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경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훌륭한 목민관이자 국방통, 을묘왜변 당시 무능했던 장수들과 달리 책임감 있게 군을 지휘하여 왜적을 격퇴한 인물이다. 청백리이자 영의정까지 지낸 이준경의 친형이다.
2. 생애
1498년(연산군 4)에 태어났다. 이윤경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폐비 윤씨에게 직접 사약을 갖다준 인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결국, 1504년 갑자사화로 가족 전체가 유배를 당한다. 1506년 연산군이 쫓겨나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윤경은 1534년(중종 29) 과거에 합격한다. 예문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일하다가, 1543년 의주부윤에 임명되면서 국방을 맡게 되었다.
1544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윤경은 대사간[1] , 동부승지[2] 를 역임하였다. 대윤과 소윤간의 대결구도가 이루어지자, 대윤 제거에 가담하였고 3등 공신에 봉해진다. 그러나 소윤의 핵심인물 이기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하다는 의견을 낸 후 성주목사로 쫓겨나고 만다. 이를 볼 때, 앞서 대윤 제거는 소윤과 뜻을 함께 했다기보단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내린 결정인 것으로 보인다.
성주목사가 된 이윤경은 쫓겨난 처지에도 불구하고 민생 관리에 힘써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 백성들이 <운간이사군>이라는 노래까지 지어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그러나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들 이중열이 사약을 받고, 이윤경 역시 지금까지 받은 공훈과 관직이 삭탈당하고 만다.
1553년 비로소 용서를 받은 이윤경은 다시 승지로 복귀한다. 2년 후 그의 진가가 다시 발휘되는데, 1555년 을묘왜변이 발생한 것이다. 을묘왜변 당시 7000여명의 왜적이 들이닥쳤고, 해남·강진·장흥을 점령하는 등 큰 위세를 떨쳤다. 문제는 조선 장수들이었는데,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하자 대신 장흥군사를 맡은 임시장수는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을 쳤다. 강진현이라는 장수는 군사 수천을 가지고도 목숨이 아까워 성을 비우고 후퇴했는데, 조정에는 군졸들이 겁을 먹고 흩어져 싸울 수 없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정부에서 보낸 정부군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좌도 방어사 남치근은 겁을 먹어 적이 있는 장흥으로 가지 않으려 했고, 우도 방어사 김경석은 강진이 공격받고 있는 시점에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윤경은 전주 감사의 요청을 받고 영암성을 지키게 된다. 어릴 때부터 지략이 많았던 이윤경은 성 보수와 방어태세 강화, 엄격한 군율 세우기에 몰두하였고 마침내 영암성에 들이닥친 왜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이윤경의 친동생 이준경은 정부군 총사령관을 맡았는데, 형의 활약에 힘입어 완전히 왜적을 몰아냈다. 한마디로 병졸들과 백성들 악랄하게 수탈하는 무관들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소극적인 겁쟁이가 되고, 병졸과 백성들의 존경받는 국방통인 문관은 지휘와 용병술에선 과감하고 용맹했다는 것이다. 전례로 세조의 여진족 토벌 때에도 신숙주와 양정이 원정에 나섰는데 양정은 무모하게 총사령관인 신숙주의 지휘와 작전체계를 무시하다 참패한 적이 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한 무관인데 샌님 같은 문관인 신숙주의 지휘받는 게 껄끄러워 독단적으로 나갔다 참패하였고, 나중에 여진족 평정 후에 신숙주가 양정을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니 세조가 공신이니 용서해달라면서 만류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무관은 군사적일에는 용맹하고 유능하고 문관은 겁쟁이에 무능하다는 편견을 뒤집는 사례이다.
을묘왜변에서의 공을 인정받은 이윤경은 경기도·함경도관찰사[3] 를 거쳐 도승지[4] 가 되었고, 1560년 병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여진족이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은 이윤경을 찾았고, 병이 있었지만 거절하지 않고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된다. 국방 강화에 힘을 쓴 이윤경은 결국 병이 악화되어 1562년 사망한다. 형이였지만 동생 이준경이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상관이였다. 한마디로 오늘날로 치면 국가 공무원 시험에 일찍 합격한 동생이니 자신보다 상관일 수 밖에.
다음은 이윤경이 평안도관찰사 부임을 수락하면서 했던 말이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