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신숙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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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28ㆍ40 代》'''
'''太宗 17年~
成宗 6年'''

'''제28대'''
'''1462. 5. 20.~
1466. 4. 18.'''

'''제40대'''
'''1471. 10. 23.~
1475. 6. 21.'''











[image]
'''시호'''
'''문충공(文忠公)'''[1]
'''군호'''
고령군(高靈君)
'''성명'''
신숙주(申淑舟)
'''본관'''
고령 신씨
''''''
범옹(泛翁)
''''''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출생지'''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
(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생몰연도'''
음력
태종 17년 6월 20일 ~ 성종 6년 6월 21일
양력
1417년 8월 2일 ~ 1475년 7월 23일
1. 소개
2. 배경
3. 촉망받는 신진 관료
4. 정난공신
4.1. 배신의 아이콘
5. 평가
5.2. 명재상
6. 인물됨과 일화
7. 대중 매체에서
8. 가족과 후손
9. 영정
10. 그 외
11. 관련 문서


1. 소개


조선 세종 ~ 성종 때의 정치가, 학자, 외교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아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훗날 세조의 편에 서서 계유정난단종 퇴위를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사육신과 이후 사림파에게 성토의 대상이 됐고 숙주나물 등 인신 공격의 대상까지 됐다. 당대에 보기 드문 여러 언어에 능통한 다언어 구사자였으며 국조보감,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고 농업 작물 기술을 적은 농산축목서를 저술했다. 여진족을 물리쳤고 일본에 가서는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는 성과를 올린 인물이다.


2. 배경


신숙주의 아버지는 신장, 어머니는 나주 정씨로 정유의 딸이고 신숙주의 할아버지는 신포시, 할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충한의 딸이며 신숙주의 증조부는 신덕린, 증조모는 정신호의 딸이며 신숙주의 고조부는 신사경이다.
신포시는 공민왕 시대에 태어나 정몽주와 김구용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으로[2] 1383년에 문과 급제했으나[3] 이성계가 왕좌를 찬탈하여 고려가 망하자 아버지 신덕린과 장인 김충한을 모시고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남원으로 내려갔다. 세종이 신포시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남원에서 제자 양성에 힘썼는데 세종이 계속 관직에 나오라고 재촉하고 장남 신장이 진언하여 결국 1427년에 관직에 진출했다.
신장은 우왕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조선이 건국된 후 1402년 문과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정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상술했듯 신장은 자기 아버지 신포시가 세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아버지가 절의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신덕린은 자기 아들과 손자가 결국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인정하고 관직에 진출한 것과는 반대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전라남도 광주로 내려가 살았고 조선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조선을 섬길 수 없다고 사양했고 죽는 날까지 조선의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다. 신숙주의 증조부인데 어째 자기 증손자보다도 생육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3. 촉망받는 신진 관료


신숙주는 1417년 6월 20일에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에서 아버지 신장과 어머니 나주 정씨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태종의 과거 동기이자 두문동 72현인 신덕린(申德隣)이고 조부는 공조참의를 지낸 신포시(申包翅)이다.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왔다. 1438년(세종 20) 22세의 나이로 식년시 진사시에 1등 1위(장원)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인 1439년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훗날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1품 승진에 3년이 걸렸다. 과거 합격도 합격이고 순전히 날짜만 채워서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많으면 51년이다.[4]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숙주라고 한다.[5]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6]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일본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몸이 아팠다가 나은 직후라 세종이 걱정했는데 신숙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하고는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붓과 묵을 가져와서 글씨 좀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써 주어서 주위 사람들이 "매우 비범하다"고 평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려 쓰시마 도주와 담판을 했는데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오는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정하지 말자"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자 신숙주가 "세견선 수가 정해지면 확실히 이익이 당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정해지지 않으면 당신 밑에 부하들이 지멋대로 자기들 이익만 챙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는 말로 설득하여 조선에 오는 세견선의 수를 확실히 약정한 계해약조를 맺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경험은 뒷날 성종 때 대일 관계 등에 관한 주요 자료로 손꼽히는 <해동제국기>를 완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에서는 풍랑이 거셌다. 그 때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왜구가 납치해 갔던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중 임신한 여인이 있었는데 아이가 왜인의 아이였다. 선원들은 "임신한 여인이 배에 탔으므로 바다에 내던져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으나 신숙주는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해서야 되겠냐"며 이를 말렸고 오래지 않아 풍랑은 잠잠해졌다 한다. 이건 야사 이야기가 아니라 세종실록의 신숙주 졸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하던 성삼문과는 꽤나 친하게 지냈으며 안평대군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7]

4. 정난공신


단종이 즉위하여 수양대군명나라사신으로 갈 때 함께 가게 되면서 완전히 수양대군과 가까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사신으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신숙주도 동행시키려 했다. 신숙주는 여기에 따르면서 했던 말이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침 수양대군과 신숙주 두 사람은 1417년생 동갑내기다. 세조는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나섰을 때의 호칭인 '신 서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다만 계유정난 전후에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애매한 점이 많아 알 수가 없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신숙주가 다른 정파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이 많았기에 애초에 쿠데타 전에는 세조가 쿠데타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자신을 도운 좌익공신 중 1등공신으로 올라서 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사육신들도 단종복위운동 중에 한명회, 권람, 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다.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한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를 윤영손이 처단하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제지하고 거사를 연기하기로 했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실록의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대나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김종직도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8] 이는 15세기까지의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김종직이 대놓고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만일 진짜로 그런 말을 했다면 성종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게 아니라 김종직의 눈에 흙이 덮혔을 것이다.[9]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사육신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신숙주의 평가는 점점 낮아져서 헌종은 "신숙주(申叔舟)는 어찌하여 육신(六臣)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건 헌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세도정치기의 왕이라서 측근 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육신 문서에도 있지만 진짜 신숙주가 뭘 했는지, 사육신이 뭘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1. 배신의 아이콘


역사적으로도 이 전향이 충격적이었는지 숙주나물에 이름이 붙기까지 했고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된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의 능력과 성품에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
이후 사림들은 그래도 국왕인 세조를 비판할 수는 없으니 대신 신숙주를 비판하는 소설들을 만들어냈고, 민가에서도 변절자 신숙주에 대한 수많은 설화들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 설화가 실제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불명. 진짜 민간 설화 중에서 조선 시대 기원이 밝혀진 것은 없다. 사림들이 단종을 동정했다는 증거만 많을 뿐[10].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자를 까기 위해 역사 속의 변절자 캐릭터 신숙주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소설 등을 써냈다. 오늘날 알려진 신숙주의 변절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나 이광수단종애사에서 알려진 설화들에 기초한 것들이 많다.[11]
  • 성삼문과 함께 "세손(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한 세종대왕의 당부를 받았다. - 성삼문 문서에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명 절차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정식 절차이고, 당하관이었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고명 운운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으며[12], 왕이 죽으면서 세자인 문종이 아니라 손자를 부탁하는 것은 지극히 불길한 행동이다. [13]
  • 쉬기 쉬운 녹두나물을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본따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숙주나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녹두나물이 숙주나물이라 불린 기록은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후다.맹꽁이 서당 보물섬 연재분에서도 이렇게 나왔던 것으로 보아 의외로 오랫동안 이렇게 알려진듯.
  • 사육신이 꾸미던 음모가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있다는게 알려졌을 때, 집에 돌아온 신숙주에게 아내가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목을 매어 자결함. - 실록이나(세조 2년 1월 23일) 족보에 보면 신숙주의 아내는 사육신 사건이 있기 몇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박종화의 단편 소설 <목 매이는 여인>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광수(소설가)단종애사에 채용되어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비난하기 위해 사육신을 국문할 때 세조 옆에 서있다가 성삼문이 "이 변절자야!"라고 일갈하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해서 세조가 옆으로 숨게 해주었다, 후일 생육신 김시습의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는 호통에도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는 일화도 있다 -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의 기록.
  •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정순왕후 송씨노비로 달라고 청했다 - 김택영의 <한사경>에 나오는 서술로 이것을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에 실으면서 유명해진 이야기다. <한사경(韓史綮)>은 분명 역사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택영[14]대한제국 시대의 인물로 이 책은 저자 본인도 역사서라고 하기는 애매하다고 '사史'로 끝내는 대신에 '경'을 더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도가 굉장히 강하게 드러나는데[15] 이중 하나가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단종조차 죽였던 세조가 정순왕후 송씨를 노비로 만드려는 시도조차 하지않은걸 보면 오류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실제 있었던 사실로 보기 어렵다.
  • 신숙주의 남동생 신말주(1429년 ~ 1503년)는 형과는 달리 단종에 대하여 충성을 내보이며 낙향했다. - 신말주는 성종 때까지 벼슬을 하며 대사간 같은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1990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이 신말주가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상소를 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 연유로 세조가 형은 공신, 동생은 역신이냐면서 불쾌해하나 신숙주를 봐서 처벌은 불문에 붙힌다.

5. 평가



5.1. 배신자


신숙주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평가해야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그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군주를 배신했다는 점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문종은 세종의 적자이며, 그 아들인 단종은 세종의 적장손으로서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역성혁명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치명적인 폭정이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이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위를 빼앗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16].
즉,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는 명분이 전혀 없는 것이었으며, 유교 사회가 아닌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괜히 후대 조선 왕들이 중종을 시작으로 단종에 대해 무덤 수리 등을 하는 등으로 여론이 형성되다가 결국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자 숙종이 총대를 매고 단종을 정식으로 복권한 것이 아니다.
신숙주 본인도 배웠으며, 신숙조가 속한 조선에서 통치 이념과 사상으로 삼은 유교, 성리학의 관점에서 단종 폐위와 세조 집권은 옹호하기에 쉽지 않다. 신숙주와 세조 한명회가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을 동안과 죽은 이후 한동안은 단종에 대해 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이후 사림에서 강대한 위세를 떨치던 서인, 노론에서 단종 복권을 적극적으로 성토하며 행동에 나선것도 이때문이다. 물론 사육신들도 복권.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 노론의 거두 송시열.
단종의 폐위와 단종 복위 움직임에 대해 세조측에 대해 일말이라도 이해의 여지나 명분거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림들은 자칫 왕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단종 복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의 여지나 명분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정변의 주요 핑계거리인 실정과 폭정도 없었다. 폭정과 실정으로 명분이 있는 연산군과 광해군들의 폐위와 달리 단종은 17살에 살해당해서 애초 저런 폭정이나 실정을 펼칠 기회조차도 전혀 없었다.
신숙주에 대한 옹호가 점점 도를 넘어 신숙주에 대해 그가 없었더라면 더욱 암담한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도 쏟아지는데 '''조선시대의 발전은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될 사안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신숙주는 그 정도의 능력도 아니였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도 아니였다. 세조의 공신이자, 신숙주의 영의정 벼슬, 신숙주의 업적들과 일화들에 무작정 함몰돼서 오해가 자주 일어나는데 세조는 그렇게 막중한 권한과 역할 부여를 신숙주에게 하지 않았다.
다만, 신숙주를 포함해서 사육신과 같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당시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상은 그 이후 오랜 역사를 통해서 시대의 요구와 가치관에 따라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경합되는 담론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 신숙주 본인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사육신을 복권하는 문제는 이후 조선 왕조의 권력의 구도에 따라서 사대부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된 결과가 숙종대에 완성된 것이며, 이 역시도 단순히 사대부의 승리로 끝난 것 혹은 명분만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재평가가 이뤄질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왕실의 정통성 문제와 당시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투쟁 사이에서 절묘하게 타협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신숙주, 그리고 사육신, 세조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상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지식이 그러하듯이.[17]

5.2. 명재상


이렇듯 후대에 지조 면에서 성삼문과 비교되었지만[18] 업적은 뛰어나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보면 정도전,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들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다.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언어학에 천재적이었는데 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에 관한 질의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번 찾아가기도 했으며[19]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 동아시아 언어에 모두 능통해 '''걸어 다니는 인간 번역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겨 문화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외교적 수완과 감각도 탁월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쓰시마 섬에 갔을 때에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고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국제적 경험 덕분인듯,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 판서 직을 제일 자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관련 분야에서는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전략)화폐가 행용되게 하는 방법은 '''경외(京外: 도성 외 지역)에서 시포(市鋪)를 열어 백성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게 하는 것밖에 없는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자면 물건을 날라 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돈의 유통(流通)에 힘입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화폐는 반드시 시포가 있어야 통용된다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시포를 설치하는 것은 인심의 소원에 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후략)

-<성종실록>, 성종 4년 2월 11일, 조세제도와 화폐 유통 방법에 관한 원상들의 회의 중 신숙주의 발언 중에서

그리고 신숙주는 당대에 흔치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종실록을 보면 화폐의 유통과 이를 위한 시장의 발전에 대해 길게 논한 장면이 나온다. 해당 기사는 성종 실록 성종 4년(1473년) 2월 11일 기사 참고. 요약하면 '화폐 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민심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20] 이게 별것 아닌 이야기인것 같지만 신숙주의 이 의견은 조선에서 화폐 유통이 되지 않았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21] 농업이 근본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 자체를 보는 눈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제법 시대를 앞서간 면모도 있었다는 소리다. 다만 신숙주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친구 성삼문이나 후대의 조광조 같은 인물처럼 모든 것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image]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3번째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신숙주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여진족이 야습하자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시를 읊었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다. 영채 안쪽에 녹색 옷을 입고 여유롭게 누워 있는 사람이 신숙주다. 이 때 신숙주가 읊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虜中霜落塞垣寒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차가울사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또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어서 1460년에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이 원정이 있었던 1460년이 간지로는 경진년이라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고 부른다. 이 때 적의 야습을 받자 본진에 태연히 누워서 쳐들어온 적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이때 신숙주 부대는 추장급 여진족 90여명과 일반인 여진족 430여명을 붙잡거나 살해했으며 9백여채의 집을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로 보면 세종 때 최윤덕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사실 파저강 정벌보다 더 큰 승리이기도 했는데 파저강 정벌 때는 군사 2만 5천명을 데리고 가서 170여명을 죽였지만 이때는 1/4의 병력을 데리고 가고도 두배가 훨씬 넘는 성과를 올렸다. 성공적인 북정 후에는 북방 방비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북정 기록인 <북정록>과 세조가 지은 병법서인 <병장설> 편찬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거기에 함선에 대한 안목도 뛰어나서 성종 실록에는 조선 함선과 일본 함선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논하고 있는 장면도 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판옥선 참고.
이러한 여러가지 공로로 세조는 물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옥사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또 올랐고[22], 예종이 급사하자 가장 먼저 나서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교섭, 성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23] 세조는 그를 당태종의 명신인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징은 당 태종에게도 거침없는 간언을 잘 했지만, 신숙주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예스맨에 가까웠다고 할까. 성종 실록의 사관은 신숙주의 이런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당 태종의 신하들에 비유하면 신숙주는 위징보다는 방현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24]
어쨌든 신숙주의 업적을 보면 행정, 군사, 외교, 정치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당대의 '''엄친아'''이다. 하지만 변절자라는 편견 때문에 이런 엄친아스런 면모는 대중에 잘 알려진 편이 아니다.
1475년에 59세로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같이 관에 넣어 달라"고 했다. 역시 자타공인의 책벌레다운 유언이다. 마지막에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제법 적절한 때에 죽음을 맞아 한명회처럼 두 번 죽는 비운을 안 당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세조의 공신 그룹 중에서 성종 7년(1476)에 죽은 홍윤성과 함께 정말로 퇴장 타이밍이 적절했는데, 같은 원상이었던 성종 1년(1470)에 죽은 구치관처럼 막 좋을 때에 죽은 것도 아니고, 성종 18년(1487)에 죽은 한명회처럼 폐비 윤씨가 죽는 것도 보지 않은게 행운이었다. 그가 죽은 성종 6년은 성종이 친정하기 딱 1년 전이었다. 특히 신숙주 사후 3년 뒤(1478)에 죽은 정인지마저도 갑자사화이런 일을 당한 걸 생각하면...
또한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의하면 성종에게 죽기 직전에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진언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징비록의 본문이 시작되는 바로 첫머리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류성룡이 "일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했어야 한다"는 뜻으로 삽입한 기록이지만, 당시 신숙주 정도로 일본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 전문가가 드물었다는 이야기다. 징비록에만 기록된 말이 아니고 당연히 실록에도 남아있는 기록이다. 성종은 신숙주의 유언을 새겨들어서 계속 사신을 보내서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일본에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신숙주 사망 직후부터 일본과 사신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다.[25] 이때 일본과의 연락이 끊긴 탓에 결국 100여년 후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 측의 사정을 파악하는데에 혼란을 겪다가 임진왜란 초기 대응에 실패했으니 신숙주의 충고는 꽤 통찰력이 있는 것이었다.
징비록이 일본에도 널리 퍼진 이유인지 이 말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서, 뒷날 에도 막부의 유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가 1711년 조선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에게 "신숙주 공의 그 말씀은 참으로 대신으로서 나라를 걱정한 말씀이라 하겠소"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냉정하게 결과론적인 시각에서만 본다면 도덕성엔 문제가 있지만, 신숙주의 선택은 미래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사육신과 함께 지조를 지켰어도 단종의 복위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본인 역시 죽음을 당했을 것이고 이후 신숙주의 업적들이 죄다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6. 인물됨과 일화


변절자라는 평가에 비해 의외로 호방하고 태평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실록에서도 위의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아들이면서 했던 발언 등, 신숙주의 성격에 대해 '활달했고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거침이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위쪽 항목에도 나오지만,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 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현대인에겐 그 의미가 별로 실감이 안 날수도 있겠지만, 왕권이 서슬퍼렇던 옛날에는 대단한 사건이다. 다만 임용한 박사 말에 의하면 당시 곤룡포는 오로지 왕만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곤룡포를 벗어 준다는 말은 곧 왕권이 이양되었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실제로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면 신숙주는 그 날로 처형감이라고 한다. 그래서 곤룡포가 아닌 가죽옷일거라고 설명했다.[26]
을 매우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술버릇도 특이해서 세종 시절 곤룡포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고 일어나면 꼭 책을 읽었다고 한다. 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세조가 술기운에 신숙주의 팔을 꺾었고, 세조가 똑같이 해 보라 하여 세조의 팔을 세게 꺾어 노여움을 샀다가 한명회의 도움으로 이를 모면한 야사도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학교에서 '벌주와 팔씨름'으로 각색되어 소개되었다. (한명회 문서 참고.)
사실 신숙주 집안은 주벽이 참 심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신장도 당대 제일의 술꾼이어서, 죽었을 때 당대의 대신 허조가 "이 훌륭한 사람을 술이 데려갔구나"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손자로써 중종 때 정승을 지낸 신용개도 술꾼으로 유명했다.
신숙주의 저서인 <해동제국기>는 무로마치 막부일본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일본어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데 있는데 여기에서도 누가 당대 제일의 주당 아니랄까봐 '''너 술 먹었냐?''', '''이 술 맛있다''' 등 '술'과 관련된 기록이나 일본어 표현들을 꽤 많이 옮겨놓기도 했다[27].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이게 명에 들어가면서 그 내용이 문제시되어 '너네 우리 불러서 전쟁하면서 뒤로는 일본하고 손잡은 거지?' 하는 식의 고발을 받은 적이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 천하창세>에서 '''아이템'''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다만 '''명나라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신숙주의 호인 '보한재(保閑齋)'는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과 비슷하게 별장 이름을 따서 지은 호라고 한다. 이 보한재라는 별장 역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처럼 한강변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것은 신숙주가 1452년에 친분이 있던 명 학자 예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데 '동쪽으로는 노량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양화진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별장 이름을 보한(保閑 : 한가로움을 보전한다)이라고 지은 건 "명예를 멀리하고 한가로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고 예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별장 이름도 한명회가 '압구정'이라고 이름한 의미와 비슷한데, 사실은 한명회의 압구정보다 신숙주의 보한재가 더 먼저 지어졌다.
한번은 일본에 갔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당황했던 데 반해 신숙주는 '''"지금 일본도 갔다 왔는데, 이 바람 타고 중국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뭐"'''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고, 이 때 선원들이 배에 타고 있던 임산부[28]를 바다에 제물로 바쳐 풍랑을 가라앉히려 하자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라며 이를 막아서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여인을 살려준 이야기도 있다. 다행히 풍랑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대동기문속 한 전설에 의하면 신숙주에게는 '청의 동자'라는 수호령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청의 동자는 신숙주가 과거를 보던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신숙주를 수호했는데, 신숙주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든가 신변을 보호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신인데도 보통 사람처럼 밥을 먹었는데, 식사를 하면 먹는 소리는 나도 음식은 전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뒷날 신숙주가 죽을 때 수명이 다해서 따라 소멸했는데 신숙주가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내 제사상에 청의 동자의 상까지 차리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숙주의 무덤 옆에 청의 동자의 자그마한 묘를 하나 더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이 동자의 모습은 신숙주만 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왠지 물 건너의 모 바둑 귀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쩌면 스탠드 사용자였을지도.
야사 해동야언에 의하면 신숙주가 우의정에서 영의정이 되고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이 되자 세조가 둘을 불러서 술 자리를 가졌다. 세조가 "오늘 두 분 정승 분들께 물어볼 말이 있는데, 잘 대답하면 좋고 못 대답하면 벌주를 내리겠소"이라고 운을 떼고 "신 정승"이라고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나는 '''신(新 : 새 신) 정승'''을 불렀지 신숙주 대감을 부른 것이 아니오"라며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고, 다음에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당연히 구치관이 대답하자 이번에 세조는 "나는 '''구(舊 : 옛 구) 정승'''을 불렀지 구치관 대감을 부른 게 아니오"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메겼다. 다시 한번 "신 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구치관이 대답했는데 세조 왈, '''"이번에 나는 성으로 불렀거든?"'''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주었다.세조가 "구 정승"이라 부르자 신숙주와 구치관 둘 다 대답을 안 했는데 세조는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않다니 불경하다! 둘 다 벌주를 마셔라!"''' 라고 하며 두 정승 모두에게 술을 먹여버렸다. 간단히 말해 신숙주, 구치관의 성과 신(新), 구(舊)가 동음이의어인 것을 이용한 세조의 말장난이었다. 군신 간의 훈훈한 장면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세조가 유치해보이기도 하는 일화다. 심지어 판본 중에는 이것과 위의 저 팔 꺾기 일화를 이어붙여서, 이것 때문에 열이 받은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 하고 세조의 팔을 꺾어버렸다는 스토리가 있다. 나중에 그가 밤에도 책을 읽는다는 걸 안 한명회가 책을 읽지 못하도록 촛대를 치워서 신숙주는 그냥 잤고 그걸 본 세조가 의심을 풀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일본으로 여러 차례 사행도 다녀오며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인물답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종(조선)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말라며 당부하였다. 숱한 경험으로 일본인들의 호전성을 간파한 듯한데 해동제국기의 서문에도 당시 일본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능하고 배 타기에 익숙하며 우리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서 사신을 왕래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다. (...) 일찍이 들으니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도는 외부를 단속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내부를 닦는데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있으며,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기강에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을 여기서 증험하였다. (...)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하게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며, 곳곳에서 머물러 시일을 지체하여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문득 화를 낸다.

신숙주, <<해동제국기>> <서문>


7. 대중 매체에서


사극에서는 주로 나약한(혹은 줏대 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변절자'라는 평가는 둘째치고, 역사적으로 보면 행정, 외교, 군사와 정치 감각도 뛰어났던 만능 관료였지만 정치 모략이 주가 되는 사극에서는 상대적으로 한명회 때문에 많이 묻히는 분위기다. 더욱이 이 시대를 다룬 사극들이 계유정난이나 성종 시대의 궁중 암투에 비중을 두고 있는 나머지 세조의 치세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아서 신숙주의 활약상이 많이 나올 기회가 없었다. 안습. 그나마 신숙주의 활약상이 잘 나온 사극은 KBS 2TV한명회다. (배우는 백준기) 여기서는 세조 치세가 빠짐없이 묘사되어서 신숙주가 여진 정벌에서 활약하는 것도 묘사하고 있다.
왕과 비에서는 이정길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형식적이나마 개념인의 모습을 보인다.
대왕 세종에서는 풋풋한 청년 관료로 등장했다.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능력자라 문자 창제에 윤회가 끌어들이려 하나, 아버지 신장의 죽음이나 처조부 윤회가 병든 것이 세종 때문이라 여기고 이에 대한 반감에 거부한다. 그러나 황희의 중재로 결국 합류, 훈민정음 창제를 돕는다. 흥미로운 것은 작중 현덕왕후가 죽은 뒤 문종이 낙심하고 있을 때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문종을 위로하며 '''"저하, 기억하십시오. 저하의 뒤에도, 또한 아기씨의 뒤에도, 저희가 있을 것입니다."''' 라며 간지나게 문종과 그 아들인 단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데, 훗날 수양대군의 반정을 앞서 도운 변절자 중의 변절자가 신숙주였음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사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아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다가 추포되는 역으로 나온다. 제작진이 이 작품과 프리퀄인 여말선초를 다룬 육룡이 나르샤, 그리고 계유정난을 다룬 '샘이 깊은 물'로 용비어천가 시리즈 3부작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볼 때 훗날 신숙주의 행보를 더 강조하기 위해 그의 충성심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여인천하윤임,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맡았던 배우 이효정이 연기했다. 주연급 중 하나인 신면의 아버지로서 기존의 변절자 이미지가 아닌 능력과 야심을 겸비한 인물로 그려진다. 수양대군 편을 든 것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현전을 박차고 나와 조선을 경영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아들에게 '''"나는 이 나라를 훌륭하게 경영할 자신이 있다. 나는 수양 대군을 성군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는 장면은 나름대로 멋지다. 이제까지의 사극 속 신숙주처럼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권력지향적이고 냉정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다. 다만 수양대군에게 그런 신숙주의 냉정함과 야심은 좋은 도구일 뿐이다. ('''"대나무는 곧지만 속이 비어 있다."''') 신숙주의 후손들이 단체로 공주의 남자에 묘사된 신숙주의 모습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패소했다. 링크
영화 관상에서 주인공인 관상가 김내경이 문종의 명령을 받아 주변 대신들의 관상을 평가할때 등장했는데, 이때 신숙주에게 내린 평가는 "머리가 좋아서 관직에 오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듯 하고, '''지금으로서는 권력보다는 아녀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맨 위의 초상화를 참고하긴 했는데(본문에도 신숙주가 초상화와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컷이 있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인상으로 묘사되었다.
단종애사 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고도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 편에 붙은 것만으로도 죽일 놈인데, 안평 대군을 죽이는 것도, 단종을 귀양 보내는 것도, 마지막에 사약을 보내는 것까지 죄다 신숙주가 앞장서서 실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 사육신도 다른 놈들보다 신숙주를 제일 먼저 쳐죽여야 한다고 분개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그런데 단종애사의 다른 대목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데, 신숙주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것은 성삼문의 실제 증언이다. 가까웠다가 멀어지면 더 싫어지는 듯.

8. 가족과 후손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신면[29]은 실제로 신숙주의 차남이다.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함경도 관찰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는데 이시애군에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실록을 보면 "승지가 된지 5년이 되었어도 실수가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는 평을 받는 것을 보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다. 이 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심 겸 견제 조치로 인해 옥에 갇혀 있어서 아들의 죽음을 옥중에서 들어야 했다. 위에서 언급된 신용개는 바로 신면의 아들이다.
신면 외에 신숙주는 아들이 많았는데 장남 신주, 삼남 신찬, 4남 신정, 5남 신준, 6남 신부, 7남 신형, 8남 신필이 있었다. 이 중 장남인 신주는 일찍 사망했고 4남인 신정이 특기할만한데 신정은 그야말로 호부견자였다. '''성종옥새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 바로 위의 형 신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하면, 큰형 신주의 아들인 신종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자 이를 시기해서 조카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 본인 역시 신정을 두고 "우리 집안 말아먹을 놈은 바로 저놈이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하며 실록에서 찬평을 받고 있는 신면에 비해 신정은 실록에서도 막장이라고 인증하고 있을 정도다. 다만 그래도 아버지에겐 효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신정의 사사에 대해서는 신정 본인이 막장이기도 했지만 훈구파 영수의 자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종 나름대로의 훈구파 견제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장남인 신주의 아내가 한명회의 딸로, 즉 신숙주와 한명회는 사돈이다.
고전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재기이>를 저술한 신광한은 신숙주의 손자다.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며, 신윤복도 이 사람의 후손이다.
독립운동가신규식 선생과 민족 사학자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이 신숙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9. 영정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612호

'''613호'''

614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신숙주 초상'''
사천 흥사리 매향비
[image]
申叔舟 肖像
신숙주 초상화. 1977년 11월 15일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관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야사 용재총화에 의하면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홍경손이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넣어서 "글씨는 누구처럼, 활쏘기는 누구처럼" 이런 식으로 나가는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이 시를 보면 "눈매는 신숙주처럼 할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다. 초상화를 보면 눈매가 좀 특이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숙주의 눈매가 꽤 비범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10. 그 외


경기도 의정부시에 그의 묘가 있는데, 2006년에 '''이런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 표지판은 제대로 세워 놓았다. 참고로 안내판이 있는 저 지점에서 신숙주 묘를 찾아가려면 2.2km이라는 거리가 말해주듯이 한참 들어가야 한다. 신숙주 묘역은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답게 상당히 넓고 봉분 크기도 큰 편이다. 부인 윤씨와 나란히 묻혀 있으며 신숙주 부부의 묘역 위편에 일찍 죽은 장남 신주의 묘가 있다. 묘역 주변에 신숙주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묘역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세종 시절 이성계팔준마를 소재로 찬문과 찬시를 쓴적이 있었다. 참고로 이때 신숙주 말고 다른 집현전 학사들도 찬문과 찬시를 썼는데 1등은 성삼문이었다고 한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신숙주가 올린 팔준도에 대한 찬시】
'성인이 자리에 계셔, 삼가고 애쓰심이, 무릇 30년에
聖人在位<성인재위> 祗懼勵精<지구려정> 凡三十年<범삼십년>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고 밝으사, 사방에 염려가 없고, 조야가 태평했다
治敎休明<치교휴명> 四境無虞<사경무우> 朝野晏清<조야안청>
이에 수성하기 어려움을 알고, 안락의 해독을 생각하여, 창업의 어려움을 추모하고
於是知守成之不易<어시지수성지불이> 念燕安之鴆毒<념연안지짐독> 追惟刱業之艱難<추유창업지간난>
성조의 크신 공적을 선양할 제, 여덟 준마의 미미한 것까지, 포장하여 높이는 축에 있게 하였다
敷揚聖祖之義烈<부양성조지의렬> 乃至八駿之微<내지팔준지미> 亦在褒崇之列<역재포숭지렬>
대저 준마의 태어남이, 신비롭고 기특하다
夫駿之生也<부준지생야> 神矣奇矣<신의기의>
방성이 정기를 받아, 용들이 새끼 낳으니, 힘차게 굼실굼실, 끊임없이 움직이며
房星委精<방성위정> 虬螭孕漦<규리잉시> 扶輿磅礴<부여방박> 蜿蟺逶蛇<완선위사>
그 기세 왕성하고, 명암이 뒤섞였고
氣化淋漓<기화림리> 晦明雜遝<회명잡답>
풍우처럼 멋대로 변화하고, 음양이 그 굽히고 폄을 좇아서
風雨恣其變化<풍우자기변화> 陰陽從其闢闔<음양종기벽합>
온갖 미를 교묘히 합성하여, 이 탁월한 천조물을 이루었으니
集衆美以妙合<집중미이묘합> 成此天機之卓犖<성차천기지탁락>
의젓하고 조용하며, 윤택하고 큼직하다
旣佶旣閑<기길기한> 孔阜孔碩<공부공석>
귀 늘리면 대를 쪼개논 듯, 굽으로 차면 우박을 흩으며
耳䏉批竹<이습비죽> 蹄蹴散雹<제축산박>
모난 걸음 구에 맞고, 둥근 걸음 규에 맞네
方者中矩<방자중구> 圓者中規<원자중규>
생긴 체격 현란하다, 누운 갈기. 일어선 갈기
姿格絢練<자격현련> 鬃䰕髬髵<종려비이>
껑충껑충 술렁술렁, 휙휙 저벅저벅
駓駓袪袪<비비거거> 翼翼騑騑<익익비비>
뛰는 모습 번개인 듯, 털빛도 찬란해라
電影回合<전영회합> 神光陸離<신광륙리>
머리를 내두르면 서늘바람 불어오고, 몸을 굼틀거리면 봄구름이 일어나네
駊騀而凉颸吹<파아이량시취> 躨跜而春雲起<기니이춘운기>
한 번 울매 서역 사막이 와스스하고, 두 번 울면 기북(冀北 말의 명산지)이 휩쓸어지나니
一鳴兮胡沙浙瀝<일명혜호사절력> 再鳴兮翼北風靡<재명혜익북풍미>
이런 말은 천백 중에 하나 둘, 기린과 봉황과 미를 견준다
如是者顧千百而一二<여시자고천백이일이> 將與麒麟鳳凰而並媺矣<장여기린봉황이병미의>
준마의 쓰임이, 지극하고 크다
若夫駿之用也<약부준지용야> 至矣大矣<지의대의>
나서부터 땅에 쓰여져, 천재일우의 좋은 만남
生爲地用<생위지용> 千載際會<천재제회>
놀랜 듯 나는 듯, 등등하게 날뛴다
若恤若失<약휼약실> 驕騰沛艾<교등패애>
싱싱하게 혼자 걷고, 굼실 높이 서며
騤騤獨步<규규독보> 蟜蟜卓立<교교탁립>
빠른 걸음 바람 치듯, 펄쩍펄쩍, 저벅저벅
馺x飄颺<삽x표양> 蹕蹳躞蹀<필발섭접>
항산ㆍ화산을 흙덩이인 양 지나가고, 강과 시내를 잔으로 마시는 듯하며
塊歷恒華<괴력항화> 杯飮河瀆<배음하독>
갈기는 가는 구름을 솔질하고, 꼬리는 유성을 갈기며
鬛刷行雲<렵쇄행운> 尾捎流星<미소류성>
먼지가 발굽에 묻지 않고, 그림자가 몸을 못 따른다
塵不識蹄<진불식제> 影不及形<영불급형>
진중에 힘 바치고, 굴레에 복종한다
輸勞行陣<수로행진> 服力銜勒<복력함륵>
수레 끌어 중한 소임으로 멀리 가건만, 오히려 힘보다 덕을 일컬은다
任重致遠<임중치원> 猶不稱力<유불칭력>
사람과 일심되어, 기특한 공적을 끝내 이루어
與人一心<여인일심> 卒成奇蹟<졸성기적>
명성을 드날리고, 단청으로 전한다
馳聲策名<치성책명> 功歸丹靑<공귀단청>
희어서 길이 후세에 썩지 않고, 천추에 향기를 끼치나니
垂永世而不朽<수영세이불후> 終萬古而揖餘馨<종만고이읍여형>
이런 말은 백대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 기린각ㆍ능연각과 명성을 같이 하리로다
如是者曠百代而難遇<여시자광백대이난우> 將與麟臺煙閣而同聲矣<장여린대연각이동성의>
어허, 준마의 태어남이, 기특하다, 신비하다
欷駿之生也<희준지생야> 奇矣神矣<기의신의>
말로 다하지 못하겠고, 어허, 준마의 쓰임이
不可陳矣<불가진의> 欷駿之用也<희준지용야>
크다 지극하다. 글로 적지 못하리니
大矣至矣<대의지의> 不可紀矣<불가기의>
하늘이 이런 신물을 낳은 것은, 천백년 대의 이적을 나타내어
此天之所以産<차천지소이산> 此神物顯異於世一千百<차신물현이어세일천백>
우리 조선의 천명받는 상등 상서를 짓고자 함이었네
曠百代而爲我朝鮮受命之上瑞者也<광백대이위아조선수명지상서자야>
생각건대, 금계(金鷄 신라)가 죽고 병록(丙鹿 여(麗)의 파자(破字), 고려)이 잃어지매
想夫金雞滅丙鹿失<상부금계멸병록실>
큰 운이 가고 나라의 맥이 끊겨, 하늘의 벼리가 끊어지고
大運去國脈絕<대운거국맥절> 天網斷維<천망단유>
동녘 땅이 함몰하여, 간신들이 안에서 뽐내고
東土汨沒<동토골몰> 奸回內贔<간회내비>
도적이 사면에서 날뛰고, 북풍이 모래를 휘몰아치고
寇賊四軼<구적사질> 朔風吹沙<삭풍취사>
흑수가 물결을 날려 들리느니, 땅땅 북소리
黑水揚波<흑수양파> 鏜鏜鼙鼓<당당비고>
도처에 칭칭 징라 소리, 서로 깨물고 물어뜯고 아지직
鉿鉿鉦鑼<협협정라> 窫窳叩吻<알유고문>
박박 이를 갈아, 피가 흘러 개울처럼
鑿齒磨牙<착치마아> 殷血瀎㴽<은혈말설>
백골이 쌓여 산 같으며, 집은 모두 타서 잿더미되고
白骨嵯峩<백골차아> 居室化爲煨燼<거실화위외신>
마을이 변하여 싸움터되어, 변방 땅은 폐허되고, 도성은 황지되었네
邑井變爲戰場<읍정변위전장> 邊徼丘墟<변요구허> 神州榛荒<신주진황>
이에 이르러 세도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화가 극했으니
至是而世道之亂<지시이세도지란> 生民之禍極矣<생민지화극의>
성인이 아니면, 누가 이를 건져낼꼬
不有聖人<불유성인> 孰濟墊溺<숙제점닉>
그때에 우리 태조, 천재일우의 운을 타고 나사
時維我祖<시유아조> 運値千一<운치천일>
세상에 드문 신자와, 하늘이 주신 용지로
神姿絕世<신자절세> 勇智天錫<용지천석>
만성의 무고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세의 유업을 분연히 일으켜
愍萬姓之無辜<민만성지무고> 奮四世之遺業<분사세지유업>
북두를 응하고 천관을 나르며, 건곤의 추축을 휘둘리어
順斗極而運天關<순두극이운천관> 旅乾樞而轉坤軸<려건추이전곤축>
위무를 떨치고, 풍뢰를 질타하여
伸威奮武<신위분무> 叱風咤雷<질풍타뢰>
창끝이 가리키는 곳, 썩은 가지 꺾어지듯
天戈攸指<천과유지> 若朽斯摧<약후사최>
홍건적이 달려들어, 성읍을 쳐부수고
紅寇豕突<홍구시돌> 殘城破邑<잔성파읍>
뽐내고 으르릉대어, 멋대로 살륙하여
憑陵咆咻<빙릉포휴> 恣其燔炙<자기번자>
종사가 불바다 되고, 군왕은 파천했었다
宗社焚蕩<종사분탕> 乘輿播越<승여파월>
그때 우리 성조께서, 용맹을 뽐내어 깃발을 휘두르고
維我聖祖<유아성조> 賈勇振節<가용진절>
활을 들고 앞장 서서, 친병을 휘몰아 적을 치니
握蝥弧而先登<악모호이선등> 麾親兵而餌敵<휘친병이이적>
흉도들이 서로 짓밟아서, 수급이 십만이라
兇徒自蹈<흉도자도> 十萬其級<십만기급>
손의 칼로 마구 찍고, 말이 뛰어 성을 넘어
手劒縱斮<수검종착> 躍馬踰城<약마유성>
도망하는 놈들을 뒤쫓으니, 도적이 이에 평정되었다
追奔逐北<추분축북> 賊遂以平<적수이평>
납씨가 교활하여, 사나움을 막 부리고
納氏老猾<납씨로활> 逞其猩獰<령기성영>
변방의 간민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못 살게 굴며
䏈我邊奸<䏈아변간> 虐我邊氓<학아변맹>
막 죽이고 싹 베면서, 홍원까지 이르러서
䖍劉芟刈<䖍류삼예> 至于洪原<지우홍원>
그 세가 치열하여, 깨물어 삼킬 뜻이었다
厥勢孔熾<궐세공치> 志在噬吞<지재서탄>
그때에 우리 성조는, 지혜를 내고 기회를 타
維我聖祖<유아성조> 運智應機<운지응기>
단기로 내쳐 나아가서, 장수를 베고 기를 뺏으며
單騎梃進<단기정진> 斬將搴旗<참장건기>
입을 쏘고 겨드랑이를 쏘아, 마른 가지 꺾듯 수염 뽑듯
射口射腋<사구사액> 拉槁摘髭<랍고적자>
적이 여러 번 패전에 움츠러져, 도망가 숨만 붙어
累敗窮縮<루패궁축> 犇竄假息<분찬가식>
교활한 놈 넋을 잃고, 종신토록 심복했다
老猾褫魄<로활치백> 終身心服<종신심복>
머나먼 저 동녕은, 망한 원 나라 잔당이다
漠彼東寧<막피동녕> 亡元之蘖<망원지얼>
초황령(草黃嶺 함흥에 있다)ㆍ설한령(薛罕嶺 강계에 있다)이, 높이 솟아 험하였고
草黃薜罕<초황벽한> 與天盤折<여천반절>
출렁거리는 압록강이, 남북으로 경계했었다
鴨江澎濞<압강팽비> 限彼南北<한피남북>
고려 왕(王 우왕)이 태조께 명하여, 먼 땅을 회복하라커늘
王命我祖<왕명아조> 圖恢遠略<도회원략>
원수로서 출정할 제, 위령이 떨쳤었네
元戎啓行<원융계행> 威靈震疊<위령진첩>
하늘에 뻗친 자색 기운이, 점사에도 나타났고
漫空紫氣<만공자기> 占辭攸屬<점사유속>
말똥구리가 바퀴를 막은 듯이, 기를 바라보자 적이 갑옷을 벗고 항복했네
螳臂拒轍<당비거철> 望旗釋甲<망기석갑>
완악한 추장이 잘못을 고집하면서, 오히려 올라성을 보호하려 하였네
頑酋執迷<완추집미> 猶保兀刺<유보올자>
저 올라성은, 천생 험준한 곳
維彼兀刺<유피올자> 峻嶮天設<준험천설>
만장 절벽에, 성무 한 번 번쩍이매
峭壁屹屹<초벽흘흘> 聖武赫赫<성무혁혁>
성중이 저희끼리 궤멸되고, 사면으로 나와 항복하여
孤城中潰<고성중궤> 降附四集<강부사집>
와글와글 부산함이, 불나방이 촛불에 날아들 듯
霍繹紛泊<곽역분박> 宵蛾赴燭<소아부촉>
덕과 위엄이 멀리 퍼져, 북방을 완전히 토평했다
仁威遠暢<인위원창> 克淸朔漠<극청삭막>
머나먼 저 동해는, 섬 오랑캐 소굴
逖彼東溟<적피동명> 島夷之窟<도이지굴>
배 타기에 나고 자라, 사납고 영리하며 날쌔고 빨라
生長舟揖<생장주읍> 猂黠飄疾<한힐표질>
죽음에 나아가기를 집에 돌아가듯, 이만 쫓아 다니는 터
視死如歸<시사여귀> 維利是逐<유리시축>
쥐 도적질ㆍ개 도적질, 우리 해변의 틈서리로 쳐들어와
鼠竊狗盜<서절구도> 投我邊隙<투아변극>
돛대가 바다를 덮고, 배들이 마치 베를 짜는 듯
帆竿蔽海<범간폐해> 舳艫如織<축로여직>
왕이 태조께 명하여, 성화같이 달려가 치게 하니
王命我祖<왕명아조> 星馳往擊<성치왕격>
적의 무리 구름처럼, 지리산 옆에 진쳤겠다
賦徒雲屯<부도운둔> 智異之側<지이지측>
우리 무용 드날릴 제, 한 살[矢]에 적이 기가 질려
我武惟揚<아무유양> 一箭氣奪<일전기탈>
낭패하여 도망쳐, 험한 곳에 몰려 지켜
敗覆狼狽<패복랑패> 就險自固<취험자고>
깎은 듯한 절벽에, 검과 창이 섞여 쏟아지거늘
峻崖嶙峋<준애린순> 劒槊交注<검삭교주>
흰 칼을 빼어들고 말을 채찍질하니, 붉은 번갯불이 해에 번쩍
白刃鞭馬<백인편마> 紫電干日<자전간일>
준마 한 번 솟구쳐 오르니, 천 척 절벽이 평지인 듯
駿騰一躍<준등일약> 險失千尺<험실천척>
칼을 맞고 떨어지는 적이, 골짜기를 채우고 메워
迎刃崩墜<영인붕추> 塡坑滿谷<전갱만곡>
태산에 눌린 알과 같이, 씨도 없이 다 죽었네
若山壓卵<약산압란> 靡有遺孑<미유유혈>
섬 오랑캐 회개치 못하고, 또 관서에 입구(入寇)하여
島夷罔悛<도이망전> 又寇關西<우구관서>
신천ㆍ문화ㆍ안악ㆍ봉산이, 모두 다 어육되고
信文安鳳<신문안봉> 毒慘鯨鯢<독참경예>
여러 장수들 달아나서, 적의 칼을 못 막았네
諸將奔潰< 제장분궤> 鋒莫敢嬰<봉막감영>
성조(태조)께서 명을 받아, 동정에서 싸우실 제
聖祖受命<성조수명> 戰于東亭<전우동정>
싸움이 한창일 때, 진흙에 빠졌으나
方事之殷<방사지은> 阻于泥淖<조우니뇨>
준마 한 번 치뛰니, 대번에 솟구쳐 나와
龍駒蹀足<룡구접족> 一奮而趒<일분이조>
활시위 소리 나자 떨어지는 열일곱 놈, 모두 왼눈 맞았었네
應弦十七<응현십칠> 皆左其目<개좌기목>
적이 놀라 흩어지며, 저희들끼리 짓밟는 꼴
賊駭而散<적해이산> 爭相轥轢<쟁상인력>
성조께서 말에서 내려, 술마시며 풍악을 치니
聖祖下馬<성조하마> 命酒張樂<명주장악>
남은 적들 험한 데 가서 몰려 의지했다가, 세가 궁하여 충돌하매
遺燼投險<유신투험> 勢窮衝突<세궁충돌>
쏘는 살이 자리 앞에 무수히 떨어져도, 의기가 태연자약
矢集坐前<시집좌전> 意氣自若<의기자약>
천천히 휘하에 명하시와, 남은 적을 섬멸했다
徐命麾下<서명휘하> 遂殲餘賊<수섬여적>
섬 오랑캐 회개치 못하고, 또 남도에 침범했네
島夷岡悛<도이강전> 又寇南道<우구남도>
험함도 지킬 틈 없고, 성도 보전할 겨를이 없어
嶮不睱守<험불하수> 城不睱保<성불하보>
무인지경같이 치고 함락하여, 풀처럼 베며 깎으며
攻陷若空<공함약공> 芟薙如草<삼치여초>
여러 고을을 무찌르고 불사르며, 운봉까지 이르렀네
屠燒州郡<도소주군> 至于雲峯<지우운봉>
성조께서 명을 받아, 흉적을 쓸기 맹세하니
聖祖受命<성조수명> 誓掃頑凶<서소완흉>
정성이 해를 꿰어, 흰 무지개 뻗었었네
精誠貫日<정성관일> 有白其虹<유백기홍>
천 리가 폐허되고, 강시만이 쌓였거늘
千里索漠<천리색막> 僵屍相積<강시상적>
성조께서 측은하사, 침식을 폐하셨네
聖祖惻然<성조측연> 爲廢寢食<위폐침식>
이에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인월역에서 싸우실 제
乃督群帥<내독군수> 戰于引月<전우인월>
위무를 드날려서, 사졸의 앞장 서서
振威耀武<진위요무> 身先士卒<신선사졸>
적진을 함락하고 포위를 무너뜨려, 날랜 장수(왜장 아지발도(我只拔都))를 쏘아 죽이니
陷陣潰圍<함진궤위> 殪彼驍將<에피효장>
적군이 칼날이 꺾여져서, 감히 못 대항했네
鋒摧刃折<봉최인절> 莫我敢抗<막아감항>
온 나라가 기뻐하여, 개선가로 맞이했었던 것이다
擧國欣歡<거국흔환> 迎我凱唱<영아개창>
섬 오랑캐 또 개전치 않고, 또 함흥과 홍원에 침범해서
島夷罔悛<도이망전> 又寇咸洪<우구함홍>
고래처럼 날뛰고 미친개처럼 충돌하니, 여러 군이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鯨奔猘突<경분제돌> 諸軍望風<제군망풍>
싸움도 한 번 못해보고, 양이 범에게 물리는 듯
不敢交綏<불감교수> 若虎驅羊<약호구양>
왕이 명하여 평정하게 하니, 성조께서 나가셨다
王命于襄<왕명우양> 聖祖是將<성조시장>
일곱 살[矢]로 승리를 점치니, 군중이 환호했다
七箭卜勝<칠전복승> 軍中歡呼<군중환호>
지세를 보아 복병을 두고, 고삐를 늦추어 천천히 나가다가
因地設伏<인지설복> 按轡徐移<안비서이>
취라로 적을 놀래니, 적이 간담이 떨어져서
螺聲讋賊<라성섭적> 破膽裂腑<파담렬부>
고기가 솥에서 노닐 듯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거늘
魚游於鼎<어유어정> 東西相聚<동서상취>
성조께서 여유를 보이고자, 안장을 끌러놓고
聖祖示閑<성조시한> 從容解鞍<종용해안>
오라고 유인하여, 냅다 싸워 진퇴할 제
誘致其來<유치기래> 轉戰盤桓<전전반환>
사면의 복병이 일어나니, 적군이 모두 그물 안에 떨어져서
四伏並起<사복병기> 若隳于羅<약휴우라>
뛰어 무너지고 서로 짓밟아, 송장이 너저분, 그리하여 동해변이 내 산 되고 내 언덕 되었네
奔崩蹂躡<분붕유섭> 籍籍他他<적적타타> 我岡我陵東海之阿<아강아릉동해지아>
대명이 장차 바뀌려 하니, 하늘이 우왕의 넋을 빼앗아서
大命將革<대명장혁> 天奪其衷<천탈기충>
저 앙큼스러운 애(우왕)가 자량치 못하고, 숫제 큰 나라를 공격코자
彼狡不量<피교불량> 大邦是攻<대방시공>
6월에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지향하니
六月稱兵<륙월칭병> 指遼之東<지료지동>
뭇 신하들 위태로이 여기고, 인심이 흉흉한데
群寮岌岌<군료급급> 萬姓洶洶<만성흉흉>
간절히 충고하나, 이 귀먹어 못 들은 체
告之雖切<고지수절> 聽我若聾<청아약롱>
외로운 섬에 군사를 주둔하니, 마침 큰 장마 져서
屯兵孤島<둔병고도> 霜潦澒浵<상료홍동>
진퇴가 난처하고, 온 군사가 다 불평했다
進退維谷<진퇴유곡> 大小悉恟<대소실흉>
성조께서 의를 드시니, 흰 깃살에 붉은 활
聖祖擧義<성조거의> 白羽彤弓<백우동궁>
만 사람이 경하하여, 서로 도모하지 않으나 한마음이었으며
萬口相慶<만구상경> 不謀而同<불모이동>
멀리 야인(野人 여진)까지, 천 리 길에 따라왔으며
爰至野人<원지야인> 千里影從<천리영종>
늙은이ㆍ어린이 손을 잡고, 미음 그릇 들고 맞았으며
老幼相携<로유상휴> 壺漿以迎<호장이영>
사특한 것들 숙청할 제, 시정도 안 놀랬네
蕩滌邪穢<탕척사예> 巿肆不驚<불사불경>
난을 헤치고 반정하여, 병기를 다 거두니
拔亂反正<발란반정> 戢武韜兵<집무도병>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했네, 무릇 이 몇몇 일은
國以之定民以之寧<국이지정민이지녕> 凡是數者<범시수자>
다 우리 태조의 크고 높으신 공적이, 탁월히 성취된 것
寔皆我太祖豐功峻烈<식개아태조풍공준렬> 卓卓有成者也<탁탁유성자야>
깊고 두터운 은택이, 생령들에게 젖어든 것
深恩厚澤<심은후택> 浹于生靈者也<협우생령자야>
경을 쌓고 덕을 심어, 뿌리가 깊고 근원이 멀어
積慶樹德<적경수덕> 根深源遠<근심원원>
후세 자손들이 천만억 년간 의지할 바, 그러나 이것들은 다만 그 대략일 뿐
而爲後世子孫千萬億載之所憑者也<이위후세자손천만억재지소빙자야> 然此亦特其大略耳<연차역특기대략이>
예컨대 저 달천의 이김과, 철관의 승전
如㺚川之勝<여달천지승> 鐵關之捷<철관지첩>
해풍의 싸움과, 요양을 함락시켰음 등
海豐之戰<해풍지전> 遼陽之拔<료양지발>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가는 곳마다 이겼으니
大小百戰<대소백전> 所向輒克<소향첩극>
이것이 비록 신성한 무략에서,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것인가
此雖出於聖武神略<차수출어성무신략> 亦豈人力之所能及哉<역기인력지소능급재>
그때에, 용맹 있는 무사들과
于斯時也<우사시야> 材勇之士<재용지사>
지략 있는 사람으로서, 일기와 일능이 있으면
智謀之彦<지모지언> 苟有一技一能<구유일기일능>
각기 재주를 바치며 경쟁하여, 용의 비늘을 잡고 봉의 날개에 붙어
各爭售而竸扇<각쟁수이경선> 攀鱗附翼<반린부익>
앞뒤에 분주하며, 많이 모여 있고
奔走後先<분주후선> 叢叢林林<총총림림>
이리저리 움직이며, 좌우로 잡고 손을 끌어
紜紜紛紛<운운분분> 左右提挈<좌우제설>
함께 대훈을 협찬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성인을 내어 어려운 시국을 구하려면
共贊大勳<공찬대훈> 蓋天之生聖人以救時艱也<개천지생성인이구시간야>
반드시 영웅ㆍ호걸들을 내어 그를 좇게 하고
必生英雄豪傑以爲之從<필생영웅호걸이위지종>
또한 반드시 좋은 상서ㆍ신령한 물건을 내어 그로 하여금 쓰게 함이다
亦必生休祥神物以濟其用<역필생휴상신물이제기용>
이로 보면 여덟 준마가 났음은, 곧 하늘의 뜻이요
此八駿之生<차팔준지생> 乃天意也<내천의야>
모두 우리 태조께서 일어나실 것을 도움이었다, 막상 두 진이 교전하려
而無非所以佑我太祖之興者也<이무비소이우아태조지흥자야> 方其兩陣交綏<방기량진교수>
북소리 쾅쾅 울리고, 살기가 하늘을 찌르며
鼖鼓雷轟<분고뢰굉> 殺氣干天<살기간천>
풍운이 첩첩할 때, 기특한 꾀와 임시의 변통으로
陣雲屛屛<진운병병> 出奇制變<출기제변>
기회를 다투고 형세를 노려, 장사와 용사들이
爭機竸角<쟁기竸각> 壯士猛夫<장사맹부>
곰같이 잡고 범처럼 할퀴며, 서릿발 같은 칼과 창에
熊挐虎攫<웅나호확> 白刃霜磨<백인상마>
빗발처럼 떨어지는 화살들, 수선거리기는 들끓어서
飛鏃雨落<비족우락> 紛紜沸渭<분운비위>
구름이 뭉치고 벼락이 터지는 듯, 천만 군병이 와아 와아 소리치고
雲合霆發<운합정발> 濱駍駖礚<빈평령개>
가로 세로 뒤섞여 맞붙어, 성패가 잠깐 사이에 달리고
縱橫膠臈<종횡교랍> 成敗懸於俄頃<성패현어아경>
생사가 순식간에 결정될 때, 늠름하신 성조께서
生死決於呼吸<생사결어호흡> 桓桓聖祖<환환성조>
매처럼 날치시어, 이리 치고 저리 치면, 그 앞에 당할 자 없네
奮我鷹揚<분아응양> 馳堅突衆<치견돌중> 所指無疆<소지무강>
벼락과 번개가, 불을 토하듯 채찍을 갈겨
霹歷列缺<벽력렬결> 吐火施鞭<토화시편>
만 사람이 모두 뒷걸음치매, 혹은 마음대로 출입하네
萬人辟易<만인벽역> 肆意周旋<사의주선>
민첩하고 재빠르게, 안개가 흩어지고 연기가 사라지는 듯
焂䎶倩浰<숙이천리> 霧散煙銷<무산연소>
찬 서리를 날려 나뭇잎을 지게 하고, 맹렬한 불에다가 털을 태우는 듯
飛嚴霜而脫葉<비엄상이탈엽> 擧烈火以燎毛<거렬화이료모>
거기 맞닥치는 자 어느 강함이 안 꺾이며, 거기 부딪치면 어느 굳음이 안 부숴지리
當之者何剛不折<당지자하강부절> 觸之者何堅不碎<촉지자하견불쇄>
파죽지세로도 그 형세를 비유치 못할 것이요, 돌을 굴림으로도 그 쾌함을 논하지 못할지니
破竹不足以諭其勢<파죽부족이유기세> 轉石不足以論其快<전석불족이론기쾌>
대개 세상에 없는 큰 자질을 가진 분은, 마땅히 비상한 천명을 받는 법이요
蓋有不世之資者<개유불세지자자> 當受非常之命<당수비상지명>
세상에 없는 큰 공을 세우는 이는, 마땅히 비상한 경사를 누리게 마련이다
建不世之功者<건불세지공자> 當享非常之慶<당향비상지경>
우리 태조께서 쇠란의 때를 만나, 하늘이 주신 성으로써
我太祖値衰亂之季<아태조치쇠란지계> 以天縱之聖<이천종지성>
애쓰심이 지극하셨고, 공업이 다툼이 없어
勤勞旣至<근로기지> 勳業無竸<훈업무경>
위엄이 임금을 떨게 하고, 공이 상을 초월했으니
威挾震主<위협진주> 功戴不賞<공대불상>
천명이 돌아가는 곳, 인심이 모두 우러러서
惟天命之<유천명지> 所歸亦人心之所仰<소귀역인심지소앙>
드디어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하여, 끝내 집을 변화하여 나라를 이룩하고
遂應天而順人<수응천이순인> 終化家而爲國<종화가이위국>
당세의 남은 덕택을 펴시어, 길이 만세토록 흘리셨으나
演當世之餘澤<연당세지여택> 流萬葉而不渴<류만엽이불갈>
맨발로 뜀은 원래 무를 연습하는 것이요, 벽돌을 나름은 수고를 단련하는 것이므로
然跣躍所以習武<연선약소이습무> 運甓所以肄勞<운벽소이이로,
)한가하신 때 사냥을 납시니, 거저 놀이가 아니었다
因閑圍獵<인한위렵> 匪以遊遨<비이유오>
때로 벌판을 달리고, 다음 언덕을 지나
時聘廣漠<시빙광막> 乃歷林皐<내력림고>
혹은 벌과 산이 일[起]락 엎드락한 데로, 혹은 언덕이 구불구불 이은 데로
原隴起伏<원롱기복> 丘陵牽聯<구릉견련>
혹은 진펄이 울툭불툭, 밑에는 깊은 소
罷池陂陁<파지피타> 下屬于淵<하속우연>
혹은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늘에 달린 듯한 뵈는 산은 끝으로
石壁神截<석벽신절> 脩崖天懸<수애천현>
혹은 격한 여울이 못을 이루어, 늠실늠실
激湍成澤<격단성택> 浩汗㶀䔽<호한교애>
서미도 주검을 못 남기고, 열자도 발을 디디지 못할 곳으로
胥靡不能以遺死<서미불능이유사> 御寇不能以展足<어구불능이전족>
혹 큰 못에 다다르면, 갈대가 우거지고
或臨大澤<혹림대택> 蒹葭蓊鬱<겸가옹울>
얼음이 갓 얼었는데, 가벼운 비단을 엷게 편 듯
淵冰初合<연빙초합> 輕羅布薄<경라포박>
맹수가 안 보이는 데 엎드렸다가, 변이 재갈에 나기도 하고
猛獸蔽伏<맹수폐복> 變生銜橜<변생함걸>
혹 얼음판이 기울고 미끄러운데, 혹은 태산 준령이
或當冰坂傾側險滑<혹당빙판경측험활> 或當峻嶺<혹당준령>
드높고 가로질려, 새 짐승이나 살 곳
峌X嶻㠔<질X절배> 飛走之所栖托<비주지소서탁>
인적이 못 미칠 데를, 우리 성조께서는
人迹之所不及<인적지소불급> 維我聖祖<유아성조>
고삐를 놓고 왕복하사, ‘앞으로 가라’ 하면 나아가고
縱轡往復<종비왕부> 曰前而前<왈전이전>‘
물러가라’ 하면 물러나서, 도에 맞는 일거일동이
曰却而却<왈각이각> 周旋合度<주선합도>
좌로 우로 척척 맞아, 별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이르며
左右中節< 좌우중절> 星流歘至<성류훌지>
공처럼 구르고 번개같이 번뜩여, 화살을 헛되이 놓는 법이 없고
圜轉電掣<환전전체> 矢不虛散<시불허산>
맞추면 꼭 눈알을 뚫어, 길짐승은 언덕에 머리 두고 화살을 받고
中必決眥<중필결자> 走獸首丘而斂羽<주수수구이렴우>
나는 새는 공중에 돌다가 피를 뿌리니, 왕량(王良 명기사)ㆍ조보(造父 명기사)의 무리와
飛禽盤空而洒血<비금반공이쇄혈> 王良造父之徒<왕량조부지도>
분ㆍ육ㆍ오획(烏獲 이름난 장사들)의 무리들도, 손을 여미고 숨을 헐떡이며
賁育烏獲之屬<분육오획지속> 斂手喘息<렴수천식>
앞에 와서 굴복하리니, 이는 비록 성인의 신무이나
邀瓻受誳<요치수굴> 是雖聖人之神武<시수성인지신무>
또한 준마의 위대한 공적이다, 저 깎아지른 절벽, 둘러 빠지는 진흙구렁 속에서
抑亦神駿之偉績<억역신준지위적> 當其懸崖峻絕泥淖束阸<당기현애준절니뇨속액>
위험이 경각 창졸 간에 닥쳤을 때, 제 아무리 모사와 맹장으로도
危在頃刻倉卒之際<위재경각창졸지제> 縱有謀臣猛將<종유모신맹장>
제 재주를 부릴 틈이 없겠으니, 이로 보면 준마가 성체를 붙들고 보우함이
亦無所措其技矣<역무소조기기의> 是則神駿之扶佑聖躬<시즉신준지부우성궁>
혹 사람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전하께서 여덟 준마를 그림에 거두어서
或有非人之所可企者也<혹유비인지소가기자야> 此我殿下之所以收八駿於繪事<차아전하지소이수팔준어회사>
썩은 뼈에게도 신공을 생각하심이니
錄神功於腐骨者也<록신공어부골자야>
이는 대개 효자는 어버이가 사랑하시던 개와 말을 잊지 않음이요
兹蓋孝不遺於犬馬<자개효불유어견마>
교훈은 후손을 편안하게 하려고 남겨, 명과 함께 궤석에 붙여 놓고
謨乃恢於燕翼<모내회어연익> 嫓嚴銘於几席<嫓엄명어궤석>
간절한 경계를 썩은 밧줄에 두심이요, 이제 보건대 새 그림이 하늘에서 내려 펼친 듯
存切戒於朽索<존절계어후색> 觀夫新圖天闢<관부신도천벽>
끼친 빛이 번쩍하니, 바람과 서리가 비단에 일고, 조화가 붓에 생겨
遺光儵爚<유광숙약> 風霜起練<풍상기련> 造化生筆<조화생필>
이미 죽어서 흙 속에 파묻힌 모습을 일으켜, 일세의 위관을 솟구쳤네
起塵土之幽姿<기진토지유자> 聳當世之觀覿<용당세지관적>
형모는 아스름하나, 기상은 늠름, 구름을 가로 지르고 바람을 쫓는 듯
形貌靉靆<형모애체> 氣象鬱勃<기상울발> 橫雲追風<횡운추풍>
번개가 치고 서리가 엉긴 듯, 기린이 놀고 용이 뛰어오르며
發電凝霜<발전응상> 麟游龍騰<린유룡등>
표범은 검고 사자는 누른 듯, 놀이 겹치고 비단을 쌓은 듯
豹玄獅黃<표현사황> 重霞累錦<중하루금>
빛나는 비단에 함께 그려 보물들이 나란히, 공이 같은 다른 놈들이
沓璧連璋<답벽련장> 同功異體<동공이체>
서기를 모으고 상서를 드날리며, 위풍이 늠름하고
集瑞騰祥<집서등상> 威風懍懍<위풍름름>
기염이 당당한데, 백전에 상한 흔적, 아직 살촉이 박혀 있고
峻焰煌煌<준염황황> 百戰瘢耆<백전반기> 尙帶遺鏃<상대유족>
드날리며 날치던 자태, 어제런 듯 여실하매
搶攘之態<창양지태> 視之如昨<시지여작>
장한 기운에 보는 사람 기가 질려, 간담이 서늘, 머리가 쭈뼛
壯氣讋人<장기섭인> 膽寒髮立<담한발립>
놀라 달아난 혼과 넋이, 며칠 만에야 진정될 듯
魂驚魄褫<혼경백치> 彌日而定<미일이정>
이는 다만 여덟 준마의 재강일 뿐으로, 오히려 사람의 시청을 움직이거늘
此特八駿之糟粕<차특팔준지조박> 尙能動人之視聽<상능동인지시청>
당시의 기상을 상상하면, 천년 뒤에도 경의를 일으키리
想當時之氣像<상당시지기상> 隔千齡而起敬<격천령이기경>
이는 신령한 물건의 극치이나, 사람에 있어서도 쉽지 않다
是神物之極致<시신물지극치> 在夫人而亦不易<재부인이역불역>
하필 몸에 날개가 돋치고 그림자가 열이어야, 기이타 할 것인가
又何必肉趐十影<우하필육혈십영> 然後始爲之異哉<연후시위지이재>
아아, 물건이 각기 만남이 있고, 만남이 각기 때가 있나니
嗚呼<오호> 物各有遇<물각유우> 遇各有時<우각유시>
나서 만나지 못하면, 소금 수레에 곤욕을 당하고
生不得遇<생부득우> 則鹽車自足相困<즉염차자족상곤>
만남의 때를 못 얻으면,북 수레에 매어지기 족할 뿐이요
遇不得時<우부득시> 則鼓車徒足見縻<즉고차도족견미>
혹 의장에 참예해 섰더라도, 한갓 콩이나 조나 먹고 배부를 뿐
雖或參於立仗<수혹참어립장> 亦空飽於豆粟<역공포어두속>
한 번 크게 울려 해도,끝내 맘대로 안 되는 것
苟欲一鳴<구욕일명> 終不可得<종불가득>
이제 이 여덟 준마는, 그 출생이 마침 성조께서 용처럼 일어나실 때였고
今夫八駿<금부팔준> 其生也當聖祖之龍興<기생야당성조지룡흥>
그 죽은 뒤에도 성주(聖主 세종)의 추념을 의탁하여, 때를 만나고 의탁할 곳을 얻었으니
其死也托聖主之追念<기사야탁성주지추념> 得時遇而得托<득시우이득탁>
마땅히 영세토록 유감이 없을지로다, 부를 마치고 또 노래하여 이르되
宜永世而無憾<의영세이무감> 賦已復爲之謌曰<부이부위지가왈>
어허, 용인 듯 준마의 새끼, 하늘이 주셔서 내려왔도다
若有龍兮驥之子<약유룡혜기지자> 其之來兮天所俾<기지래혜천소비>
풍운을 일으키고 뇌우 달릴 제, 어허. 준마여, 용의 벗일세
風雲澀譶兮雷雨走<풍운삽답혜뢰우주> 若有駿兮龍之友<약유준혜룡지우>
살아서 신이 있고 죽어서 이름이 있다, 어허, 준마로고, 용의 정일세
生有神兮死有名<생유신혜사유명> 若有駿兮龍之精<약유준혜룡지정>
이름이 만고에 변치 않으니, 어허. 준마여. 용의 무릴세'

이름이 만고에 변치 않으니, 어허. 준마여. 용의 무릴세' ||}}}

11. 관련 문서



[1] 본래 봉상시에서는 문성, 성헌, 문렬을 추천했으나 이조 판서 정효상이 이를 무시하고 문충을 추천했다.[2] 신포시의 아버지 신덕린은 문과 급제자이며 이색, 정몽주와 친하게 지냈는데 정몽주는 신포시의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다.[3] 그의 동기 중 1명이 이방원이다.[4] 다만 장원 급제를 했다면 33년으로 확 준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에 제수되기 때문이다. 사실 종9품에 제수되는 것도 과거 급제자 33인 중 최하위 등급을 받은 이들일 뿐 나머지는 등수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종9품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여기다가 조선 시대 관리가 되는 법은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직자라면 하급 관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다만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한다면 청요직에 갈 수 없었고 당상관이 되는 길도 매우 어려웠다.(3년에 1번씩 보는 정규 시험 외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열어서 33명씩을 선발하였는데 이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이 왕의 선택을 받아서 당상관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선택을 받아도 대간들의 비판을 받아서 철회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하급 관리로 먼저 관리 생활을 시작하고 틈틈이 과거를 준비해서 시험보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이렇게 급제하면 하급관리로서의 경력도 인정받아서 곧바로 종6품 이상으로 승진이 가능하였다.(조선은 정3품 당하관까지 일정 근무 일수를 채우고 근무 평가에 따라서 품계가 승진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조직되어 있었다.)[5] 그말인즉슨 세종은 더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세종은 신숙주가 있는 걸 알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남아 있었다는 말도 있다.[6] 창제 작업에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로 중국에서 사신으로 갈 때 세종이 부탁한 자료를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훈민정음은 세종과 가족이 비밀리에 만든 프로젝트이고 신하들은 아무도 몰랐었다. 쉽게 말해 훈민정음은 세종과 그 가족이 만든 문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과 훈민정음 문서 참조.[7] 단적으로 안평대군이 꾼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신숙주의 찬이 붙어 있다.[8] 서문을 써줬다는건 곧 "나는 이 사람이 쓴 이거 좋게 평가함"(사실상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좋다고 평가하는 것) 이라고 하는 것이다.[9] 실제로 김종직이 조의제문으로 단종을 옹호했다 처형당했다.[10] 소위 '쫓겨난 왕자'에 대한 동정은 이 동정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를 떠나서 복잡하다. 심지어 전두환백담사에 갔을 때도 불쌍하다는 여론이 돌았던 것이 현실이라....[11] 그런데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다음에 발표한 소설이라서, 친일파 비판 그런거 없이 그냥 재미있으라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단종애사와 역시 이광수가 쓴 소설 세조대왕만 놓고 비교하면 친일을 하면서 바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민족개존론이 들어가면 해석이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덤으로 같은 친일파인 김동인은 세조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대수양을 썼다.[12] 정상적인 국가의 고명절차이기 때문에 고명은 최고위직을 대상으로 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정승이나 정승 후보군인 찬성인 것이 이 때문. 또한 정승이나 찬성이 아니라면 고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참찬이나 판서 뿐이다.[13] 애초에 문종은 단명했기 때문에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과로와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뿐 체격도 크고 건장한 사내였다. 세종 본인도 당뇨와 격무에 시달리면서 당시 기준으론 살만큼 충분히 살았는데, 병치레를 조금 할지언정 아직 젊은 아들이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문종은 즉위 전인 세자 시절부터 7년 이상을 국정을 총괄했던, 사실상 이미 군주였다. 또한 문종은 적장자로서 정통성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그 아들인 단종은 출생 당시부터 왕의 세손으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즉, 세종이 죽을 당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한창때고 능력도 뛰어난 적장자가 차기 왕으로 오를 예정이고,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적장자인 손주가 왕에 오를 예정이라 정통성에서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고, 나라도 잘 굴러가고 있는 시점이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례적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 절차를 밟은 것은 실록에 남아있는 사실이나, 멀쩡히 잘 살아있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신하들에게 손주를 부탁한다고 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신하라도, 단종에게 있어 태종이 탄탄하게 다져준 왕권을 누리고 있는 아버지 문종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있을까?[14] 김택영의 역사관이나 이전 역사서에서 보이는 한계 같은 것은 일단 넘어가자. 다만 일부 김택영 관련 서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구한 말 3대 역사가' 운운은 완벽한 과장이다. 이 사람 책에서는 일본의 근대 역사서를 생각없이 번역한 바람에 우리 나라 역사를 쓰면서 임나일본부를 긍정한 부분까지 존재한다.[15]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택영은 심지어 이성계조선을 세운 것을 고려에 대한 찬탈이라고 표현했다. 21세기에서 보는 제3자적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때는 그 이성계의 후예 조선 왕가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시기이므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은 당시 한국 유림에게서 사적(史賊)이라고 불리면서 매장당한다.[16] '정통성이라는 것이 대수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정치에서 명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실적으로 덮을 수 없는 것이 명분이며, 실적을 쌓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행사하고 차지하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분권화되고 복잡해진 정치체제에서도 명분과 적법성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하물며 조선과 같이 왕의 정통성이 핵심인 국가에서 이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은 명분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이는 곧 해당 행위가 용납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17] (비교적) 최근의 역사학과 넓은 범위의 인문학, 사회과학에서 강조하는 관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18]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 시호까지도 정반대다.[19] 이걸 훈민정음 창제와 엮는 경우가 차고 넘치는데, 이 때는 이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1년도 지난 뒤의 이야기다.[20] 조선의 화폐 유통은 시장 경제의 미발달로 인해 태종, 세종대왕은 물론 뒷날의 왕이나 재상들도 번번이 실패했다. 화폐 유통은 뒷날 숙종 때에나 정착된다.[21]세종대왕조차 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리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가 피본 적이 있었다.[22] 하지만 남이의 옥사는 신숙주나 한명회가 자신들을 위해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시킨 것이다. 신숙주는 1468년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그가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남이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이 본인이 처신을 잘못해서 자초한 점이 훨씬 크다.[23] 이 때문인지 신숙주는 종묘에 '직속 주군'이란 이미지가 강한 세조가 아닌 성종과 함께 배향되어있다.[24] 둘 다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주군의 정권 장악에 큰 공을 세운 브레인이자 명재상이었으며, 자기가 모셨던 주군에게 순종적으로 처신해서 주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간혹 사소한 일로 면직된 적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25] 사신이 대마도까지 갔다가 대마도에서 지금 일본 내부는 난세라 제대로 된 중앙정부도 없고, 갔다가는 괜히 험한 꼴만 당할거란 충고를 듣고 그대로 돌아옴.[26] 물론 자기 이름을 공에 써서 차고 논 아이들을 대범하게 넘어가 주고, 궁궐 구경하다가 잡히거나 심지어 자기 침전에 흘러들어온 사람까지 죄를 묻지 않고 방면해 준 태종의 일화나, 신숙주가 술김에 왕에게 관절기(...)를 걸고도 넘어간 일이 있듯이 일단 왕 본인이 상관 없다 하면 넘어갈 수 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앞의 예들도 유교 왕권 시대에 진지하게 걸고 넘어간다면 얼마든지 엄벌에 처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조선도 결국 인간이 사는 시대였으니까. 세종이 기특해서 해 준 일인데 그걸로 처형시키면 그 자체가 넌센스인지라 설령 정말 곤룡포를 덮었다 해도 그걸로 다짜고짜 ‘너 사형’ 하는 전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미친듯이 무서웠겠지만.[27] 다만 술 이야기는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사행록에도 왕왕 등장한다. 일본 측이 술을 보내왔는데 향기롭고 맛있었다거나, 무슨 술이 유명하다거나, 어느 마을을 지났는데 맛 좋은 술이 나는 곳으로 전국에 이름이 났다는 등등.[28] 더욱이 이 임산부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온 여자였다.[29] 실제로 공주의 남자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나쁘게 묘사된 인물이 신면이다. 신면과 관련된 장면의 90%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오히려 이시애의 난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진정한 무인이 더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