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 암살 미수 사건
1. 개요
'''이케다 다이사쿠 암살 미수 사건'''은 1993년 11월 및 12월 18일에 옴진리교 신자에 의해 창가학회 명예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암살당할 뻔 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2. 배경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같은 신종교로 간주한 창가학회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아사하라는 창가학회를 "불교 단체를 자칭하면서 원시 불교와 티베트 불교를 업신여긴다"며 "이단"이라고 지칭했다. 평소 이케다 다이사쿠에게 강한 열등감을 보이며 "그놈만 없으면…"이라고 되뇌이던 아사하라는 급기야 이케다 다이사쿠를 '''불적'''이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측근들에게는 "옴진리교의 신도 수를 창가학회 수준으로 늘리고 싶지만,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이케다 다이사쿠가 오자와 이치로를 조종해 국가권력으로 개종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제거해야 한다"'''고 적개심을 표출했다.
보다 실제적인 이유에서 사건의 동기를 찾는 시각에서는 선데이마이니치(일본 마이니치신문의 자매 주간지)가 연일 옴진리교 특집을 내보내며 종단 비판에 나섰던 것의 배후에 창가학회가 있다고 의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사하라는 "선데이마이니치에서 시작된 옴진리교 때리기는 화광신문을 인쇄해주는[1] 마이니치신문사그룹과 창가학회가 결탁한 증거"라고 의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전개
1993년 8월, 츠치야 마사미가 사린 합성에 성공하자, 아사하라는 첫 번째 대상으로 이케다 다이사쿠에게 "사린을 뿌려보라"고 지시했다. 종단 간부인 무라이 히데오가 행동에 옮겼다. 당초 무선 조종 헬기에 의한 항공 살포가 검토됐지만, 무선 조종 헬기가 시험 조종 도중 실수로 대파됐기 때문에, 차량에 의한 공격으로 변경했다.
1993년 12월 18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의 소카대학에서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며, 이케다 다이사쿠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사전에 알려졌다. 옴진리교도 이케다 다이사쿠가 연주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당일 공격을 위해, 한 달 전인 1993년 11월 무라이 히데오, 니이미 도모미츠, 나카가와 도모마사, 타키자와 카즈요 등이 사린 약 600g을 승용차에 싣고, 소카대학 인근의 하치오지시 창가학회 시설 도쿄 마키구치 기념회관에 농약 분무기를 통해 살포하는 실험 공격을 해봤다.
하지만 사린이 거리로 제대로 살포되지 않고 오히려 차내로 들어오는 한편 농약 분무기도 고장나는 등의 이유로 실패했다. 실행역들도 이 때는 방독면을 하지 않았다가 약간의 사린 중독 증세를 보이는 등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를 바탕으로 12월 18일 당일에는 실행역 전원이 방독 마스크를 착용했으며, 살포 대상인 사린의 양도 대거 늘려 약 3㎏의 사린을 공격에 동원했다. 도쿄 마키구치 기념회관에 옴진리교의 사린 살포 트럭이 갔지만, 이번에는 가스 버너식 가열 기화 분무기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회관으로 다가오던 웬 트럭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고 급히 불법 유턴을 하는 등의 수상한 동정이 보이자, 회관을 경비하고 있던 창가학회원들은 의심을 하고 봉고차를 통해 추격에 나섰다. 실행역들은 어떻게든 도주하기 위해 유턴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3kg의 사린 용액을 분무했다.
이 때, 실행범 중 운전을 담당하고 있던 니이미 도모미츠는 사린 살포 트럭을 유턴시키기 위해 시야를 확보하려고 방독 마스크를 벗었던 탓에 사린을 대량으로 흡입하고 중태에 빠졌다.
엔도 세이치와 무라이 히데오가 즉시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옴진리교 부속 병원으로 후송해 하야시 이쿠오 등이 치료한 결과 목숨은 건졌다.
하야시 이쿠오는 이 때 나카가와 도모마사에게 "중독의 원인이 뭐냐"고 물었고, 나카가와로부터 "사린으로 이케다 다이사쿠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종단이 사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케다 다이사쿠 본인에게는 피해가 없었지만, 당일 회관을 경비하던 학회원이 일시적인 시력 감퇴 등 사린 중독 초기의 증상을 호소했다. 창가학회는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4. 창가학회 측의 대응
수 명의 학회원들이 일시적인 시력 감퇴 등의 상해를 입었지만 이 사건이 표면화된 것은 아니라서, '''이케다 다이사쿠 암살 미수 사건'''의 전모는 1995년에 하야시 이쿠오의 자백으로 밝혀질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가학회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인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를 노린 행동 계획을 엄중하게 본 학회는 이후 이케다 다이사쿠의 외부 일정 관리를 엄격히 하기 시작했다. 또, 학회원 중에서 경호원을 선발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