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하라 쇼코

 


[image]
1990년대 당시의 사진[1]
'''아사하라 쇼코
麻原(あさはら彰晃(しょうこう'''
<colbgcolor=#291873> '''본명'''
마츠모토 치즈오 (松本智津夫)
'''출생'''
1955년 3월 2일
'''사망'''
2018년 7월 6일[2] (향년 63세)
'''국적'''

'''신체'''
약 170cm[3], A형
'''직업'''
옴진리교 교주
'''소속'''
옴진리교
'''죄명'''
살인
'''형량'''
사형(교수형)
'''수감처'''
도쿄구치소
1. 개요
2. 상세
2.1. 옴진리교 창설
2.2.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
2.2.1. 진상
2.3.1. PSI(Perfect Salvation Initiation)
2.3.2. 다키니
2.3.2.1. 다키니 해설
2.3.2.2. 다키니의 선발
2.4. 후일담
2.5. 수감 이후
2.6. 사형 집행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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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하철 독가스 테러' 옴진리교 교주 사형 집행…옴진리교를 아십니까 / 비디오머그'''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킨 사이비 종교 옴진리교교주이자 테러리스트. '''존사(尊師, 손시)'''라는 존칭 겸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4]

2. 상세


'''학창 시절의 사진'''
1955년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八代市)에서 다다미를 만드는 집안의 아홉 남매 중 일곱 번째 아이(4남)으로 태어났다. 혈액형A형이며, 선천적 시각장애인이지만 전맹은 아니었다. 아사하라 쇼코의 아버지와 같은 시각장애인이었던 형에 따르면 아사하라 쇼코의 시각장애미나마타병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아사하라의 아버지는 당시 미나마타병의 환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일본 후생성에서 야쓰시로 시에서 50명이 넘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의 형 마쓰모토 만쿄는 1950년대 당시 미나마타병으로 당한 환자들이 되려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면서 치를 떨었던 바 있다. 야쓰시로 시가 미나마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환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어릴 적부터 앞을 보지 못했음에도 되려 주변에서는 자신들의 유전병을 미나마타 병으로 엮어 야쓰시로시의 이미지를 망친다며 비난을 당해 왔기에 사람을 증오해 왔다고 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만쿄는 동생의 사상과 옴진리교의 교리는 미화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크게 비판했다.
학창 시절은 구마모토 현립 맹인학교에서 보냈으며, 친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졸업은 1975년 3월에 했다. 스무살 도쿄대학 문과1류를 지망하여 같은 해 3월 말에는 도쿄도 오오시마, 8월시나가와구로 이주했으나 9월에는 본가로 돌아갔다. 1976년 큰형의 가게에서 전 종업원이 찾아와 형을 모욕하자 그 종업원의 머리를 타박하여 9월 6일, 상해죄로 1만 5천 엔의 벌금형을 받는다.
1977년 4월, 22세에 다시 상경하여 요요기제미날 시부야교[5]에 입학했으나 도쿄대 합격에는 실패했다. 이때부터 선도나 요가의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입시학원에서 알게 된 부인 마쓰모토 토모코와 결혼하고, 지바현 후나바시시에 신혼집을 차리고 침술원 '마쓰모토 침술원'을 개원했다. 같은 해 9월 15일 침술원을 접고, 혼마치의 진료실 겸 한방 약국 '아세아당'을 개업하였지만 1980년 7월에 보험료의 부정청구가 적발되어 670만엔의 반환을 요구받았다.
동년 8월 25일, 25세에 신흥종교단체 아함종(阿含宗)[6]에 입신하고 이후 3년간 재적하였다. 1981년 2월 건강약품판매점 'BMA약국'을 개업했으나, 1982년 무허가 의약품을 제조/판매한 혐의로 같은 해 6월 22일약사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벌금형 20만 엔을 받았다. 이 무렵 경영아카데미 등을 운영하고 있던 니시야마 쇼운(西山祥雲)이라는 사람의 제자로 들어가 '쇼코'라는 이름을 받고서, 스스로를 '마츠모토 쇼코'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1983년 여름, 28세에 도쿄도 시부야구 사쿠라오카에서 선도, 요가, 동양의학 등을 종합한 (초)능력개발을 지도하는 학습학원 '봉황경림관(鳳凰慶林館)'을 개관하였고, 이때부터 '아사하라 쇼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아수라샤카와 비슷하게 들리도록 의도하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공중부양했다고 주장하는 사진'''
이것이 소위 말하는 공중부양 사진인데, 알고 보면 별 게 아니고 그냥 양반다리를 한 상태에서 몸을 움츠렸다가 펴면서 그 반동으로 허벅지를 아래로 내려 바닥을 차면서 점프하는 그 나름대로 꽤 대단한 재주(...)이긴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옴진리교인들이 옴진리교를 믿는 이유가 달랑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핵심 간부도 이 사진 하나 때문에 아사하라 쇼코를 숭배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재주도 아니다. 몸이 너무 무겁지 않고 상당한 근력과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 충분한 연습을 한다면 쉽게 따라할 수 있다.[7] [8] 무엇보다도 단순히 근력을 이용한 점프일 뿐 신통력 따위와는 아무 관계 없다. 이 때문에 옴진리교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변호사 타키모토 타로가 아사하라 쇼코의 거짓말을 논파하기 위해 '''똑같이 연습해서 성공'''한 사진을 공개, 현재 자신의 트위터 프사로 사용하고 있다. [9] [10][11]

2.1. 옴진리교 창설


1984년 아사하라 쇼코는 요가도장 「옴의 회(オウムの会)」를 결성한다. 의외로 요가는 제대로 가르쳐서 이걸로 신뢰를 얻은 신자도 꽤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아사하라가 지은 요가책을 보고 입회한 인물도 꽤 있었다.
이 도장은 후에 「옴 신선회(オウム神仙の会)」로 개칭한다. 당시 오컬트잡지무(Mu)[12]가 옴의 회를 일본의 요가 단체로서 취재하여 사진이 실린 기사를 연재한다. 이 사진은 좌선을 한 채로 도약하는 것으로서, 후에 옴진리교가 말하는 '다르두리-싯디(darduri-siddhi)' 공중부양의 원형이 된다. 실제로도 인도 요가 중에 저렇게 가부좌를 하고 도약하는 요가가 있다.
또한, 아사하라는 '라-테일' 1985년 11월호에서 사카이 카츠토키의 예언서 '신비의 일본'에 근거하여, 초능력 개발을 가능하게 해서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돌 히히이로카네 – 일본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비의 금속 - 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투고하였다.
1987년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었던 옴 신선회를 개칭하여, 종교단체 옴진리교가 설립되었다. 동년 11월에는 뉴욕 지부도 설립하였다. 1989년 8월 25일에는 도쿄도에서 종교법인으로서 인증받았다.

2.2.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


'''달라이 라마와 만난 아사하라 쇼코'''
아사하라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일본 대표였던 빼마 갤뽀와 접촉하여 그의 조력으로 1987년 2월 24일1988년 7월 6일달라이 라마 14세인도에서 회담하였다. 아사하라 측은 양자가 대화하는 모습을 비디오사진으로 촬영하였고,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일본에서 진정한 불도를 펼치세요."'''라고 아사하라에게 전했다며 옴진리교의 광고 및 선전에 크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2.2.1. 진상


달라이 라마는 평범하게 올바른 부처의 가르침을 알리라고 말한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이라는 말은 일본의 불교가 잘못되었으니 아사하라가 올바른 불교를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 아닌, 부처의 가르침을 곡해하지 말고 올바르게 알려달라는 부탁의 말이다. 그냥 무난한 종교적 덕담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명목상 한 나라의 지도자이긴 하지만, 티베트 망명정부는 결국 망명정부인지라 한 명이라도 해외 협력자가 아쉬운 상황이다. 불교에 기반을 둔 티베트 망명정부는 각국의 불교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서 해외 협력자를 늘려나가고 있는데, 대한민국조계종 같은 일반적인 불교 단체가 대표적이다. 조계종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찬성하는 등, 티베트 망명정부와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 # 문제는 이때는 아직 일본 국내 사정에 어두워서 옴진리교가 평범한 불교 단체 코스프레를 하고 찾아오자 수상한 단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먼 나라에서 '''"나 불교 수행자요."''' 하는, 심지어 눈도 성치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면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아, 그러십니까? 수고하시네요. 계속 수행해서 그곳에서 올바른 불도를 펼치세요!"'''라고 덕담함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그저 이렇게 일반적이고 무난한 덕담을 건넸을 뿐이다. 그런데 옴진리교는 이를 '티베트 불교의 종주 달라이 라마가 아사하라의 가르침이 올바르다고 인정했다.'는 식으로 왜곡하여 퍼트려 교세 확대에 활용한 것이다.
다행히 빼마 갤모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옴진리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적극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티베트 망명정부에 아사하라와 관계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 직후 티베트 망명정부와 티베트 불교의 승단에서는 옴진리교와의 관계를 모두 단절하였다. 그런데 이게 씨가 되어서 이후로 일본의 몇몇 신흥종교에서 일본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티베트의 린뽀쩨(고승)을 이용하는 경우가 일어났다.

2.3. 노선 전환과 망상의 시작


아사하라는 대량의 LSD를 항시 투약하고 있었는데, 이 LSD를 제조하는 설비가 옴 교단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며 LSD의 복용도 수행의 일부라는 견해를 피력했다.[13] 포아(ポア)[14][15]라는 살인정당화 논리를 제공하여 제자에게 살인을 강요한 주요인이며, 자신이 재림예수이며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후에 스스로 신성법황으로서 일본을 다스리겠다고 생각한 과대망상증 환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사하라 쇼코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면 마하야나와 바지라야나(ヴァジラヤーナ)[16]인데, 마하야나는 온건한 종교적인 활동으로서의 구제활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바지라야나는 무력투쟁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종교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자는 낮은 수준의 인간을 죽여도 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여하튼 옴진리교가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옴진리교 신도가 가족과 연락을 끊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당연했고, 점차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컬트 종교 정도의 이미지였지만 사회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하자 이런저런 대응에 나섰는데 그 대응 가운데 하나가 TBS 비디오 문제사카모토 츠츠미 일가족 살인사건이었다. 그러나 살인사건 자체는 일본 경찰의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는 대응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여하튼 이때 교세 확장에 조금씩 한계를 느끼자 아예 정계 진출을 시도해서 진리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했으며 1990년 중의원 선거 때 도쿄 4구에 직접 출마했지만 진리당 자체는 그저 특이한 장난 정당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또한 사카모토 츠츠미 실종사건과 연계가 되어있다고 보여지고 있었기에 이를 묻어버리려고 출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해당 선거에서 정권교체 여부가 가장 큰 이슈였기에 일개 군소정당 입장에서 승부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사하라 본인을 포함한 후보자 전부가 당선권에 훨씬 못미치며 참패했다. 참패 이후에 아사하라는 "마하야나로는 안 된다. 바지라야나로 간다." 하였다. 그 후로 옴진리교는 무장투쟁노선으로 바꾸었다.

2.3.1. PSI(Perfect Salvation Initiation)


자신의 뇌와 연결해서 자신의 뇌파를 수행자에게 옮김으로써 최종해탈을 이끄는 행위를 PSI(Perfect Salvation Initiation)라고 불렀다. PSI는 다른 옴진리교의 수행 과정과는 다르게 아사하라 쇼코는 완전 해탈자이므로 아사하라의 사고는 무조건 옳다는 병맛 같은 사고방식에서 시작되었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에 옴진리교가 세간의 관심을 받자, 아사하라의 뇌파를 복사한다는 헤드기어도 일본의 매스미디어에 오르내렸다.
옴진리교 교리에서 소위 말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타락한 데이터를 지우고 완전해탈한 마하 구루 아사하라의 데이터를 삽입하는 것으로 사마나도 완전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부정하고 아사하라 쇼코의 논리는 무조건 옳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비판없이 교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기묘한 분위기가 중의원 선거 참패 이후의 옴진리교의 무장노선을 추진하는 기반이 되었다.

2.3.2. 다키니


'''본격 옴진리교기쁨조'''. 원래는 티베트 불교에서 죽음의 여신들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의미가 왜곡되었다.

2.3.2.1. 다키니 해설

옴진리교 출가 신도의 계율에는 불사음(不邪淫)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위행위연인과의 성관계를 제외한 성관계가 금지되어있다. 그런데 아사하라 본인은 '최종해탈자'로서 계율도 초월한 존재이므로, 아사하라 전용의 일종의 하렘을 건설하였다. 아사하라 본인은 오오쿠(大奥) 제도를 확립한 도쿠가와 이에미츠환생이라고 통했기 때문에 같은 조직을 지어도 상관없다는 핑계였다. '젊은 여성을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좌도 탄트라이니시에이션'(성행위)을 최종해탈자의 의무로써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종교적인 논법도 사용하였다. 다키니는 약 30명이고, 제2사티 안에는 상시 10~15명이 살았다. 다키니가 된 여성은 홀리네임 '다키니'라는 칭호가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2.3.2.2. 다키니의 선발

  • 옴진리교에서는 입교할 때 얼굴 사진을 찍게 되어 있다. 이 사진을 교단 본부에 보내서, 아사하라의 취향에 맞는 여성이 선발되었다. 한 번 고려 대상이 된 여성은 다시 얼굴 사진 촬영을 하고 아사하라에게 사진이 제출되었다.[17]
  • 선발된 여성은 본부에서 아사하라 본인과 직접 면담을 나누었다.
  • 면담을 통과한 여성은 아사하라로부터 좌도 탄트라이니시에이션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처녀였을 경우, 다키니가 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아사하라는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음모를 작은 병에 담아 보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찰이 후술할 테러 이후 옴진리교의 거점에 대해 실시한 일제조사[18] 당시에 나온 병의 수는 100개가 넘어갔다고 한다.

2.4. 후일담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에 대대적인 수사와 함께 체포된 아사하라 쇼코는 사형이 집행된 2018년 7월까지 수감되었다. 이후, 옴진리교의 목표는 아사하라의 석방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탈옥시킨다는 시도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러시아제 헬기를 1대 밀반입하기도 했으나 결국 범행에는 활용되지 못했다. 헬기는 나중에 압수처리 당했다.
아레프로 이름을 바꾼 옴진리교는 2인자였던 죠유 후미히로의 개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죠유 구상으로 '''아사하라 석방의 일환'''으로 아사하라는 교조에서 前 대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그의 가족과 교단과의 연관은 부정되고, 마쓰모토 일가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아사하라를 신이라 부르는 걸 부정하자 결국 불만이 폭발한 구 장로단은 죠유 측과 분열하여 다투게 되었고, 결국 2007년 죠유는 '히카리노와'로 자신을 아사하라로 여기게 만드는 유사 옴진리교를 만들었다.
한편, 여전히 아사하라 쇼코는 신으로 숭상받고 있어서, 아사하라의 가족은 표면적으로는 아닌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교단 측에서 계속해서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탈퇴자인 척 하는 신도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생활하였으며, 특히 아사하라의 아내 마쓰모토 토모코는 계속하여 교단 인쇄물 등에 실리는 그림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생활비 지원을 받았다. 아사하라를 혐오하여 직접 인연을 끊었던[19] 넷째 딸은 현재 수도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2.5. 수감 이후


사형 판결 이후 아사하라를 비롯 옴진리교 일당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는데, 그 후 일본의 매스컴에서 그의 근황에 대해 다룬 바에 의하면, 똥오줌을 가릴 수 없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고 혼자서 소리를 지르는 등 정신이상을 보이고 있다고 하며 부인을 포함한 가족도 알아보지 못해 면회도 가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가석방을 노리는 연극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20]
실제로 이는 컨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차 아베 신조 내각 때 일본에서 사형 집행이 급증한 데다가 이전이라면 사형수 중에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물의가 적고 갓 사형이 확정되어 살 기회를 오래 주는 게 보통인 사형수까지도 주저 없이 사형장에 보내는 와중에 재심을 신청했기 때문.
한편 아사하라 자신은 사형 집행 전까지 재심 청구 이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수하 중에 사형이 확정된 3명이 특정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

2.6. 사형 집행


2018년 7월 6일 오전, 사형이 집행되어 죽었다. 방식은 교수형이며 같은 날 옴진리교 간부 6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수 현황에 대해서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s-6사카모토 츠츠미 일가족 살인사건#s-4을 참고.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해 총 7명이 동시에 처형되었는데, 1998년 이후 최다 인원이 동시에 사형된 것이라고 한다. #
이러한 대규모 사형집행은 2019년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고 나루히토 황태자덴노로 즉위하는데, 아사하라 쇼코 사형 시점에 쓰이는 헤이세이 연호5월부터 레이와로 바뀌기 때문에 새 연호가 제정되기 전에 흉악범 사형 같은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처리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21]
이후 집행에 입회한 관계자가 언론사의 취재에 응하여 사형 집행의 분위기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22]
7월 6일 오전 7시에 기상한 후 아침식사를 끝낸 직후인 7시 40분에 방에서 끌려 나온 뒤, 집행장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그 후 종교인에 의한 의식에도 응하지 않고, 집행 후의 자신의 유해를 누구에게 넘기겠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아무 말이 없다고 집행관이 재차 묻자 넷째 딸에게 넘겨달라는 말만을 남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형수와 달리 딱히 저항하거나 하지도 않았으며, 8시 조금 넘은 시각에 집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교수형 집행은 보통 방에서 끌려 나온 다음 종교인에 의한 고별식 및 유언 작성, 사후처리 등을 묻는 등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방에서 나온 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사후처리 외에는 딱히 아무 말도 안 했고 집행이 끝날 때까지 멍하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상에서 위와 같이 순순하게 형을 받아들였다는 거 가지고 정신이상 혹은 사형 집행 전날에 미리 집행일을 알려준 거 아니냐 라는 주장이 돌아다니는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게 위의 넷째 딸에게 시신 인도를 반대하는 마쓰모토의 아내와 셋째 딸이다. 즉 심신미약 상태인 사형수를 억지로 사형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 일본의 사형제도는 사형 집행 당일까지 절대 본인에게 집행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유는 1960년대에 먼저 알려줬다가 수형자가 자살한 케이스 때문인데, 이 사람 정도의 거물이 만일 전날 알려줘서 자살기도 혹은 자살했다고 치면 그 책임 아무도 못 진다. 물론 일본 법 및 만일 그랬을 경우에 생길 후폭풍을 생각하면 그냥 뇌피셜이다.
이후 유해를 인도받은 넷째 딸은 바다에 뿌려버릴 거라고 선언하였다. 이유는 성지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
사실 아사하라가 자신의 유해의 인도를 넷째 딸로 지정한 건 좀 신기한 일인데, 그녀는 옴진리교가 가장 활동적인 시기에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수련시설에 거의 감금되듯 살았던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이유로 옴진리교 관계자가 구속된 뒤에 대놓고 부모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유언에 대하여 아직도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아내와 셋째 딸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형수라고 해도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넷째 딸에게 인도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위에 설명했듯 넷째 딸은 교단 쪽과 척을 진 상태이므로 신변의 위협이 우려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고, 인도한 뒤가 어떻게 될지가 큰 문제라고 한다. 게다가 법적으로 고인의 의지가 제일 우선되므로 유해는 어떤 형태로든 넷째 딸에게 넘어가야 한다.[23] 같은 이유로 같은 날 사형당한 엔도 사형수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유언이 가장 중요시 된다는 원칙에 따라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인 알레프에 그대로 인도됐다. 본인이 시신 인도의 의지를 아예 포기했거나, 그녀가 유해를 인도받기를 거절했으면 모를까, 멀쩡히 넷째 딸로 지정했고 본인도 인도받는 것을 수락했다는 것이 남아있는데 도쿄구치소가 멋대로 처분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일본 사형제도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
사형 집행이 끝난 지 3일 뒤인 7월 9일에 도쿄구치소에서 장례화장이 끝났고, 유언에 따라 넷째 딸에게 유골을 인도할 시기를 조정하기 위하여 동 구치소에서 임시 보관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소송으로 간 상태이다. #
일본 사법부가 20년 이상 아사하라 쇼코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형을 집행하면 아직 남아있는 신자에게는 사형수가 순교자가 되고 사형 장소가 성지가 되어버리기에 살려둬서 욕보이게 해야 사회에서 매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형집행 전까지도 옴진리교 신도가 구치소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정도. 도조 히데키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2차 세계대전 전범 7인도 같은 이유로 미군이 그냥 바다에다 시신/유골을 수장해버렸다. 이후 미군이 제거한 오사마 빈 라덴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옴진리교 관계자들이 사건 계획의 상세정보를 불지 않았기에 경찰 및 검찰 측에서도 모방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끌어내야 했었고, 쇼코 본인도 처음에는 정신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워낙 죄가 커서 어지간한 정신이상으로는 사형을 면하기 힘들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 대신 테드 번디처럼 수배 중인 신도가 체포되면 그에 대해 증언을 해 주고, 사형이 집행될 것 같으면 다른 신도가 자수를 해서 사형 집행을 미루는 식으로 20년 넘게 집행을 질질 끌어왔으며 옴진리교 잔당의 존재를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주요 신도가 모조리 체포되고 재판이 다 끝남에 따라 법률상으로는 미룰 명분이 없어졌고 여기에 보태서 옴진리교 잔당의 행동이 생각보다 소극적이라는 판단이 서자 어차피 충돌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아베가 그냥 아사하라를 정리해버리기로 하고 사형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아사하라 쇼코가 죽고 난 뒤 옴진리교의 행태도 잘해봐야 자기들끼리 신격화하는 정도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3. 여담


  • 아사하라 쇼코가 저술한 서적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왔고, 그가 체포된 뒤에도 오랫동안 서점 일각에 남아있었다. 지금까지도 일부 대학의 도서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 사형 집행 후 NHK에서 옴진리교에 대한 다큐가 월드 프리미엄 채널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도 방영된 바 있다. 다큐에는 변호사와의 녹취록을 토대로 본인이 지시한 행동인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고 간부들이 종용했다는 식의 묘사가 있기도 하다.
  • 시티헌터 3 제11화 방송[24] 당시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얼굴이 나오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그러나 방영 이후인 1995년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자 해당 장면이 발각되어 문제시되었는데, 원인은 제작 당시 한 제작진이 우편함에 끼워진 옴진리교 찌라시를 장난으로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25] 재방송이나 DVD 발매 시에는 해당 장면이 삭제되었다.[26]
  • 한국 영화 사바하에서 상당한 비중을 둔 소재로 등장한다. 초반에 주인공이 사이비 종교 사슴동산이 옴진리교처럼 변질되면 위험하다는 주장을 하고 익히 알려진 흰 도복입고 수염을 기른 아사하라 쇼코의 외모와 유지태의 첫등장이 놀랄 정도로 비슷하게 나온다.
  • 일본의 메탈밴드 맥시멈 더 호르몬의 곡 F를 소재로 만든 뮤직비디오[27]에서도 나온다. 드래곤볼프리저를 소재로 만든 곡인 만큼 온갖 폭력독재자, 테러리스트 등이 전주에서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이 사람이 만든 애니메이션 초월세계와 실물 사진이 사용되었다.
  • 기반이 기반인지라, 9.11 직후 미국 무슬림처럼, 한동안 인도 주변 국가에선 아사하라 쇼코 때문에 피해본 힌두교도들이 여럿 있었다. 개중엔 개종하거나, 인도로 망명한 사람도 있는 편.
  • 2020년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으로 피의자 중 하나인 박사 조주빈의 얼굴이 공개되었는데 놀랍게도 쇼코하고 모습이 매우 닮아서 양국으로부터 이슈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조주빈이 태어난 1995년은 아사하라 쇼코가 시린가스 테러 혐의로 체포된 년도랑 같다.
  • 지상렬2011년 9월 22일 KBS2 <해피투게더> 시즌3에서 말하기를, 이 범죄자하고 닮아서 해외에 나갈 때마다 입국심사시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한 번은 일본에 갔었는데 여권과 본인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고. 김어준 역시도 외모 때문에 비슷한 오해를 여러 번 샀다고 여러 방송에서 말해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치 언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사이비 교주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실제로 일본에서도 입출국 심사 시 외모가 쇼코와 닮은 사람은 더욱 주의 깊게 확인한다. 옴진리교를 여전히 추종하는 사람 중 일부가 아사하라의 수염이나 사자머리 스타일을 일부러 따라하는 사례가 있어서 비슷하면 불이익 비슷한 게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사형 이후에도 한동안은 주시를 받았다고.
[1] 아사하라의 사진은 1995년 체포당시 찍힌 사진을 마지막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법정에 출석할 때에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어 언론에서는 90년대 사진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서 언론에 내보낸다.[2] 2018년 7월 6일에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3] 출처 일본 사이트에서는 아사하라 쇼코의 키를 170cm로 추정했다.[4] 본래 구루를 높여부르는 평범한 존칭이었으나, 아사하라의 악행 때문에 현재는 아사하라나 그에 준하는 사이비 교주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구글에서 尊師라고 검색하면 이 사람에 대한 위키백과 문서가 최상단에 표시된다.[5] 일본의 입시학원을 말하는 것이다.[6] 이름은 아함경과 비슷하지만, 정작 교리는 금강승 밀교와 힌두교를 섞어놓은 종교단체였다.[7] 대단한 재주는 아니라지만 허벅지 힘이 만만치 않아야 하고 더불어 유연성도 있어야 하기에 누구나 막 따라하는 재주까진 아니다. 다만 신통한 능력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8] 엉덩이가 안 아플 수는 없겠지만 엉덩이 부위가 인체에서 쿠션이라 부를수 있는 부위인 만큼 어지간히 착지 실패를 하지 않는 한 다칠 가능성은 낮다.[9] 사실 타키모토 타로 변호사가 연습 초기 공개한 사진을 보면 표정도 심하게 찡그린 상태이고 뛰어오른 상태에서 몸의 기울어짐도 아사하라 쇼코보다 심한 편이었다. 물론 "연습만 좀 덜했을 뿐이지 신통력이 아니라 연습하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 임을 폭로하는 데는 충분했지만. 현재 공개된 사진의 경우 표정 관리와 그럴싸한 자세로 쇼코의 거짓말을 완전히 발라버릴 작정으로 더 연습한 것이든지, 해보니 재미있어서(...) 계속 연습한 결과 여유로운 표정과 완벽한 균형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사실 이 자세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게 없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는 단순히 '공중부양 수행의 첫 단계'일 뿐이다. 애초에 이런 수행법은 완전히 근본도 없이 아사하라 쇼코가 뿅 하고 생각해 낸 건 아니다. 차크라를 열거나 단전에 기를 모으면 육신이 어느 순간 떠오른다고 믿는 심신수련집단은 의외로 많다. 심지어 공중부양마저 스쳐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하고 유체이탈 정도까지는 가야 그래도 어느 정도 수련한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물론 쇼코의 경우는 의도부터가 불순한 수련법이니 정말 무슨 심신적인 효과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결가부좌를 하고 책상다리 상태로 팔짝팔짝 뛰어다녔으니 당연히 전립선에 충격이 주어지면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을 것이고, 이걸 가지고 차크라가 열렸네, 단전에 생명 에너지가 느껴지네 운운한 거라고 까기도. 어쨋든 이 공중부양 수행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 중 첫 단계가 이처럼 바닥에서 양반다리를 한 채로 점프하는 게 첫 단계이다. 각 수행원마다 그 단계 분화는 다르지만 보통 3~5단계로 나뉜다. 물론 실제로 다음 단계는 그딴 거 없다.[11] 아사하라가 생전에 썼던 책 《최후의 해탈자》와 교단에서 제작한 홍보 애니메이션인 초월세계에서는, 아사하라가 공중부양의 첫 단계를 거친 뒤 수 초간 공중에서 정지했으며, 이를 주변의 수행자들이 목격하고 증언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판단은 알아서. 몇몇 신자들은 당시 공중에 잠시 점프한 순간을 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셔터 속도가 빠른 카메라가 흔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저 사진을 공중부양 장면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타키모토 변호사가 찍은 사진에서 보듯이, 일본에서 이 정도 성능의 카메라는 마음만 먹으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의 카메라 메이커들은 일본에 다 있다시피 하다. 일본에서 못 구하는 카메라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구하기 힘들다는 소리다.[12] 2017년에도 발행되고 있는 잡지이며, 너의 이름은.에서 미야미즈 미츠하의 친구인 텟시가 읽는 잡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날씨의 아이에 오면 아예 무 잡지가 주요 소재다.[13] 아시아권 종교가 히피 운동의 영향을 역으로 받으면 이렇게 된다. 비슷한 경로로 비슷한 또라이가 된 오쇼 라즈니쉬의 행보도 이와 꽤나 유사하다.[14] 티베트 불교의 포와(Phowa, འཕོ་བ)란 말을 일본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원래는 '(정신, 의식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구루(영적 스승)의 인도를 받아서 극락으로 가고자 행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죽는 사람의 정수리에 위치한 의식을 그의 생전 선택에 따라 서방정토(Sukhavati), 묘희세계(Abhirati), 밀엄국(Ghanavyūha) 등의 극락세계 중 한 곳으로 옮겨주기 위해 행한다. 포와가 성공했을 때는 길상초(쿠사 풀)로 죽는 이의 정수리에 미리 뚫어놓은 작은 구멍에서 나 혈청이 몇 방울 솟아나온다고 하며, 그 외에도 여러 생물학적/물리적 현상이 일어난다. 포와를 행하는 구루는 이러한 현상을 실제로 죽는 이의 친지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15] 아사하라는 이 단어를 차용하여 자신의 손으로 저지르는 살인을 완곡하게 기리키는 은어로 삼았다. 해탈한 자에게 살해당하면 구제를 받으므로,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인물을 제자 손으로 살해하여 전 세계를 구원으로 인도하노라고 정당화했다.[16]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마하야나(Mahayana)는 '큰 수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한자로 '대승'(大乘)이라고 번역하는데, 대승 불교의 그 대승이다. 바지라야나는 일본식 발음이고 한국에서는 보통 '바즈라야나'라고 쓰는데, 산스크리트어로 Vajrayana를 말한다. 한국불교학회의 음역법으로는 '''와즈라야나'''라고 쓴다. 이는 금강승(金剛乘), 즉 밀교를 가리키는 단어다. 아사하라 쇼코는 멀쩡한 불교 용어를 본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뜻으로 왜곡해 사용한 것이다.[17] 시각장애인은 안 보이지 않느냐는 태클이 있는데, 알다시피 여러 범주의 시각장애인이 있고, 이 작자는 상술했듯 전맹이 아니다. 브라운관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하면 TV를 시청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이었다고 한다.[18] 한국 경찰의 압수수색과 유사한 조사이다.[19] 당시 미성년이었다.[20] 이후 옴진리교의 신도와 아사하라 일가는 일본 정부가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를 처형했다고 언론플레이를 시도했다.[21] 한국에서도 1997년 사형집행 중단 직전, 김영삼 정권이 차기 김대중 정권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는 민간 형법에 의한 마지막 사형집행(교수형)이었고, 군 형법상 마지막 사형집행(총살형)은 1986년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박모 이병을 처형한 것이다.[22] 주목도가 높은 사형수에 관해서는 약간 시간이 지나면 언론 등에 인터뷰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다. 물론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 반향이 적도록 각색은 하지만.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주목도가 높았던 사건의 경우, 후일에 공개된 내용이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어떤 걸 먹었는지까지 공개되는 게 일본 언론이다.[23] 단, 인도받는 사람이 거부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24] 정확한 날짜로는 1989년 12월 24일.[25] 정작 해당 제작진은 옴진리교 신자가 아니었다. 오우머였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신자라면 포아 당할 것이 두려워서라도 저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26] 징징이의 자살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하나 있긴 하다. 차이점이라면 실존 여부와 등장 시간의 차이.[27] 공식 뮤직비디오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