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

 



'''조선의 영의정'''
'''《第 71 代》'''
'''燕山君 5年~
宣祖 5年'''

'''제71대'''
'''1565.8.15~
1571.5.1'''

李浚慶
1499년 ~ 1572년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2.3. 선조를 옹립한 원임 정승
3. 일화, 야사와 인간 관계
3.1. 이황과의 일화
3.2. 이이와의 악연
3.3. 그 외의 일화
4. 둘러보기


1. 개요


조선문신이다.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서울 출생.
청렴하고 강직한 정치가였다. 청백리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에도 청백리로 선정된다. 부인이 마련한 집에서 평생을 살면서 집에 서까래 하나 늘어나지 않았다. 최후에는 영상까지 지내면서 선조를 옹립하고 권력의 최정상에 섰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드문 이력의 소유자. 선조 즉위 얼마 후 칠순이 넘었으니 이제 그만하겠다고 치사를 하자 선조가 궤장을 내리고 은퇴를 허락한다. 그러자 그는 사궤장 연회까지 아주 검소하게 치렀다고.
연산군 5년(1499년)에 태어나 중종 때 젊은 시절을 보냈고[1], 인종 때와 명종 때를 거쳐 선조 5년까지 관직에 있었다. 선조와 일한 건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선조 묘(廟,사당)에 합사된 배향공신이다. 아들 없는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이 있으며, 깔끔한 일처리로 선조의 부족한 정통성을 훌륭히 메꿔줬기 때문.
명종 대까지 치열한 암투를 벌인 훈구파와의 대결에서 결국 사림파의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로 선비들의 대선배가 된다. 까칠한 독설가였으나 유머도 있었고, 동시에 경륜과 수완을 겸비한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광주 이씨는 조선 전기 가장 열력이 화려하고 그 세를 자랑하는 집안이었는데도, 이준경은 청렴하고 담백하기가 이를 데 없어 더욱 존경을 받았다. 소위 집안의 세를 가지고 세도를 하려 들었던 가문들에게 일침이 될 큰 인물이었다.

2. 생애



2.1. 초년기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직접 가지고 간 것으로 유명한 이세좌의 손자이다. 그의 집안은 훈구 공신 집안[2]으로 몇 대 동안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들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6살 때 조부와 부친 4형제가 모두 갑자사화에 말려들어 처형되면서, 형 이윤경과 함께 충북 괴산에서 2년 간 숨었다가 중종반정 때 되돌아 온다. 이후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집안 형님 이연경과 조광조에게 수학했고, 중종이 일으킨 기묘사화 때(19세)는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목이 졸려 죽지만 제자인 그에게는 별 추궁이 없었다.
중종 17년(1522년) 사마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4년만인 중종 26년(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그는 특이한 점이 집안 배경 자체는 훈구파였으나 사화에 집안이 단절됐을 뿐더러 스승 조광조와의 학연 때문에 사림파가 됐다.[3] 홍문관 수찬 때 2년 후배인 구수담과 함께 기묘사화의 부당함을 거론해 다시 파직됐다.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자 재등용됐지만, 훈구파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박순, 이황 등 1세대 사림파들과 힘을 합쳐 훈구파와의 대립을 계속했다.

2.2.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과 함께 사림을 보호하려 애썼다. '윤임은 반역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계책을 내었을 뿐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한 것이 실록에 실려있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사사할 때에도 원칙에 어긋난다 하여 반대했으며 그 때문에 평안도 관찰사로 내려갔으나 그 덕에 을사사화의 폭풍을 피해갔다.[4] 청백리로 유명했는데,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수령들이 보내온 공물들을 보관한 후 흉년이 들자 구휼용으로 사용해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카가 이덕응의 무고 사건에 엮여 죽으면서 연좌되어 1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평범한 문신처럼 보이지만 명종 8년(1553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순변사가 되어 진압하고 북방을 안정시켰고,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 당시 도순찰사가 되어 왜변을 진압하기도 했으며 나이 든 장수들이 너무 몸사린다며 권관 제도 도입을 주장해 관철시킨 문무겸비한 명재상. 실제로 그는 화포 개량 등에 관심을 기울여 3세대 총통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화포는 명종 당시의 개량형이 주력을 이루게 된다. 을묘왜변 진압 이후에는 겸판서로 병조를 맡았다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원칙주의자였기에 청탁은 받지 않았고 명종 9년(1554년) 이조 판서에 있을 때는 덕흥군[5]이 찾아와 청탁을 했다가 '''왕자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 말을 듣고 쫓겨나기도 했다. 국조인물고에는 을묘왜변 이후 이준경이 정승에 오르자 어떤 선비가 "좋은 때로다. 이 아무개가 정승에 올랐도다"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명종 20년(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윤원형이 면직되었고 이준경이 뒤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에 오르자마자 백관을 이끌고 윤원형을 탄핵해 날려버렸다. 이어 조광조를 신원하고 문묘에 배향했으며, 명종 비 안순 왕후 심씨의 외척인 심통원을 견제했다. 또한 궐내 불당을 해체하고 불교 억압 정책과 소격서 혁파를 주도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복원하려 했다.
어린 시절을 갑자사화의 후폭풍 속에서 지냈고, 커서도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조광조가 사사당하는 것을 목도하는 등 인생 초년기가 사화로 점철되어 있어 말로는 명망있는 선비들에게도 독설을 아끼지 않았으나 유림과 관련된 정책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그의 정치 역정에서 중기 ~ 후기에는 논의가 과격하게 흘러가는 것을 통제하면서도 선비를 보호하는 행보가 자주 보인다.

2.3. 선조를 옹립한 원임 정승


영의정에 오른 후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 즉위 과정에서 원임 대신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을축년 하서'를 근거로 덕흥군의 삼자 하성군 균을 사왕(嗣王)으로 봉영하도록 했다. '을축년 하서'란 명종이 승하하기 2년 전인 1565년 9월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의 일을 말한다. 당시 신하들과 인순왕후는 하성군에게 병 간호를 시켰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왕세자가 맡던 일이므로, 이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인정하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후계자 선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신하들이 함부로 이를 행하는 것은 자칫하면 '택군'이라 하여 역모 수준의 중죄로 취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식을 회복한 뒤 명종은 이 일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볼 때 명종 본인 또한 당시 하성군을 암묵적으로 후계자로 인정한 듯 하다.
명종비 인순 왕후 심씨가 주도권을 인종 비 인성 왕후에게 넘기려 하자 '''정사가 내전에서 나와야지 다른 곳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이유로 말렸다. 이어 하성군이 똑똑하고 성년(15세)을 지났으니 수렴청정을 하지 않겠다는 인순 왕후를 "왕실에서 자란 것과 밖에서 자란 것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설득함으로써 최초로 방계로서 왕위를 이은 선조를 인순 왕후가 수렴청정하게 해 왕권의 안정을 기했다.
이 때의 일화로 청탁 명부를 불태워버린 일이 있다. 하성군을 사왕으로 대내까지 봉영하는 과정은 어수선하고 허술하기 그지없었는데, 승지 이양원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누구를 불러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하성군의 외삼촌 정창서는 공신 녹훈이나 포상을 노린 사람들의 청탁을 받아 명단을 정리해 넘길 정도였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명령이 대내에서 나왔는데 신하가 어찌 관여하랴?"며 이 명단을 불태워버린 것이 이준경이었다.
선조 3년(1570년)에는 정공도감을 설치해 방납의 폐단을 개혁하려 했으며, 기묘사화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신원했다. 정확하게는 정미년 양재역 벽서 사건과 기유년의 사건 피해자들을 신원했다. 신원 과정에서 선조는 나이가 어려 당시의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대신들은 누구를 어떻게 신원해야 하는지 아뢰는 것을 꺼렸는데 이준경의 주도로 인물별 행적과 합당한 신원 / 추증을 싸그리 정리해서 올렸다. 이때 이이가 성급하게 을사 공신들의 위훈 삭제를 요청하자 그걸 우선 저지한 것도 이준경이다. 아마 기묘 사화의 참사를 바로 눈 앞에서 본 이였기에 그럴 것이다. 선조가 즉위한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 명종 말년의 척신 세력들이 아직 다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을사년 위훈의 삭제는 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듯 하다. 실록에 따르면 을사년에 억울하게 죄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은 이준경이 먼저 언급했는데, "'''더러''' 착한 선비가 억울하게 죄를 받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이이가 대놓고 "대신의 말이 어떻게 이렇게 모호할 수가 있냐"며 "위사는 위훈이고 이때 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착한 선비"라고 까버렸다. 이준경이 다시 "선조의 일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우회하자 이이가 또 "명종도 그 때 일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고 받아쳐버렸다. 당시에는 이이도 말 그대로 거침없는 신진이요 구도 장원의 스타였던지라 이 사건 이후로 대립하면서 서로 감정이 나빠졌다. 이어 을사 위훈 삭제에 대한 요청이 일어났는데, 이준경 역시 몇 차례 상소하며 여론을 지원했다. 당시 선조는 이준경이 처음에는 언급하지 않거나 우회하다 상소를 올려 여론을 지원하자 등떠밀린 것이라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준경은 "과오를 고치기 쉬운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려 한 것인데 이제 정당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니 막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재차 상소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을사 위훈은 선조 10년 11월 대비 인성 왕후의 눈물겨운 유언을 선조가 받아들여 삭제되었다. 인성 왕후는 인종의 왕비로 사적으로는 덕흥군에게는 형수가 되고, 선조에게는 큰어머니가 된다. 인성 왕후의 청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선조가 우선 거절하고 나오다 인성 왕후의 통곡 소리를 듣고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녹이나 받아먹으며 살았으면 편안히 살았을 텐데 어쩌다 임금이 되어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맞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해에 선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사궤장연을 매우 검소하게 치렀다. 선조 4년(1571년) 사직하여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물러난 뒤에도 정몽주의 후손을 서용할 것을 주청하고, 홍수와 가뭄이 들자 세금을 적게 거둘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이를 깐 것 때문[6]에 당대에는 평가 절하된 경향은 있지만 역사연구가들에게는 조선의 재상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재상 중 한명으로 평가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선조 5년(1572년) 병상에 누운 후 최후의 유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군왕은 학문에 힘쓰고 위의를 잃어서는 안되며[7] 군자와 소인을 잘 분간해야 하고 붕당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이이는 이준경의 유소에 대해 '사림의 분열을 언급하여 훈구의 공격 빌미를 준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인생 자체가 사림파가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게 된 과정과 일치한다. 연산군 때 죽다 살아난 후 중종기묘사화를 보고 김안로 등의 권신 시대를 거쳐서 명종 때의 척신 정치 때까지 세력을 계속 확장한 후 윤원형의 몰락과 함께 조선의 정국을 중심으로 떠오른 후 선조 때부터 조선의 주도 세력이 된다. 이후 붕당까지도...

3. 일화, 야사와 인간 관계



3.1. 이황과의 일화


성격 자체는 까칠한 독설가였던 모양. 이황을 '산새'[8]에 비유하여 구설에 오른 일도 있었다. 타인에게 굽힘이 없는 성격으로 선인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낮추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술할 일화에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조식(曺植)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왔을 때 준경은 옛 친구의 입장에서 서신은 보냈으나 끝내 찾아가 보지 않았다. 조식이 귀향하려 하면서 찾아와 고별하고 말하기를,
>“공은 어찌 정승 자리를 가지고 스스로 높이려 하는가?”
>하자, 준경이 말하기를,
>“조정의 체모를 내가 감히 폄하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황(李滉)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가 아침 저녁으로 그의 문전을 찾아가니, 이황은 한결같이 모두 예로 접대하였다. 최후에 준경을 찾아가 인사하자 준경이 말하기를,
>“도성에 들어오신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제야 찾아오십니까?”
>하니, 이황이 사대부들을 응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고 하자, 준경이 언짢아하며 말하기를,
>“지난 기묘년에도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염소 몸에 호랑이 껍질을 뒤집어 쓴 자가 있었으므로, 사화가 이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조정암(趙靜庵)[9] 이외에 그 누구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단 이 부분은 이황이 무례를 범한 것이 맞다. 상경할때 조정의 영수를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당연한 예의였는데, 자기를 찾아오는 선비들을 먼저 대접하고 정작 영의정인 이준경을 나중에 찾아갔으니 앞뒤가 바뀐 처사였다. 하다못해 이준경이 이끄는 정부가 부패했다거나 불의한 정권이었다면 그나마 변명할 여지가 있겠지만, 이준경은 윤원형이 항상 기세가 등등할때도 그에게 부역한 적이 없는 강직한 대신이니 그런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준경이 특유의 그 독설로 이황을 디스한 일도 있었지만 이황과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모양. 이황은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선조에게 인재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고 기대승과 함께 이준경을 추천하며 "큰 일을 맡길 수 있으니 신임하되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이황의 제자들이 이준경을 척신들과 같이 행동했다 하여 공격하자 이를 꼬투리 잡아서 윤원형의 잔당들이 그들을 밟아버리려 했으나 오히려 이준경이 그들을 숙청해버리기도 했다.

3.2. 이이와의 악연


이준경이 말을 까칠하게 했다는 기록은 많아도 특별히 누구와 대립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유달리 이이와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이나 기대승이나 둘 다 이준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10], 이준경도 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의 <경연일기>에는 이이 - 기대승 - 이준경이 서로를 각각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은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을사 위훈 삭제의 문제로 이이와 대립하자 화가 난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이이의 욕(...)을 하기도 했다. 백인걸은 이이를 추천한 인물인 동시에 이준경과도 친구 사이였는데, 이이는 백인걸이 기는 세고 학문은 거칠다고 대놓고 깠다.[11] 을사 위훈의 삭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하려던 이준경 앞에서 이이가 대놓고 두 번이나 이준경을 까버리자 빡친 이준경이 친구인 백인걸에게 "자네가 추천한 이이는 언행이 왜 그렇게 가벼운가?"라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반면 이이는 경연일기에서 "작정하고 덤벼도 모자랄 텐데 저렇게 어중간하게 나서니 7달을 물고 늘어져도 못하지 ㅉㅉ"하는 식으로 깠다. 다만 양자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차이 등을 생각해보면, 이준경이 어지간히 빡칠 만한데도 친구한테 짜증 부리는 것으로 끝냈다는 건 오히려 이준경의 대인배스러움을 증명하는 걸지도.
이준경의 유소 중 '사당의 조짐을 경계하라'는 부분은 정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이 역시 "원래 사람은 죽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지는 법인데, 이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유소는 실제로 나타나고 만다. 이이는 경연일기 중 이준경 사망 기사에서 이준경과 형 이윤경을 대비시키면서 몇 가지 일화를 드는데, 묘하게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며 이윤경을 추켜세우고 이준경을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준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네 임금을 모신 원로신으로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고 일하는 데 굳세며 권간을 내쫓고 성군을 섬겨왔으니, 누가 어진 재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가 거만하여 혼자만 똑똑하다 하고 선비에게 굽히지 않으며 선비들과의 사이에 말썽이 쌓이고 끝내는 나라 망할 말로 임금을 그르쳐 놓아서 명예를 잃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이가 관직에 막 진출하던 무렵, 이준경은 어느덧 기로소에 든 나이 지긋한 노신에 원임 정승, 선조를 옹립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권력의 최정상이었는데도 여전히 독설가에 여전히 까칠하며 거침없이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쟁점에 있어서는 여론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논의의 고삐를 늦추기도 했다. 반대로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하던 이이는 옳은 것은 곧 죽어도 옳은 것, 그른 것은 곧 죽어도 그른 것이라는 딱 부러지는 태도로 적도 많았고 이후 붕당을 중재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똑같이 거침없고 직설적인 양쪽의 성격에 한 쪽은 권력이 있으면서 신중하고, 한쪽은 거칠 것이 없는 당대의 스타였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충돌을 불러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준경과 이이가 대립한 근본적인 부분은 붕당의 인정 부분인데,
  • 이준경은 훈구파는 이미 세력을 잃었고, 사림 내부의 붕당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여기에는 이이와 같은 인물이 크게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봤다.
  • 이이는 붕당이라고 해도 모두 사림에서 비롯된 군자당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훈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붕당을 언급하는 것은 적전 분열과 마찬가지라고 해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준경의 완승이다. 애초에 붕당이 발생한 것 자체가 훈구파는 끝났다고 판단해서, 그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부 분열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훈구파 잔당을 처리했던 이준경은 이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12] 실제로 훈구파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부터 소멸하고 있었고, 이준경 등이 조정에 들어간 것은 사실상 이 사실의 확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준경이 사망하는 시점에서 이이의 활동은 붕당의 분열을 가속시키고 있었는데, 단적으로 이준경의 유언을 비판하고 처벌을 주장한 이이는 후일의 동인이 되는 이들에게 극딜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동서 분당이 뚜렷해지는 과정이었다. 결국 이준경이 사망하고 동서 분당이 누가 봐도 뚜렷해지자, 이이는 이준경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크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이이는 1575년 을해당론을 시작으로 동서 붕당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 뿌렸던 초년기의 활동 때문에 붕당에 휩쓸려서 처벌받지 않으려면 붕당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서 사실상 서인의 영수 취급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현대에 보는 입장에서는 이이가 초년기에 벌였던 상당수의 뻘짓 중 하나이지만, '''이이의 제자인 서인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이의 글에서 이준경이 나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13], 이준경을 비판하지 않으면 이이가 욕을 먹는 상황이 되면서 이준경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한 인물로 비판을 받거나, 혹은 언급 자체가 잘되지 않는 인물이 된다.

3.3. 그 외의 일화


  • 수완에 능하고 말을 거침없이 하는 실리파인 이준경은 강직하면서도 의리를 지킨다는 평을 들은 형 이윤경과 성격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분위기로는 형에 대한 평가가 더 높았다.[14]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을사 사화 이후 이어진 이덕응의 무고 사건에서 친 조카[15]인 이중열이 이덕응의 친구로 같이 엮여들어가자 이중열이 이들 형제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아버지였던 이윤경은 친구의 의리를 배신할 수 있겠느냐?고 답한 반면 이준경은 당장 고발해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답한것. 결국 이중열은 이윤경의 말을 따랐다가 연좌되어 자신은 사약을 받고 이윤경, 이준경 형제는 귀양을 갔다가 이준경은 1년 뒤, 이윤경은 3년 뒤에 풀려난다. 이이의 경연일기에도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 중 하나.
  • 경연일기에 전해지는 또 다른 일화는 을묘 왜변 진압 당시의 일이다. 호조 판서였던 이준경은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호남으로 내려갔는데, 당시 전주 부윤이 형 이윤경이었다. 영암성이 함락되자 이윤경은 당시 즉각 영암성 지원에 나섰는데 이준경은 이윤경에게 전황이 불리하니 나주의 순찰사 본진으로 합류하라는 전언을 보냈다. 경연일기에는 이윤경이 영암성을 사수하겠다고 답하고, 정말로 영암성 사수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간에 두 일화는 양면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한데, 이윤경을 긍정한다면 이윤경이 도학군자이고 이준경은 수완은 좋되 다소 음험하다고 평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이준경을 긍정한다면 이윤경은 고지식하고 이준경은 수완이 좋다고 할 수도 있다. 경연일기에는 이윤경을 긍정하고 이준경은 다소 비난하는 뉘앙스로 기록되어있다.
  • 명종 사망 당시 명나라에서도 황제가 사망하고 새 황제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사신이 입국해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가산에 이르러 명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통역관에게 나라 안의 상황에 대해 캐물었다. 통역관은 이들이 왕이 자식을 두었는지 묻자 세자가 일찍 죽고 다른 후사도 없다고 답하고, 수상이 누구냐고 묻자 "수상은 이준경인데, 나라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이준경의 인망이 상당했음을 알 만한 대목. 실록의 해당 기사
  • 본인의 까칠함을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 명종이 순회 세자의 원자 보양관으로 임명하자 "전혀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없어, 평소 집안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꺼리고 두려워하여 피하므로 친근히 대하지를 못합니다."라며 사양했다. 물론 겸양이 미덕인 시대이긴 했지만, 보통 사양하는 상소에서는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를 구구하게 들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제가 쫌 까칠해서 우리집 애들도 저를 무서워함여"라는 이유를 댄 것. 명종은 이준경의 사양을 들어주지 않았다.실록의 해당 기사
  • 임진왜란과 관련한 설화도 하나 전해진다. 이준경의 집에 피씨 성을 가진 청지기가 하나 있었는데, 대감 마님에게 자기 사윗감을 점지해주십사 청했다. 이준경은 며칠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청지기에게 남대문 밖에 있는 사람을 데려다 사위로 삼으라고 일러준다. 청지기가 가보니 거기 있는 남자는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이준경은 죽기 전 이 청지기의 사위에게 자기 자식들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자손들에게도 어떤 일이든 그의 말을 따르라고 유언한다.
이준경이 죽은 뒤 이 사위는 사업을 해보겠다고 재산을 타내어 탕진하기를 반복하고, 이 짓을 몇 번이나 하며 재산을 싸그리 탕진하고, 식구들 울화통에 불을 지피더니 결국 남들 보기 우세스러우니 이사를 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이준경 일가는 청지기 사위를 따라 이사까지 하는데, 그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호화로운 마을이 있어 3년을 안락하게 살았다. 어느 날 이준경의 자손이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말없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 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성은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타고 있었다.식구들은 그제야 이준경이 점지한 청지기 사위가 혜안이 있음을 알고 거기서 몇 년 더 안락하게 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 청렴함으로 유명해서, 청탁을 재치있게 거절한 일화도 내려온다. 평안 감사로 재직할 당시 조정 고위 인사가 그에게 무관직 인사를 청탁한 일이 있었다. 대놓고 면박주며 거절할 경우 화를 입을 것을 고려해 수를 썼는데, 아전에게 청탁의 당사자를 데리고 올 때 감영 내를 빙빙 돌다가 오게 한 것. 남자를 보고 이준경은 "이 동헌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었는데, 평양 감영 같은 큰 관아를 한참이나 빙빙 돌다가 온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대감이 추천한 인사가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사람이라 쓸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인사 청탁을 거절해버렸다.
  •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이번엔 아들에 관한 것. 이준경이 어느 날 홍문관의 인사 추천 명단에서 자기 아들 이름을 발견했다. 이준경은 그 자리에서 아들 이름 위에 취소선을 북 그어버렸는데, 주변에서 묻자 "내 아들 놈이라 아는데 내 아들은 이런 자리를 맡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도 하나 전해진다. 구한 말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순신세가>라는 기록에 이준경이 이순신의 중매를 섰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순신은 14세 ~ 15세 무렵 글방을 열어 자치통감을 가르쳤는데,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이 지나가다가 이순신이 <여후> 편을 강론하는 것을 들었다. 이준경은 나중에 보성 군수 방진이 사윗감을 찾는 것을 알고 이순신을 소개해주었고, 이순신은 방진의 딸 방씨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만 <이순신세가>의 신빙성에 한계가 있고, 이 일화가 사실이었다고 해도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준경이 영의정이 된 것은 이순신이 스무살 무렵이던 1565년으로, 이순신이 15세였을 땐 우의정이었다.

4. 둘러보기


'''조선의 역대 영의정'''
72대 윤원형

'''73대 이준경
(1565 ~ 1571)
'''

74대 권철

[1] 이때, 정광필 등으로부터 재목이라고 기대를 받았다[2] 이준경의 증조부 이극감은 세조 때 형조판서까지 지낸 인물로 5형제가 판서 이상의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이극감의 동생이 무오사화로 유명한 이극돈이다[3] 우리는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온다'라고 하지만, 훈구파와 사림파는 그런식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훈구파는 관학파 중에서 세조 이후 공신이 된 훈구공신들을 지칭하며, 사림은 조선 건국 이후 낙향하여 지방에서 후배를 양성한 사람의 후예들을 말한다. 즉, 한성부의 관학인 성균관을 지방의 사림들이 장악하고, 교육하면서부터는 훈구파라는 것은 조정의 고관대신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변하고, 이는 곧 사라질 명칭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당연히 조부나 아비가 훈구파에 속한다고 하여도 자연스럽게 아들이나 손자는 모두 사림으로 되는 것이니 당시 사회적으로는 당연한 변화였다.[4] 선조 실록의 이준경 졸기에는 이준경이 윤원로 사사를 반대한 일로 윤원형이 내심 고마워했으며, 을사사화의 폭풍을 피해간 것은 그 덕분이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정작 윤원로 사사를 사실상 윤원형이 주도했다는 의혹이 있는 걸 보면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 [5]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이다. 실록에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6] 여기에 대해서 십만 양병설 드립치기도 하는데, 십만 양병설이 '''진짜로 존재하긴 했느냐'''문제는 차처하고, 이준경은 1572년에 죽었고, 이이가 십만 양병설 주장했다는 기록은 1582년 기사에 나온다.[7] 잘못된 것이 있어도 지나치게 면박주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선조는 젊고 재능있지만 지나치게 엄한 임금이었다. 판서 송기수가 을사 사화 피해자들의 신원을 아뢰면서 눈물을 흘리자 '그때 조정에 있었다면서 뭐 했나'라고 까고, 주변에서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게 쉽겠어요...'라고 쉴드치자 '그때 간언했던 백인걸은 끄떡없이 살아있는데?'라고 면박을 줘버렸다.[8] 퇴계 이황은 수십번 씩이나 낙향과 상경을 반복한 인물이다. 좋든 나쁘든 중앙정계에 남아서 꿋꿋하게 소신을 지켰던 이준경의 관점에서 걸핏하면 사직소를 올리는 퇴계 이황의 스텐스가 탐탁치 않았을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조광조라든지 이준경, 심지어 벼슬을 받고 사직을 하더라도 '단성사직소' 같은 강직한 상소를 올린 조식에 비해서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노회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9] 정암 조광조이다.[10] 재미있게도 이이와 기대승 역시 서로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이는 기대승에 대해 도량이 넓고 재주가 있지만 오만하고 사류와 불화한다고 평가했다.[11] 당시 이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백인걸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한 상태였고, 심지어 백인걸은 명종 연간에 을사 사화의 폭풍 속에서도 지조와 절의를 지킨 정치 역정으로 중외의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12] 확실히 당시 조정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정계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이준경의 의견이 이후에 진행과정을 모두 살펴보면 맞다. 그러나 이 붕당의 시작인 宋代에 붕당의 기록은 군자와 소인당이 아닌, 군자당끼리 의견차이로 발생되는 것은 국가발전에 유익하게 볼 여지가 있었다. 이에 율곡이 서책에서의 조화로운 붕당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면 곧 죽을 사람이 붕당에 대하여서 비판한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다.[13] 사실 이이의 글을 보면 좋게 묘사된 인물이 없다.[14] 동생보다 일찍 죽어서 애석함을 샀다고 하는데, 나름 65세까지 살면서 병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한 시대의 명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문무를 겸비해서 을묘왜변 때에도 종군해 영암에서 왜구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혔던 인물이다.[15] 이윤경의 아들. 이준경 입장에서 친조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