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
1. 개요
李施愛
(? ~ 1467)
조선의 무관이자 이시애의 난의 주도자. 이인화의 아들, 이원경(李原景)[1] 의 손자.
함경도 길주 사람으로 1458년 경흥진 병마절제사, 1460년 경흥부사, 1461년 첨지중추원사, 1463년 판회령부윤을 지냈다. 호패법을 강화해 지방민의 이주를 시키는 것에 북도의 사람들이 불만을 품자 호족들을 선동한 후 1467년 이시합과 함께 반란을 모의해 절도사를 자칭하면서 강효문을 추격해 때려 죽이고 여러 관리들을 죽였다.
황기곤, 신면 등을 죽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구성군 이준을 보내 이시애를 토벌하게 했으며 이시애는 강효문이 황기곤, 신숙주, 한명회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서신을 조선 조정에 보냈다. 6월 24일 강순이 나무를 벌채해 안에 목채, 밖에 녹각성을 설치하자 이시애는 1만 6천여 명을 이끌고 포위해 강순의 군사를 거의 무너뜨렸지만 강순의 군사가 분발하면서 무너뜨리지 못했다.
8월 4일 거산역동에서 구성군 이준이 이끄는 군사가 공격하자 죽을 힘을 다해 막았지만 어유소가 좌측으로 돌격해 무너뜨려 틈을 열자 다른 장수들도 돌격해 이시애의 군사는 무너졌다. 이시애는 도망갔고 이준의 군사가 마운령을 넘어 영제원에서 진을 치자 이시애는 단천에 주둔했다. 결국 허유례의 계책으로 부하인 이주, 이운로 등에게 유인되어 이시합과 함께 붙잡혔다가 8월 12일 거열형을 당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