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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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MLB 최초의 1억불 선수이자 금지약물 복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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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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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94마일(151km/h) 싱커[1]
국내에는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LA 다저스의 1선발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메이저리그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 그의 하드싱커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강력한 스터프 중 하나이다. 또한 1997년~1998년 플로리다 말린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으며 말린스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 등 90년대 후반 대표적인 우승청부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 덕분에 메이저리그 최초로 1억 달러의 벽을 넘긴 거대 계약을 따내는 등, 여러 모로 남긴 게 많은 선수.
2. 선수 시절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대학도 조지아 공대를 나온 후, 19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4번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지명됐으며, 드래프트된 해 9월 3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홈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러 5이닝 2실점으로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뒀다.
전성기 시절의 케빈 브라운 투구 90마일 중후반때의 패스트볼과 무브먼트가 좋은 90마일 초중반때의 싱커가 위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메이저리그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해는 3년 뒤인 1989년으로 이 때 성적은 12승 9패 평균자책 3.35를 기록해 신인왕 투표에서 6위를 기록했다. 케빈 브라운의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은 국내에 잘 안 알려졌으나 최다 투구이닝(265.2이닝) 및 최다승(21승)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었던 1992년 기록했다. 94년 FA로 풀리기 전까지 6시즌 간 평균 13승 10패, 평균자책 3.80, 평균 투구이닝 208이닝을 기록했으며 이 때부터 피홈런이 극히 적어 평균 14피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FA로 풀리기 전 마지막해인 94년 성적이 평균자책 4.82, 170.0이닝 218피안타로 막장스러워서인지 레인저스는 케빈 브라운을 잡지 않았고, 그는 전년과 똑같은 연봉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1년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동부로 향한 1995년에 172.1이닝 평균자책 3.60으로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오프시즌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해 내셔널리그로 이적하는데...
'''이 때부터 그의 전설이 시작된다.'''
1996년, 그는 선발투수 1점대 ERA라는 대기록을 수립한다. 97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달성한 선발 1점대 ERA 시즌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케빈 브라운이 1년 먼저 이 기록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잘 안 알려져 있는 편. 이 때 233.0이닝을 던져 ERA '''1.89''', 17승 11패를 기록했다. 피홈런은 단 8개. 그러나 24승 8패 ERA 2.94를 기록한 존 스몰츠에게 밀려 사이 영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안습. 아무래도 그라운드볼 피칭을 주로 하다보니 탈삼진 수가 사이영 위너 기준으로 심하게 적은 159개에 머물렀고 승수도 적은 편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사이영상 투표 기자단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 것 같다. [2]
1997년에는 ALCS에서 1차전 매덕스, 6차전 글래빈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며 당시 신생팀이었던 플로리다 말린스를 월드시리즈까지 진출시키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다. 다만 명성에 비해 월드시리즈에서의 피칭은 11.0이닝 10자책 무승 2패로 매우 좋지 않았지만, 애초 그가 없었으면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테니.
플로리다 말린스의 우승 뒤 파이어세일(...)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1:3 트레이드돼 이적한다. 시즌 성적 역시 18승 7패 평균자책 2.38, 투구이닝 257이닝으로 훌륭했다.[3] ALDS 1차전에서 랜디 존슨과 최고의 투수전[4] 을 벌여 승리, 뒤이어 ALCS 2차전에서는 톰 글래빈과 리턴매치를 벌여 11K 완봉승을 따내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진출시킨다. 오오 간지. 다만 이 때 월드시리즈 상대였던 뉴욕 양키스의 전력이 워낙 탄탄해서 월드시리즈에서는 4:0으로 스윕당하고 만다.(이 98년부터 99, 00년까지 양키스는 WS를 3연패하고 01년에야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의 디백스에 가로막힌다.)
오프시즌 중 애초 랜디 존슨을 노렸으나 빅 유닛이 피닉스 근처에 집을 지었다는 할 말이 없는 이유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 뺏긴 LA 다저스는 대신 케빈 브라운에게 7년 '''1억 5백만 달러'''라는 계약을 안긴다. 메이저리그 최초로 1억 달러의 벽을 넘긴 거대 계약이라 당시 미국은 물론 한국까지 들썩거리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의 연봉 액수가 뻥튀기되어가는 시발점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한동안 FA 투수에게 거액의 연봉을 선사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에이전트는 보라스
다만 이 때 나이가 이미 34세여서 노장 투수에게 너무 큰 액수를 지출했다는 평가는 당시부터 있었다.
최훈도 '''이해할 수 없는 계약이라고 깠다.'''
그러나 1999년~2000년 2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기대대로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기대했던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이건 당시 다저스의 실패한 돈질 때문이라...
2001년 시즌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날려먹고 2002년 63.2이닝 평균자책 4.81에 그치면서 우려가 현실이 되나 했지만 2003년 시즌 마지막으로 부활해 211.0이닝 14승 9패 평균자책 2.39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 그러나 거대 계약이 부담이 됐던 LA 다저스는 당시 우승을 위해 대책없이 선수들을 수집하고 있던 뉴욕 양키스에 케빈 브라운을 1:3 트레이드로 넘겼고, 이미 나이가 마흔줄이었던 그는 양키스에서 2년 동안 14승 13패만을 기록한 뒤 메이저리그를 떠난다. 보스턴의 리버스 스윕으로 유명한 2004 ALCS 마지막 7차전에서 선발등판했으나 1.1이닝 5자책으로 장렬히 산화하면서 보스턴의 리버스 스윕에 한몫하기도 했다.
피칭 스타일은 교과서적인 하이브리드 싱커볼러[5] 다. 90마일 중반대의 묵직하게 깔리는 하드싱커를 주무기로 했으며, 이 때문에 피홈런 허용이 매우 적다. 1996년~1997년에 걸쳐 118이닝 무피홈런을 기록한 적도 있다. NL로 옮긴 뒤로는 9이닝당 탈삼진율이 8~9를 기록할 정도로 탈삼진 숫자도 매우 많아졌다. 단 브랜든 웹, 왕젠민, 데릭 로우 같은 일반적인 싱커볼러들과 브라운이 다른 점은 전자는100구를 던지면 98구를 싱커를 던진다고 할정도로 의존도가 높지만 브라운은 엄연히 98마일의 포심을 주로 던지던 선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싱커는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사실상 스플리터 각도로 떨어지는 공이라 땅볼보다 삼진을 유도해내는 구질이었다.(당장 위의 움짤을 봐도 알수 있다) 다른 싱커볼러들과는 다른 높은 탈삼진율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부상 위험이 매우 크다고 알려진 싱커볼러이면서도 매우 많은 이닝을 꾸준히 던진 워크호스이기도 하다. 19시즌 중 200이닝 이상을 투구한 시즌이 9시즌이며 1991년부터, 단축시즌인 1994~95시즌을 제외하고 10년 연속 200이닝을 기록하기도 했다. 210.2이닝의 1991년을 제외하면 모두 230+ 이닝이다. 총 투구이닝 역시 19시즌 3256.1이닝으로 충분히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
다만 박찬호가 전성기를 달리며 메이저리그가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2001년 시즌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2003년 시즌만 밥값을 해 버린 통에 국내엔 인저리프론으로 낙인찍혀 있다. 안습이라면 안습. 더불어 '''싱커는 위험한 볼'''이라는 고정관념도 굳어지고 말았고...그러나 20대 후반~30대 초반에는 많은 이닝을 던져 준 투수였으며, 2001년 당시 36세였던 나이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부상이 싱커 때문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격은 굉장히 승부욕이 강한 파이터 타입이라고 한다. 말년을 보낸 뉴욕 양키즈에서 강판된 뒤 제 성격을 못 이기고 덕아웃에서 주먹질을 하다가 자기 밥줄인 '''오른쪽 팔''' 부상을 당해 큰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보통 투수는 덕아웃에서 난동을 부리더라도 밥줄을 보호하기 위해 투구하는 팔과 반대쪽 팔을 사용하는 법인데...
말년엔 미첼 리포트에서 약물복용 사실까지 드러나는 등,[6] , 이뤄낸 업적에 비해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꽤나 초라했던 셈.[7]
3. 은퇴 후
2011년 HoF 첫해 투표에서도 5% 미만 지지율로 탈락했다. 성적만 보면 승수는 좀 적어도 WAR[8] 등 각종 기록을 보면 입성하긴 좀 부족할지는 몰라도 광탈할 기록은 아니다. 문제는 우선 동시대에 대투수들이 너무 많았다. 커트 실링과 마이크 무시나가 밀려날 정도니까. 그 이후 몇년간 호프집에 명함 내밀 선발투수는 로이 할러데이 외에 전무하다. 가뜩이나 이럴진대 약물 복용까지 드러났으니 득표율이 더 깎일 수밖에.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로서 오클랜드의 밥 웰치, 다저스의 오렐 허샤이저 등도 싱커를 잘 던지기로 유명했지만, 역시 명예의 전당에서 탈락했다. 이는 명예의 전당이 여전히 강속구를 앞세워 타자를 압도하고 삼진을 뽑아내는 정통파 투수들를 선호하는 반면, 변화구로 범타를 유도하는 데 능한 기교파 투수들에게는 여전히 너그럽지 않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1] 그의 공을 캐치하는 흑인 포수는 수비형 포수로 잘 알려졌던 찰스 존슨이다.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LA 다저스로 이적하여 박찬호의 공을 받기도 했다.[2] 그의 war은 8.0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2위였다. 스몰츠는 7.3, 1위는 펫 헨트겐의 8.5.[3] 257이닝을 던지면서 257삼진을 잡아냈는데, 싱커볼러중 최고의 탈삼진율을 기록했다.[4] '''8이닝 16K 무실점''' 랜디 존슨은 8이닝 9K 2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5] 뭐 말년엔 하이브리드 칭호가 떨어져나갔지만.[6] 당대의 선수들처럼 성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저스 시절 부상회복에 좋다는 동료 폴 로두카의 꾐에 넘어가서이다.[7] 게다가 약을 빨고도 오히려 부상은 심해졌고 성적도 떨어졌다.(...) 뭐 그래도 2003년에 성적이 반짝 오르는 덕분에 약값은 했지만...[8] 통산 WAR가 67.8로 WAR 69로 호프집에 들어간 존 스몰츠와 크게 차이가 안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