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한명회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의 영의정'''
'''《第 30ㆍ37 代》'''
'''太宗 15年~
成宗 18年'''

'''제30대'''
'''1466.10.19~
1467.4.6'''

'''제37대'''
'''1469.1.23~
1469.8.22'''












'''조선 예종, 성종의 장인 | 장순왕후, 공혜왕후의 부친'''
'''상당부원군 한명회
上黨府院君 韓明澮'''

'''군호'''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시호'''
충성(忠成)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청주(淸州)
'''이름'''
명회(明澮)
''''''
자준(子濬)
''''''
압구(狎鷗), 압구정(狎鷗亭), 사우당(四友堂)
'''생부'''
한기
'''생모'''
여주 이씨(驪州 李氏)
'''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
'''자녀'''
9남 6녀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생몰
기간
'''
'''음력'''
1415년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양력'''
1415년 11월 26일 ~ 1487년 11월 28일
'''비고'''
세조 집권 1등 정난공신
좌익 1등 공신
익대 1등 공신
좌리 1등 공신
영의정 역임
연산군 때 부관참시
중종 때 사후死後복권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인물됨과 일화
4. 가족관계
5. 평가
6. 기타
7.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권신이자 정치가.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狎鷗)[1] 시호는 충성공(忠成公), 작위명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2]이며 수양대군으로부터 '나의 장량이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3] 아버지가 되어 두 왕의 장인이라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손자 한경침(韓景琛)은 성종의 서녀인 공신옹주(恭愼翁主)와 혼인했다. 그야말로 조선 세조~성종 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 생애


대표적인 칠삭둥이 인물. 7개월 만에[4] 태어났으며 배 위에 별 모양의 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칠삭둥이답게 사람의 형체마저 갖추지 못해 부모는 아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기에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유모로 내정되어 있던 여종이 몰래 이불을 둘둘 말아 따뜻한 방에 뒀다. 놀랍게도 아기는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사람의 모양새를 다 갖춘 뒤에야 비로소 유모는 집안 어른들에게 한명회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조산하여 태어난 아기들은 일찍 죽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컸다고 한다.
집안은 명문 집안인데 7대조 한강(韓康), 6대조 한사기(韓謝奇), 5대조 한악(韓渥), 고조 할아버지 한공의(韓公義), 증조 할아버지 한수(韓脩) 등은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된 고려 말기 매우 유력한 정치적 인물들이었다. 특히 한수는 고려 공민왕 대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였다. 학문 실력 및 과거 급제 연령으로 치자면 목은 이색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색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인지도가 덜한 것은 유감. 할아버지인 한상질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허락받은 사람이며 한상질의 동생이자 한명회의 종조부인 한상경은 개국공신에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사극에서 초년기에 별 볼일 없게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금수저 출신.
부모를 일찍 여의고 40살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곳곳의 명산을 둘러보기 위해 전국을 유람하느라 해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등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였고 아무래도 소위 말하는 공부머리와 잔머리가 따로 노는 인물이었는지 번번이 낙방했다. 결국 문종 2년인 1452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5] 개성에 있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았다. 이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서울 출신 사람들끼리 '송도계'(松都係)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말단직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단순한 거절 정도가 아니라 "경덕궁직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6] 그러나 세종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 때부터 친했던 권람의 추천으로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수양대군(세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참모가 되어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많은 깡패 무뢰배들을 포섭하고 홍달손을 비롯한 무장들을 끌여들었으며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안평대군 일파의 정보를 수집해서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일약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7] 또 수양대군이 무사들을 불러놓고 거사를 종용하자 무사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게 갈라져서 생각보다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수양대군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한명회가 "길가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지나도록 다 짓지 못합니다."라면서 결단을 촉구했고 홍윤성도 "군사를 내어 적을 치는데 가장 큰 문제가 결단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라고 거들었고 이에 수양대군이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다. 떠날 자는 떠나고 따를 자는 따라라."라고 외치고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는 세조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8]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별운검을 폐하여 사육신의 계획을 좌절시켜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9] 이런 지대한 공 때문에 세조는 그를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평가했다.[10] 이후 왕실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정승이 되면서 조선 최강의 권력자로서 권세를 휘둘렀다. 세조 사후 예종, 성종 초반까지 그 권세가 계속되었다.
한명회의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대간들이 한명회를 비판하지 못했고 사간원의 간원 1명이 한명회가 몸담고 있던 원상제 폐지를 권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대간들이 "너 미쳤냐? 원상제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데 그걸 왜 없애? 왜 네놈이 멋대로 한 일 때문에 우리까지 피봐야 하는 거냐고?"라고 몰아세웠고 대사간까지 "죽기 싫으면 당장 철회하라."고 협박했는데 이 과정이 공개되면서 사간원이 죄다 갈려버리는 사간원 입장에서 망신살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예종 때는 왕도 못 보는 실록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대신들의 비행을 적기가 두려워 이미 제출된 사초를 빼돌려 대신들의 허물을 감추는 식으로 수정하다가 들켜서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 케이스가 다른게 왕은 사초나 실록을 볼 수 없지만 대신들은 실록 편찬을 위한 기구가 구성될 때에 감독관으로 임명되어서 편찬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왕이 죽은 아버지의 잘못을 바꾸는 것을 방지하며 여러 사초의 내용들을 당시 국정에 흐름을 알고 있었던 대신들의 기억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 사관들 입장에서는 왕보다는 직접 사초를 확인할 수가 있는 대신들이 더 무서웠던 셈.
그러나 성종에게 시집보낸 막내딸 공혜왕후가 후사없이 요절하고[11] 성종이 장성하면서 한명회의 권세도 수그러진다. 특히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기 전에 성종의 부탁으로 정희왕후에게 "대비 마마께서 물러나시면 우리가 불안해서 술 한 잔도 못 한다니까요."라고 오버하는데 성종이 "그럼 날 못 믿는다는 거냐?"라고 정색하면서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대간의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 직에서 자진해 물러나 보통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와중에 생겼던 압구정 사건[12]으로 직첩이 거둬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쓸쓸하기는 해도 영화롭게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졌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부서진 채로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한명회의 사후는 비참했다. 이후 중종 때에 신원된다.
한명회는 정실부인 사이에 장남 한보(韓堡, 1447~1522)를 두었는데 한보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서 처형될 뻔했으나 살아남아 중종 때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한보의 장남인 한경기(韓景琦)는 젊은 나이에 여자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병에 걸려서 여성들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는 바람에[13] 한명회를 파조(派祖)로 하는 청주 한씨 충성공파 족보를 보면 한경기는 두명의 부인을 두었다. 종친인 학림군 이이(鶴林君 李頤)의 딸과 언양 김씨 김극장의 딸이다. 그리고 아들 협(勰)을 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김안국이 쓴 한경기의 묘지문을 보면 "아들 협은 정실인 두 부인에게서 낳은 게 아니라 측실을 통해 얻었다(其配曰先娶李氏 宗室鶴林君頤之女 後娶金氏 肅川府使克鏘之女 皆無子 只側室生一子曰勰)"라고 되어있다. 충성공파는 이 서자를 통해 현재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14]

3. 인물됨과 일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최강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인물이지만 사극에서는 세조의 장량(장자방)이라는 말 때문인지 참모 스타일의 캐릭터로 이 무렵을 다룬 사극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참모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보스형 정치가였다. 이는 영화 관상의 초반부에 수양대군의 세력을 지휘하는 모습에서 잘 표현하였다. 훈구파의 영수로 정국을 이끌었고 한명회의 도움으로 재상이 된 인재도 많았으며 도량도 컸다는 평가를 당대에 들었고 사재를 털어 성균관의 도서 및 시설 등 보충에 도움을 줘서 당시 선비들이 "비범하다." 평하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강했던 인물답게 통도 컸던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
야사에는 술자리에서 취한 나머지 '''세조의 팔을 꺾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신숙주를 도운 일화도 남아 있다. 세조가 먼저 신숙주의 팔을 잡아 비튼 후에 "경(卿)도 따라해 보라"고 하자 신숙주가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어찌나 세게 비틀었는지 세조가 비명을 크게 질렀을 때 동석하고 있던 세자(예종)가 심기가 뒤틀렸는지 신숙주를 쏘아보자 세조는 분위기상 세자에게 "나는 이러고 놀지만, 너는 이러고 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숙주는 에 취해도 조금만 깨면 을 읽는 습관이 있었는데[15] 연회가 끝나고 한명회가 신숙주의 하인에게 "오늘 들어가서 주인이 드러누우면 꼭 옆에 있는 촛대를 전부 치우거라."라고 당부했다. 신숙주는 버릇대로 자다 깨서 책을 읽기 위해 불을 켜려 했지만 촛대를 찾을 수 없어서 도로 누워서 잤는데 그때 세조가 신숙주가 정말 취해서 벌인 행패였는지를 확인하려고 신숙주의 집에 내시를 보낸 상태였다. 만일 신숙주가 깨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내시는 신숙주가 술이 안 취하고 멀쩡히 깨어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 보고를 올렸을 것이고 의심이 많은 세조는 "신숙주가 제정신으로 취한 척을 해 왕인 나를 능멸했나"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한명회의 기지 덕에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면서 세조는 "신숙주가 그렇게 취했으니 그랬겠지."라며 넘어갔다고 한다.[16]
이원복만화 '사랑의 학교'에서도 나오는데 비명을 지른 세조가 정색하고 굳은 얼굴로 쳐다보는 걸 한명회가 보고 '주상께서 정말로 기분이 상하셨군!'이라고 알아차린다. 술에 정말 취한 신숙주는 헤롱헤롱거렸지만 어둠 속에 를 한참 찾다가 신숙주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고 몰래 찾아온 내관은 코고는 소리와 같이 불이 꺼져있는 걸 보고 '대감이 정말로 취했군'이라고 여겨 보고하는데 세조가 피식 웃으면서 얼굴이 풀린다.
백수 시절부터의 친구인 권람미녀였던 젊은 여종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아내 눈치를 보느라고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한명회가 권람에게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라고 한 후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권람에게 줘서 "이걸 온몸에 바르고 황달 걸린 것처럼 해."라고 했다. 그리고는 권람의 부인에게 우는 척하면서 "아이고. 부인께서 계집 하나를 아껴서 내 친구 죽게 생겼다!"고 통곡하는 연기를 하자 권람의 부인은 길일을 택해 여종을 권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한명회가 권람을 찾아가니 권람이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자 두 사람이 껄껄 웃었다는 야사도 남아 있다.[17] 어쨌든 야사에는 한명회의 꾀나 지혜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사극 등지에서 꾀 많은 책략가처럼 묘사되는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인 듯하다.
자리에서 물러날 당시에도 정적쯤 되는 사림파의 한 사람에게 '자네는 너무 강직한 것이 문제이니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예언이 맞은 건지 충고를 받았던 사람은 결국 사화에 휘말려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18]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성종에게 한 유언명언. 이 말은 실록[19]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말을 마치고 생을 마감했다.

'''"처음에 부지런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게을러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나중을 삼가기를 항상 처음처럼 하십시오."'''

한명회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데 묘역 밑에 한명회의 사당인 '충모사'(忠募寺)가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묘역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게 되는 셈. 서울에서 부산 갈 때 천안휴게소에서 차로 5분 정도 지나면 좌측에 큰 무덤이 2개가 있다. 앞의 것이 한명회 부인의 묘소이고 뒤의 것이 한명회 묘.

4. 가족관계


정실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모친과 사촌지간이다. 장녀는 신숙주의 며느리, 차녀는 정현옹주[20]의 며느리이며 그 중에서 3녀는 예종의 왕비인 장순왕후, 4녀는 성종의 첫 왕비인 공혜왕후로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인 국구로서도 군림했다. 그러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요절하는 바람에 외손을 전혀 얻지 못하여, 대대로 외척은 되지 못했다. 적자는 한보이며 장순왕후의 동생, 공혜왕후의 오빠이다.


5. 평가


실록의 사관은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열정과 능력은 지략가로서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던것 같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 때문에,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는다.
공신을 무려 4번 그것도 모두 1등을 수여받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 볼만한 소지가 높은 공신이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서 받은거라 오히려 역적으로 볼만하고 익대공신은 후대에 비운의 인물로 숭상받는 남이의 옥에 참여해 받은거라 멀쩡한 사람 잡은 간신 취급받기 좋은 일이다. 좌리공신은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도저히 객관적 기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사유로 수여한 공신이라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퍼주기식 공신이기에 역시나 좋은 소리를 못듣는다. 세조~성종 연간의 공신 중에서 그나마 반란군인 이시애를 토벌한 공으로 수여한 공신이라 찝찝한 것 없는 진정한 국가 공로자라 할 수 있는건 적개공신인데 정작 한명회는 여기엔 명단을 올리지 못했다.
단종 관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난언죄등으로 참소한다. 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참소된게 아니라 단종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것인지라 명분이 전무한 정적 공격일 뿐이다. 결국 숙종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신원되고, 정조(조선)도 정몽주 후손의 절의에 대해 살아있는 사육신이라고 인정한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라서 이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있다. 다른 논란들을 제외하고 봐도 한명회는 '''"본인 실력이 아닌 잘나신 조상을 두었다는 것 하나로 특혜를 받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며 음서로 관직에 들어와야 주요 요직과 고위직에 진출이 가능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는 의외로 현대사회와 비슷하게 실력이 아닌 금수저식 특혜 짓거리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건들이 있었기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면서도 저런식의 엄청난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뭔가 캐릭터가 튀는 인물이고 '책사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사극 작가들에게 예전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인물이였다.

6. 기타


음흉한 계책을 잘꾸미는 책사라는 이미지와 미숙아(칠삭동이)로 태어났다는 전승, 그리고 한명회를 연기했던 사람의 외모 때문에 키가 작고 목이 꺽인듯한 외모가 볼품 없을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의외로 기록에 보면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술을 못했다고 한다. 술고래들인 세조, 신숙주와 이 분야에서의 본좌인 홍윤성과는 반대 성향. 하지만 술자리는 꼭 끼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가 유자광과 작당해서 남이를 모함했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코미디다. 남이를 병조판서에 해임한 건 사실이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남이가 유자광에게 반역에 가까운 언변을 내뱉어 스스로 자초한 화이다. [21] 그리고 유자광은 한명회와 사이가 안 좋았다. 유자광이 성종에게 한명회에 비리를 고한 상소를 올리고 이에 한명회가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려 유자광은 파직됐다.[22]
2013년에 한명회의 17대손인 한 모씨가 자신의 직계(?)조상인 한명회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모 언론인을 고소했지만 승소하지는 못했다.기사링크

7. 창작물에서


[image]
(사극에 등장한 한명회. 왼쪽 위부터 북한 사극 <사육신>의 박용철, <왕과 나>의 김종결, 왼쪽 아래부터 <조선왕조 오백년>의 정진, <왕과 비>의 최종원, <한명회>의 이덕화)
사극계에서도 오래전부터 한명회의 이름은 유명했지만, 수양대군의 앞잡이 정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런 그가 당당히 주인공 노릇을 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MBC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가 히트를 치면서부터였다. 특히 설중매-풍란-임진왜란 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공이 컸다. 역사 만화책 같은 데선 초인목후이관이라는 욕을 들었다는 기록 때문인지 원숭이 같은 비주얼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에서는 정진[23]이 담당하였고 사실상 사극 속의 한명회의 캐릭성을 정립하고 침체기에 몰렸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다시 살려낸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특히 한명회와 유자광(변희봉) 캐릭터의 압도적인 설득력과 미친 듯한 싱크로율은 장안의 화제였다. 지금도 중장년 사극팬들은 '칠삭둥이' 한명회와 유자광의 유행어 '이 손 안에 있소이다'를 기억할 정도.
그 덕분에 그 이전까지는 지명도가 고만고만했던 정진은 일약 대 스타로 떠올랐지만, 한명회 역 이후 임진왜란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훗날 태조 왕건에 이르기까지 모략가의 이미지를 평생 벗지 못했다[24]. 참고로 한명회의 업무 파트너 격이었던 권람역은 성우 박일.
[image]
파천무에서는 장나라의 아버지인 연극배우 출신의 주호성이 연기하였는데 개성있는 외모와 유니크한 캐릭터의 한명회를 잘 소화해내었다. 세조 역의 유동근과의 케미도 좋았지만 본인이 의욕을 갖고 준비했던 배역이라 꽤 높은 시청률을 유지했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주호성은 한명회 역이 아니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었던 기획 당시 캐스팅 비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한명회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KBS2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이덕화가 담당하였다. 추남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한명회의 캐릭성에 더해 귀까지 당나귀 귀처럼 꾸몄으며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가 잘 어우러졌다. 그런데 이덕화가 워낙 잘생긴 외모이다보니 당나귀 귀를 달았어도 그다지 추남같지가 않다. 수양대군 역할은 서인석이 맡았는데 여기서 호흡을 맞춘 서인석과 이덕화는 훗날 이의방, 이의민 역할로 호흡을 맞추고 다시 노태우, 전두환 역할로 호흡을 맞추면서 쿠데타 전문 콤비가 되었다(...) 무려 고려, 조선, 대한민국을 전부 뒤집어 엎은 쿠데타 콤비 ㅎㄷㄷ...
[image]
왕과 비에서는 최종원이 한명회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악역 포스가 살아 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JTBC 인수대비에서는 손병호가 한명회 역으로 출연하였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로 코믹한 조연으로 나왔던 이희도가 한명회 역을 맡았는데 간교한 책략가의 이미지는 여전하며, 청풍관 왈패들의 두령으로 등장하여 책략가의 이미지와 역사상 모습에 가까운 '보스'의 모습을 둘 다 살리고 있다.[25] 특히 수양대군에게 받은 재물을 만지면서 부하들에게 하는 '''"돈이란 말야. 권력을 잡으면 저절로 굴러들어오게 되어 있어"'''라는 대사는 권력에 대한 야심과 물욕을 지닌 한명회의 모습을 잘 설명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30대 후반인 한명회를 가장 잘 구현한 캐릭터다.
뿌리깊은 나무(드라마)밀본 조직원인 한가놈(조희봉)이 한명회가 아닐까 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추측하고 있었는데, 마지막화에서 자신의 이름이 한명회임을 밝힌다.
[image]
영화 관상에서는 김의성이 연기했다. 비열하고 간교한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젊은 시절 수양대군의 참모(지략가)로 각종 책략을 통해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끄는 주역으로 그려진다.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관상가 김내경을 괴롭히다가[26] 결말 부분에야 얼굴이 공개된다.
특히 후반부에 "이 나쁜 놈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라고 외치는 김내경에게 '''"내 진짜 지옥을 보여주지."'''라고 비웃으며 전설의 살생부 씬을 연출할때는 그야말로 진정한 악역 포스 그 자체. 김내경의 눈앞에서 수많은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다음 정줄 놓은 그를 오늘 일을 알려야 하니 살려보내겠다고 웃으며 배웅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지간한 사이코패스 저리 가라 할 정도. 그러나 최후반에 초야에 은거한 김내경을 회유하러 방문했다가 오히려 김내경에게 "당신, 목이 잘릴 팔자요."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그 날 이후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지내다 결국 목이 잘려서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최후를 맞는다. 영화 초반부에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다 못해 강박 증세까지 보이던 그 노인이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예언이 틀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눈을 감지만 그 예언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김내경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평생을 왕에게 총애받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고 왕이 직접 의원과 호위무사까지 보냈지만, 누군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살았다. 결국 집요하게 괴롭히던 김내경에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복수를 당한 셈이다. 그리고 죽어서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만다.[27]
재밌게도 훗날 김의성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한명회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고려 최후의 충신 정몽주를 연기하는데 이 때문에 정몽주가 환생해서 자기를 죽인 이방원의 자손들이 골육상생을 벌이게 하여 복수에 성공했다는 섬뜩한 배우개그가 생겼다. 실제로 한명회의 첩 중에 정몽주의 자손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묘하다.
다음웹툰 살생부에서는 거의 권력과 탐욕에 미친 사이코패스로 나온다.

[1] 호를 따서 정자를 세웠는데 정자 이름이 압구정.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로 현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인근에 압구정 터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2] 청주 한씨이므로 청주의 옛 이름인 상당을 군호로 받았다. 오늘날 청주시 상당구가 여기서 나왔다.[3] 왕비가 된 두 딸은 안타깝게도 나이 20살도 안되어서 모두 요절하였고 자식도 두지 못했다.[4] 원래 아기는 10개월이 되어야 태어나는데 한명회는 7개월만에 나왔으니 거의 미숙아로 태어나 사람의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36주 이하에 출산하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고 임신 7개월(25~28주 이하)에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서 현대 의학을 총동원해 3~4개월 정도 치료를 받고서야 퇴원하는게 가능한데 조선 시대에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생존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5]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와 달리 음서로 관직에 오르면 제 아무리 명망있는 가문이더라도 말단의 자리밖에 못 오르는 데다가 차별도 심했다.[6] 물론 한명회가 출세를 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자 그 시절 동료들은 크게 후회했고 여기서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는 말이 나왔다.[7] 계유정난 때 살생부를 들고 조정 대신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한 일화는 정말 유명하다. 데스노트의 원조격? 살생부 내용은 정사에는 없고 야사에만 전해온다.[8] 훗날 사육신단종복위운동 실패 사례와 대비된다.[9] 다만 별운검을 폐한 이유는 연회 장소가 협소하다는 것이였고 동일한 이유로 세자 및 일부 인원들의 참석도 막았다. 이에 사육신 내에서도 원래 계획대로 그냥 진행하자는 측과 세자 및 제외된 일부 인원 중 제거해야될 인물들까지 한번에 제거해야 한다는 측으로 분열되었고 이 때 계산이 빠른 김질은 실패를 예감하고 장인 정창손에게 고변하여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10] 사실 이 장자방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상투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었다. 관직에 오르고도 군사 부문 업무를 담당하며 북방 순시를 즐긴 것 때문에 모사형 인물이라기보다는 뚝심과 과단성이 있으며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독장형 인물에 가깝다는 평이 있다. 계유정난에 관련된 일련의 행동들도 정작 정변의 주체와 설계자는 세조고 한명회 등 심복들은 정보 수집과 도청 및 수하 무사들을 모은 정도였다.[11] 예종에게도 3녀인 장순왕후를 시집보냈으나 이쪽도 예종이 세자 시절 요절하면서 딸 복은 지지리도 없었다.[12] 한명회가 중국 사신을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접대할 것을 청하자 "중국 사신이 거기가 좋다고 하면 개나 소나 거기로 가서 백성들에게 민폐가 될 걸 왜 모르냐? 정자에서 술먹고 노는게 아름다운 일이냐?"고 성종이 꾸짖자 다른 곳으로 접대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항의 표시로 "사실 아내가 아파서 전 안 갈랍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난번에는 안 간다고 안했는데 전하께 개기는겁니다."라고 탄핵했고 성종도 "언제는 아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굳이 명나라에 가더니 이번에는 별로 안 아픈데도 안 간다고? 속셈이 훤하다!"고 직첩을 거두어버린다. 몇 달만에 돌려주기는 했지만.[13] 부인과 함께 있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하며 여성의 목소리조차 듣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제 몽둥이를 만들어놓고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면 몽둥이를 들고 나와 내쫓았다고 한다.[14] 조선시대 집안의 제사와 종통을 잇는 건 반드시 적출의 장손을 우선으로 했다. 장손이 요절했다면 적출의 둘째가 대를 이었고 적출이 없다면 양자가 대신했다. 때문에 서자가 제사를 받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서자가 집안의 대를 이은 건 진주 하씨 하륜의 종가, 덕수 이씨 이이의 종가 등이 있다.[15] 아무래도 세종대왕 시절에 당한 적(업무와 관련된 책을 새벽이 지나도록 읽다가 잠든 것을 세종이 보고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던 일이 있다)이 있어서.[16] 소문쇄록이라는 책에서는 단순히 한명회가 하인을 시켜 신숙주에게 빨리 자라고 전해줬다는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17] 이 일화는 MBC의 조선왕조 500년과 KBS 사극 한명회에서도 다루었다. 권람의 코믹한 꾀병씬이 압권.[18] 그런데 사실 무오사화 때 살아남았다고 해서 좋으냐? 아니다. 최종 보스급인 갑자사화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무오사화가 더 나았다. 부관참시형 1명, 능지형 2명, 참형 2명, 그 외에 다수가 장형 + 유배형이었다. 그런데 이 때는 연좌해서 가족까지 처벌은 안 했다. 연산군이 싫어한 대간 세력을 짓밟아 버리려고 했기에 저 사람이 좀 굽신거려도 대간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일단 처벌은 피할 수 없었을텐데 이게 문제다. 왜냐고? 갑자사화 도중에 연산군은 "무오사화에서 살아남은 것들도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좋아도 시간 끌기, 운이 나쁘면 가족까지 죽음이었다. 저 말을 한 한명회는 저 사림파보다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무덤이 파헤쳐져서 해골이 된 머리가 잘린 뒤에 효수되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목숨은 부지하지는 못했지만 가족들까지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한명회의 말을 안 들은게 오히려 이었다고 할 수 있다.[19] 성종 209권, 18년(1487년 정미 / 명 성화(成化) 23년) 11월 14일(기유) 2번째 기사, 상당 부원군 한명회의 졸기[20] 세종대왕상침 송씨의 딸[21] 하지만 애시당초 남이가 불과 '''28'''세에 '''병조판서가 된 것부터가 문제투성이였다.''' 남이가 여진족 정벌과 이시애의 난에서 세운 공훈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판서가 된 것, 더욱이 그러고도 모자라 동기인 구성군을 질투(구성군은 '''영의정이 되었다.''')했으니 남이가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과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똑같이 초고속 출세를 했지만 구성군은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남이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지 않고 처신에 신경을 썼고 때문에 적어도 남이와는 달리 역적까지 되지는 않았던 점을 보면 남이의 문제다.[22] 다만 한명회도 피해를 안 입은 건 아닌데, 유자광의 상소에 자극을 받은 대간들이 한명회를 처벌하라고 주장했고 결국 한명회가 병을 핑계로 파직되었다.[23]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책사였던 능환 역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6월 2일 암투병 중 별세.[24] '태조 왕건'의 궁예 역에는 <한명회>의 한명회 역이었던 이덕화가 한때 거론됐다[25] 실제 역사에서도 계유정난수양대군 일파가 당시 세력들 중에서 가장 위치가 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무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명회의 수완 때문이었다.[26] 수양대군과 그의 수하를 바꿔치기 하면서 문종의 명으로 역심을 품을 만한 용의자들을 물색하던 김내경을 속인 것과 김내경의 아들 김진형의 눈을 멀게 하여 장님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를 김종서 일파의 짓으로 오인하게 만든 것도 죄다 이 사람이 한 짓이다.[27] 사실 김내경은 한명회가 죽고 나서야 목이 잘릴 것이라고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목이 잘릴지 그 시기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한명회가 죽을 때까지 평생 참회하고 벌벌 떨며 살도록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