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17일자 기사에서도 이수흥이 승려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수흥은 탄식을 하며 내 기구한 운명이 이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일생을 보내리라 결심하고 원적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절로 찾아와 수흥을 얼싸안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내 죄이니 함께 산을 내려가도록 하자. 네가 결혼을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또 집이라도 처분한다면 수십만 금은 될 것이니 장사를 하고 싶으면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해도 좋다."하고 간곡하게 당부하니 수흥은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응낙하고 부친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이수흥은 부친의 간곡한 만류에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려수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이수흥은) 1920년 이천군 백사면 원적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2년 동안 중노릇을 하였는데
그러나 수흥은 가슴에 못이 박혀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매사의 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노량진에 있는 어느 집에서 고용살이도 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와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 마침내 한강철교를 찾아 물로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순시 중이던 경관이 발견하고 즉시 구조하여 자살에 실패하고 말았다.
2.3. 독립운동가의 길
이렇듯 자신의 삶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던 이수흥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진통신사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그는 일터에서 일본인 주인의 차별대우를 받고 이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또한 그는 1906년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가담한 적이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리라 맹세하고 19세가 되던 해 봄에 경성을 출발해 도보로 만주에 가서 서간도에서 독립투쟁을 지휘하던 아버지의 친구 채상덕을 찾아갔다. 훗날 그는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채상덕은 의병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의 외아들인 이수흥을 친아들처럼 돌봐줬고, 이수흥도 채상덕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채상덕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이수흥의 다짐을 듣고 김좌진 장군이 사관 양성을 위해 세운 신명학교에 입학시켰다. 신명학교를 졸업한 이수흥은 채상덕을 따라 참의부에 소속되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총독부가 조선인 밀정을 통해 집안령 고마령에서 참의부 수뇌부가 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들어가면서 위기가 닥쳤다. 1925년 3월 15일, 고마령에서 회의에 참석한 참의부 사령관 최석순을 비롯한 간부와 부대원 42명이 갑작스런 일본 경찰의 기습으로 살해되었다. 이때 이수흥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겨우 빠져나와 채상덕을 찾아가 사건의 경위를 알렸다.일본의 조선 민족에 대한 정치는 너무 가혹하고, 그 때문에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유는 박탈당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삼천리 강토도 빼앗긴 것이 분하므로 이를 탈환하고 자유의 천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민족적 양심에서 마침내 전술한 바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5년 6월 11일, 일제는 만주 군벌 장쭤린과 비밀 교섭을 벌여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운동가의 무장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이 명시된 미쓰야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상황이 이와 같이 악화되자, 채상덕은 병원에서 한달간 입원한 뒤 퇴원한 이수흥을 불러서 권총 2자루가 통화현의 김운용의 집에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서 사용하라고 한 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수흥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수흥은 스승이자 아버지로 모셨던 의군부 총재 채상덕이 자살하자 명당을 택해 그를 안장했다. 그 후 채상덕의 유족들을 도와 생계를 보살펴주며 얼마 동안 몸을 추스렸다. 이후 채상덕의 1년상을 끝낸 1926년 4월 중순, 이수흥은 통화현의 김운용의 집에서 권총 2자루와 탄환 980발을 찾았다. 그리고 1926년 5월 중순경, 그는 조선으로 들어가 스승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으면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
이때 이수흥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였으므로 대장의 명령 없이 단독행동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중대장 김모를 찾아가 간청했다. 김모의 허락을 받아낸 이수흥은 1926년 봄 환인현을 떠나 국경을 경계하는 강안 경관들의 엄밀한 감시를 피하고 평북 어느 산골에 도착하여 산중에서 하룻 밤을 보냈다. 그러던 중 산중에서 모젤 권총과 장총을 맨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 부사 권영태(權永泰)와 부하 4명을 만났다. 이수흥은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구용동이라는 농가에서 이틀 동안 묵었다. 권영태는 그에게 함께 활동할 것을 여러차례 권유했지만, 이수흥은 이를 거부하고 다시 그곳을 떠나 도보로 20일간 걸어서 평북 운산군에 이르렀고, 다시 3주야를 걸어 맹주리에 도착한 후 이틀을 쉬고 평양까지 간 뒤 사흘 동안 산천을 구경하며 휴식을 취했다. 이후 그는 도보로 남하했다.
이수흥은 의열투쟁을 감행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보흐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할 계획을 세우고 1926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의 김상열(金商烈)에 들어갔다. 그는 김상열에게 모젤식 권총을 들이대면 자신을 조선독립 관원으로 소개하며 군자금 5백원을 제공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김상열이 끝까지 자신이 돈이 없다고 잡아떼는 데다 바깥이 소란스럽자, 그는 일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지면을 향해 소지한 권총을 한 발 발포하고 그대로 서울로 도주해 7월 10일에 도착했다. 그는 이때부터 의열 활동을 개시한다.
2.4. 의열 활동
이수흥은 서울에 도착한 후 만주로 떠날 당시 총독부 급사로 일했던 친구 유남수를 찾았으나, 친구가 일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초 유남수의 도움을 받아 총독을 살해하려 했지만 친구가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걸 알게 되자 크게 낙담했다. 그는 일단 이천으로 가서 친구를 만나보기로 하고 이천으로 향하던 중 7월 10일 밤 10시 50분 경 동소문 파출소 순사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결 직감했다. 이수홍은 이상함을 느끼고 즉시 복부에 숨겨 가지고 있던 권총을 살펴보니 총신의 2, 3자 가량 옷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에 그는 순사가 그것을 보고 자신을 미행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수흥은 일단 어두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술집까지 가서 권총을 꺼내어 오른손에 휴대하고 뒤를 보았다. 이때 순사는 파출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이수흥은 순사가 본서에 자신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러가는 거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뒤를 쫓아가서 파출소의 입구의 밖에 서서 "야!"라고 소리쳤다. 이에 순사가 뒤를 돌아보고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독립단!"이라고 외치고는 그 순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순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포복을 하면서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에 이수흥은 6발을 순사를 향해 발포한 뒤 북한산으로 도피해 산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산 속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 그는 우이동으로 내려가 성명 불명의 조선인 집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밤에 도선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 후 도선장을 건너 당천군으로 들어가 당천의 구읍을 지나서 조금 간 곳에 있는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7월 13일 오후 6시경 이천 읍내의 유남수의 집에 도착했다. 이후 그곳에서 2달간 잠적한 이수흥은 9월 4일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에게 자신과 함께 독립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두 형제는 이에 기꺼이 가담하겠다고 밝혔고, 이수흥은 9월 7일에 유택수와 함께 안성의 부자 박승륙(朴承六)을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받고자 했다.
이수흥은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은 자선사업에 노력하고 있고, 동생 박형병(朴衡秉)은 사회주의자이며, 막내 박숭병(朴崇秉)은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박승륙이 자신의 제안에 동의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9월 7일 오후 3시 박승륙의 집에 도착한 이수흥은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과 만났다. 하지만 그 집에는 마침 약 20명이 넘는 인부가 있어서 건물을 건축하느라 분주했다. 이에 이수흥은 기회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박태병에게 "우리는 동아일보 기자인데, 그대에게 밀담을 할 일이 있어서 왔다. 그런데 바쁜 모양이니 후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이후 이수흥은 유택수와 함께 동네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중국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9월 7일 오후 7시 30분경, 두 사람은 다시 그 집을 방문하고 인부를 통해 박태병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박태병은 두 사람을 사랑방으로 모시게 했는데, 사랑방에는 4~5명의 손님이 있었고, 또 그 부근에 인부도 있었다. 이에 이수흥은 박태병에게 "나는 밀담이 있으니 조용히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고, 박태병은 사랑방을 나와서 건축 중인 건물 옆으로 이수흥 등을 안내했다. 이수흥은 박태병에게 말했다.
그러자 박태병은 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어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으므로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는 안방으로 달아났다. 이수흥은 그를 살려두었다가는 반드시 자신들의 계획을 누설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일반 부호들이 자신들을 냉대하는 것에 대한 징계를 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허리에 찬 브라우닝식 권총을 꺼내어 박태병의 뒤를 쫓아갔다. 박태병은 동문의 오른쪽 안에 숨어서 쪼그리고 앉았다. 이에 이수흥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우리는 독립단 참의부원이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독립운동자금이 없어서 곤난을 받고 있다. 귀하의 명성은 전부터 듣고 알고 있으므로 그 명성을 존경하고 귀하의 원조를 받으려고 방문했으니, 웅분의 협조를 바란다.
그리고는 권총을 그의 흉부에 겨누고 2발을 쏴 죽였다. 이때 다수의 인부가 권총 소리를 듣고 곤봉을 휴대하고 달려와 이수흥을 포위하고 체포하려 하자, 이수흥은 도주로를 만들기 위해 인부를 향해 권총 2발을 발사해 인부 2명을 부상입히고, 다수의 인부가 겁에 질려 달아나자 그 집을 도망쳣다. 신고를 받은 안청 경찰서는 수십 명의 경관을 파견해 수사를 전개했다.귀하는 한일합병 당시는 한국의 귀한 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진충보국하는 성심을 가지고 우리 조선 민족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무거운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버리고 탄알이 비오듯 하는 사이를 달려가면서 조선 민족을 위하여 그 독립을 모색하는 우리들을 냉안시하고, 더욱이 순수한 우리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망국 분자의 한 사람이다. 우리 민족을 대신하여 천벌을 가한다.
그러나 이수흥은 북방의 산속으로 도주한 뒤 산을 따라 내려가 안성군을 통과해 9월 8일 정오경에 매부 강긍주의 집에 숨었다. 이후 유남수의 집에 들어가 몸을 숨긴 그는 다시 거사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 부내의 인사동 조선 극장 앞에서 유리상을 경영하는 이해성을 방문하고 그 집에서 1박한 뒤, 9월 14일경 그에게 10원을 받고 그것으로 여비를 하여서 도보로 유택수의 집으로 가서 9월 15일 오후 12시 30분경에 유택수의 집에 도착하여 그 집에서 잠자코 지냈다.
이수흥은 1926년 9월 18일 오후 3시경 여주 식산회사 사장 이민웅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했다. 이민웅이 4원을 내자, 이수흥은 격분했다.
그러자 이민웅은 자신도 조선 민족을 위해 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다수의 빈민을 구제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수흥은 감탄하며 비록 방법은 달라도 모두 조선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더욱 노력해달라고 말하고 그대로 아무것도 받지 않고 돌아왔다. 이후 이수홍은 이민웅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해봤는데, 알고보니 빈민 구제라는 것은 거짓말이며 영리만을 위한 회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이수홍은 매우 회가 나 식산주시회사를 습격해 금고의 돈을 모두 탈취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기 위해 19일 동 회사 앞으로 갔지만 늦은 시간이어서 일단 물러났다.나는 거지가 아니다.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한다면 할 수 없으나 100만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소액의 돈을 내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다음날인 9월 20일, 그는 식산 주식회사 앞으로 다시 가보니 1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에 이수흥은 혼자서 돈을 탈취하려고 해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뛰어나가서 주재소에 보고하여 순사가 총을 가지고 온다면 도저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주재소로 가서 순사를 사살한 뒤 식산회사를 습격하면 몇 사람이 있더라도 용이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가 주재소에 가보니 순사 2명이 있었다. 그는 권총을 순사를 향해 발사하려 했지만 불발로 끝나고, 다시 한 발을 발사하려고 했지만 또 불발이 되었다. 이에 탄환을 갈아 끼우고 있을 때 2명의 순사가 도주했다.
할 수 없이 식산회사로 갔더니 이미 시간이 경과하여 모두 퇴근했다. 이에 그는 부득이 일본 정부의 말단기관인 면사무소를 습격해 징수한 세금 등의 공금을 탈취해 잠시 해외로 갔다가 잠잠해질 때를 기다려서 재차 조선으로 들어와서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그가 면사무소로 가던 중 일본인 보통학교장의 처가 길을 가로막아 방해했다. 이에 그는 '큰 일을 하려는데 여자가 앞에 서 있음은 불길하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를 향해 총 2발을 위협 사격해 도망치게 했다. 그 후 바로 백사면사무소로 가보니 송천의(宋天義)라는 이름의 조선 면서기가 홀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송천의를 협박했다.
송천의는 이수흥을 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이곳 저곳을 안내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도주하면서 강도가 나타났다고 소리질렀다. 이수흥은 2천만 동포가 자유롭게 해방될 것을기원하고 몸을 희생하고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강도라고 부르는 것에 격분해 도망치는 송천의의 뒤에서 소지하고 있는 권총으로 2발을 발포하여 즉사하게 했다. 이후 이천읍으로 돌아가서 유남수 집에 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유남수에게 이야기한 후 그날 밤 안성현의 강한주의 집으로 가서 숙박했다.가지고 있는 공금 전부를 제공하라. 나는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군자금에 필요하다.
2.5. 장렬한 최후
이수흥은 앞으로 어떻게 할 지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상복을 입고 서울로 올라가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해 발인을 마친 뒤 6촌형의 집에 투숙했다가 6촌 형이 자신을 이천 경찰서에 밀고하는 바람에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의젓했다. 명성과 독서, 감상록 집필로 일관하면서 담담히 집행을 기다렸고, 재판 과정에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담담하게 밝히면서 추호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1928년 4월 24일, 그는 옥중에서 담당 변호사 이종성(李宗聖)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나 개인의 생각으로 특무정사의 직도 사임하고 저 안중근과 같이 행동을 조선에서 할 생각으로 혼자 온 것이다.
1928년 7월 10일, 이수홍과 유택수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유남수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수흥은 사형을 언도받고도 공소를 포기해 사형 당하기를 자청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1928년 7월 15일자 기사는 이수흥이 사형을 언도받고도 태연자약해 마치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처럼 보였다며, 법정이 생긴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공소하지 않은 사람은 강우규, 허위, 그리고 이수흥 뿐이라고 밝혔다. 이후 1929년 2월 27일, 이수흥은 자신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찾아온 친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엎드려 우옵니다.
못난 제가 이미 한 일에 대해선 당연히 할일을 한 것뿐이니 변명이 필요없습니다. 혹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해도 이 오탁한 세상에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은 치욕일 뿐이니, 차라리 단두대 위에 피를 뿌려 영혼이나마 깨끗이 보존할 생각입니다. 제 일에 대한 구차한 변명은 제 스스로가 원하는 바 아니오나, 그러나 택수와 남수 두 형제가 공연히 욕을 당하는 것이 실로 민망하니, 이들을 불쌍히 여겨 극력 변호하여준다면 구천으로 간 혼이라도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저의 마지막 구차한 소원을 저버리지 마시고 보살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죽은 혼이라도 반드시 깊은 은혜에 보답할 생각입니다.
그날 오후, 이수흥은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 술 2잔을 마신 뒤 간수가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장시간 자신의 가슴에 품은 민족주의적 연설을 열렬히 한 후 만세 삼창을 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4세. 그의 유해는 매부 강긍주에 의해 수습되어 안성군 일죽면에 매장되었다가 해방 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해 주시기 바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수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