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래
1. 회령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홍래
이홍래는 1888년 10월 29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1월 나철, 오기호, 김동필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계획하고, 강원상(康元相) 등과 함께 군부대신인 권중현을 사살하고자 하였으나 부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동원당(東園黨)을 조직하였으며, 1918년에는 정신 외 1명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고 간도 각지에 30여개소의 지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일민보(一民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서일·현천묵·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군정부를 조직하자 제4중대장 및 모연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국내에 파견되어 회령·무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기관을 습격 파괴하였다. 1921년 9월경에는 부하들을 간도지역에 파견하여 태평양회의에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조국의 광복을 이룰 수 있다는 홍보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김승학·이유필(李裕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으며, 1924년 4월에 강기성(姜基成)과 함께 하얼빈도외17도구(哈爾濱道外十七道溝)에서 밀정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강기성(姜基成)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25년 4월 24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위반, 폭발물 취체규칙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는데 이후의 재판 결과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공소가 기각된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중국 지린성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7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홍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이홍래
이홍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통신부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0년 10월 19일 만주 화룡현 강성동에서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이홍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