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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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判能
1894 ~ 1955

'''이판능은 무죄호[1]

아 정신상실자로 변호인이 극력주장'''


재작년 동경에서 십칠 명의 일본 사람을 한 손에 살상한 이판능(29)의 공판은 20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동경 지방 재판소에서 개정하고 피고의 정신 감정에 대한 오(구레)[2], 삼택(미야케), 삼전(스기타) 세 박사의 “정신잃은 자” [3]라는 감정서를 낭독하고 피고 변호인은 감정서와 같이 정신 없는 자가 확실하면 의례히 무죄라고 주장하여 세 시가 지난 뒤에 폐정하였다.
1923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출처
1. 소개
2. 개요


1. 소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일본인 대다수와 조선인 소수를 연쇄살인연쇄살인범. 우범곤과 유사한 종류의 대량 학살범이다.

2.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인 및 조선인 대량살인범. 살인 행위 사이에 냉각기가 없었기 때문에 연쇄살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연쇄살인 관련 연구에서도 구한말 이후 언론매체를 탄 최초의 연쇄살인범으로는 이판능 대신 이관규를 언급한다.
이판능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동차 차장으로 근근히 먹고 살던 하층 노동자였다. 1921년 6월 2일 당시로서는 고가품이던 수건 3장을 집에서 도둑맞곤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으나 무시당하자 분노가 쌓였고, 집에 돌아왔는데 일본인인 하숙집 여주인과도 그 문제로 다투다 여주인의 남편에게 얻어맞자 분노가 폭발했다. 그 길로 부엌칼을 휘둘러 주인집 가족을 죽이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찔러 그 결과 17명을 살해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일본인 만이 아니라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징역 7년 6개월로 감형받았다. 감형받은 이유는 정신 질환 때문인데,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당시 일본에서는 최초로 정신병을 감형 사유로 내세웠다고 한다.
조선인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져 방청석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차별적인 태도에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판능의 범행 동기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고, 조선에서도 조선일보 등이 대서특필을 하여 해당 사건을 크게 다뤘으며, 상당히 동정적인 분위기라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소수의 하류 계층에 불과했던 게 조선인들로 이들의 압력에 뭔가 판결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신이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형량이 낮아졌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이것은 2년 후 상당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이후로는 일본에서 조선인이 연관된 살인사건이 나도 조선인/한인 사회가 침묵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근대형 대량 살인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뒤로 연속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제2의 이판능'이라든가, '제3의 이판능'이라고도 일컫었다. 그 이후 이판능에 대한 기록은 1955년 사망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 사망했다면 사망 사실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반해 사망 년도가 정확히 알려진 것을 보면 한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 무죄라 주장하며[2] 일본 성씨중 구레라는 성이 있다.[3] "정신잃은자"는 요새 말로 정줄놓이라기보다는 싸이코패스에 더 가까운 말로 보인다. 기사 내에서는 근대 법학의 심신상실과 같이 쓰였지만, 원문에 "정신없는자"라고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붙여쓴 점이나, Psychopath의 어원적 의미가 Psycho(정신)path(결여)라는 점을 보면... 사이코패스의 주요 특성인 공감 능력•준법 의식 결여, 높은 충동성•반사회성이 당시의 기준에선 '정신이 없는' 상태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