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군

 



'''구성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 세종의 손자'''
'''구성군
龜成君'''

'''군호'''
구성군(龜成君)[1]
'''시호'''
충무(忠懋, 忠武)
'''본관'''
전주(全州)
''''''
준(浚)
''''''
자청(子淸)
''''''
자준(子濬)
'''생부'''
임영대군
'''생모'''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 (全州 崔氏)
'''부인'''
천안군부인 청주 한씨 (淸州 韓氏)
'''자녀'''
1남[2]
'''생몰
기간
'''
'''음력'''
1441년 1월 20일 ~ 1479년 1월 28일
'''양력'''
1441년 2월 11일 ~ 1479년 2월 19일
1. 개요
2. 최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소소한 말썽을 자주 일으킨 아버지 임영대군과는 달리[3] 어린 시절부터 반듯하고 모범적인 왕족으로 성장했다. 25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년만에 벌어진 이시애의 난남이, 강순과 함께 진압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되었고, 146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 조선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정승이 된 인물. 물론 종친 버프도 있었을 것이고, 후대인 예종의 왕권 안정을 위한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흔히 남이와 함께 엮이지만 정작 남이는 세조가 지나치게 구성군만 총애한다고 주장하는 등, 나름대로 구성군을 견제하려는 구석도 있었다고 한다.

2. 최후


그러나 그 해 남이가 역모로 제거되자 스스로도 위협을 느껴 3년 뒤 부친상을 당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난다. 계유정난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간들이 어린 임금을 옹립하고는 한때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한 종실'''[4]이 정계에 존재하는 상황을 두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수양대군과는 달리 구성군의 경우 대놓고 야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훈구 대신들의 위기감은 충분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 단종 때와 완전 비슷한 상황이다. 구 공신 본인들이 단종 때의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여 권력을 얻었으니 그 업보가 구성군에 의해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올 위험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세조 시대에 세조의 후궁[5] 구성군을 보고 반해 연서를 보낸 일이 있었던 걸 보면 인물도 출중했던 듯하나[6] 결국 그 사건과 숙직 포졸(최세호, 권맹희)들의 임금 드립 등을 빌미로 유력한 종친을 경계한 훈구 대신파에 의해 현대의 경북 영덕군 지역인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10년 후 현재의 황해남도 옹진군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3. 여담


스스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 만한 눈치도 있었고 재능 역시 출중했으나, 바로 그렇게 재능 있는 왕족이었기에 제거당한 전형적인 예. 명분도 없는 쿠데타로 무리하게 왕위를 찬탈하여 후손들의 정통성에도 오점을 남긴 세조, 세조에게 생전퇴위를 요구했다가 참수당한 양정, 세조의 빽만 믿고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가 결국 죽은 후 모두에게 버림받은 홍윤성,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다가 예종(과 구 공신들)에게 제거당한 남이와는 달리 나름대로 신중하게 처신을 했지만 결국 유배당하고 말았던 점에서 어찌보면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겠다.[7] 그래도 끔살당한 양정, 남이보다는 비록 유배를 당했으나 처형당하지 않고 자연사했으니 낫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사실 자연사했다는 말도 뭣한 것이, 구성군이 불과 40살도 안 되어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구 공신들의 지나친 견제에 대한 스트레스와 10년 간의 유배생활에 따른 상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듯하다.
세조가 그를 중용한 것은 넓게 보면 왕권강화책이었다.[8] 이시애의 난 당시에 이시애 군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양팔이나 다름 없는 한명회신숙주를 들먹이면서 내통 운운 드립을 쳤고, 세조는 이들을 투옥하거나 구금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보였다. 이 때부터 기존의 공신들에게 신뢰를 잃은 세조는 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친족인 종친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때 토벌군 최고 사령관이 임관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26세의 종친 이준, 부사령관이 당시에도 70대 노장 강순, 넘버 3가 역시 종친이며 임관 1년차인 26세의 남이였다. 이들을 이렇게 밀어줘서 공신과 대립시켰으나, 결국 세조에 이어서 예종도 빨리 죽으면서 일이 틀어진 것이다. 결국 공신들은 남이에 이어서 이준까지 제거하고, 결국 성종 5년 반포된 경국대전에 종친사환금지법이라 하여 종친들이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막아버리게 된다. 이후엔 왕실의 가까운 종친들은 종친부 등 소소한 명예직 외에는 벼슬을 할 수 없었으며, 촌수가 8촌 이상 멀어져 왕실과는 사실상 연관이 없어진 뒤에야 과거 시험 등을 볼 수 있었다. 차라리 세조가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전에 일찍 죽었다면 구성군은 당장은 큰아버지를 잃는 대신 본인은 나름대로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비슷한 처지였던 동시대 사람으론 역시 문장가로 소문이 났던 영순군 이부[9]가 있다. 이 사람도 세조-예종 시기 몇번이나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왕실의 보호로 어찌어찌 살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요절했다. 그나마 몸과 목이 나눠지는 참혹한 꼴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지 않고 집에서 편안히 죽은 것이 다행.
구성군의 묘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다. 숙종 대에 이선, 김수항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으며, 고종 대에는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땅 이름 구()자가 귀라는 음도 갖고 있어 귀성군이라고 써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보통 군호는 지명에서 따오기 때문에 땅 이름 구를 쓴 구성군이 맞는 표현이다.[2] 양자이다.[3] 구성군의 아버지인 임영대군은 세종 시절부터 여자를 밝혀대길 좋아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으며, 심지어 궁녀까지 겁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4] 정치적 영향력은 물론이고 정통성 면에서도 수양대군과 유사했다. 성종의 5촌 당숙들, 즉 세조의 조카들 중 혈통상 가장 가까운 종친이 바로 구성군이었다.[5] 이름은 ‘박덕중’ 으로, 세조의 사저시절 몸종이였다가 입궁해 소용 품계를 받았다.[6] 세조는 그 여자가 잘못한 것이며 구성군에겐 죄가 없다고 사건을 무마했다. 아무래도 간택후궁도 아닌 몸종 출신 후궁 때문에 세종의 적손주(대군의 적자)가 처벌받는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인것 같다. [7] 실제로 예종은 구성군에 대해선 최대한 넘어가려고 애쓰긴 했다. 애초에 구성군은 예종과 친사촌 관계로 가장 가까운 종친이였으나, 남이는 예종의 할아버지인 세종의 동복누이 정선공주의 손자로 왕족도 아니고 촌수도 먼 6촌에 불과했으니, 예종 입장에선 구성군을 더 아낀 게 지극히 당연했다.[8] 왕권 강화를 위해 종친들을 등용하는 것은 양날의 검인데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하다. 왕권 강화를 한답시고 종친들을 등용하면 왕권이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권력의 추가 종친들에게 기울어버리고 기존 관료집단들의 지지도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의자왕백제를 지키지 못한 것도 고위직을 죄다 자기 아들로 앉혀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9]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외아들이다. 즉, 구성군의 사촌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