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천묵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현천묵은 1862년 4월 9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부윤동에서 부친 정눌(玄貞訥)과 모친 울진 장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에 그가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0살 때부터 사숙에 입학하여 22세까지 한학을 수학했고,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현기준(玄機濬)과 현학준(玄學濬)을 두었다고 한다. 이후 1906년 보성학교 학감을 맡았고, 1908년 〈사립학교령〉으로 인해 폐교될 위기에 몰리자 1909년 5월 8일 서류를 구비하여 ‘설립인가청원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여 인가를 받고 교장으로 최붕남(崔鵬南)을 추대했다.
이후 그는 보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경성향교 직원을 겸임했으며, 대한협회 경성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다른 지회들과는 달리 의병 활동을 지원해줬다. 지회원들은 경성의병에 군자금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항일전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들은 1908년 9월 경성의병과 함께 명천군(明川郡)에 주둔한 일제 군경을 기습·공격하는 데 선봉으로 나섰다. 이로 인해 경성지회가 해체될 위기에 몰리자, 현천묵은 지회장으로서 단체의 해산을 막기 위해 ‘친일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현천묵 이하 간부 6명은 함일학교와 보성학교 학생들에게 단발시키는 등 과감한 ‘임기응변의 조처’를 취하였다. 자구책은 실효를 거두어 경성지회 해산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경계대상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고, 경성지회는 점차 무력화되었다.
이무렵 대종교 신자인 강우(姜虞)와 친분을 맺은 그는 강우의 전도에 따라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후 그는 서일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고, 1911년 서일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대종교 포교와 이주한인들을 규합·보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24일에는 연길현 이도구에서 주민 800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후 무장 투쟁으로 기울은 그는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 인사들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조직하고 김좌진, 나중소 등을 기용했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은 명칭을 대한군정부로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허가를 선청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바꿀 것을 제안한 후 임시정부 국무원포고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현천묵은 왕청, 혼춘, 동녕, 영안, 목릉 일대를 관장하며 김좌진을 지원했으며, 수도실에서 기도를 올리는 등 신앙 생활도 충실히 수행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현천묵은 계화, 이범석, 안희(安熙), 이학근(李學根), 홍범도, 박영희 등과 회합하여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때 현천묵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에 따라 대한군정서는 일본군의 공세를 회피하기로 결의하고 일본군의 추적을 회피했다. 그러다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추격해오는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를 치른 끝에(청산리 전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제가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독립군은 북만주 밀산으로 후퇴했다. 대한군정서와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은 그곳에 집결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로 재조직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이 맡았다."혼춘사변에 의해 드디어 일본군대가 출동하여 아작전(我作戰)에 장애를 가져온 것이 심대하다. 이제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패는 미지수에 속할지라도 그 때문에 지나(중국) 측의 감정을 해(害)하고 일본 측은 다대의 병원(兵員)을 증파하기에 이를 것이다. 아단체(我團體)는 실로 내외독립의 조아(爪牙)로서 역시 광복의 맹아이다. 구전(舊戰)의 호기는 멀지 않았다. 시하 은인자중(隱忍自重)을 요한다."
1921년 4월 대한의용군총사령부는 독립단대회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에서 홍범도로 바뀌었다. 대한독립단은 대한군정서를 확대하여 여러 독립군단체를 통합한 체제로 편성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현천묵은 서일, 김좌진, 조성환, 나중소 등과 함께 참화를 겨우 피했다. 그러나 서일은 뒤이은 마적단의 습격으로 부하들이 모조리 전사하자 책임을 통감하고 1921년 음력 8월 27일에 자살했다.
서일 자살 후, 대한군정서는 한때 해산을 고려했지만 논의 끝에 존속하기로 결의하고 현천묵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현천묵은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대종교 포교와 한인들의 교육,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통해 만주지역 한인들의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치중하기로 했다. 그는 김혁(金赫)과 논의하여 대종교의 종교적 부흥과 대한군정서의 재기를 위하여 본부를 밀산현에서 대종교 본당이 있는 영고탑으로 옮겼다. 또한 각지에 학교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각지 동포들에게 대종교창기문(大倧敎創起文)을 배포했다. 그리고 김교헌과 함께 해림, 하얼빈 등지에 포교 기관도 세웠다.
1923년 9월 독립운동단체 통합 결과로 군정서·의군부 등 9개의 단체로 대한독립군단이 재조직되었다. 현천묵은 이범윤을 임시 단장으로 적극 추대했다. 그는 이범윤에게 서신을 보내 군사 통일을 실현하자고 주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리하여 대한독립군단이 결렬되자, 그는 1924년 3월에 대한군정서를 재조직했다. 자신은 총재를 맡고 군사부장엔 조성환, 서무부장에 나중소, 재무부장에 계화, 참모에 조성환, 나중소, 김규식, 김혁 등을 선임했다.
이후 그는 1924년 5월부터 하얼빈, 동녕현과 북간도 방면에서 무기 구입을 실시했으며, 흑룡강성에 사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에 참석하여 북만주 독립운동단체 통일에 동의를 표했고, 3월 10일 신민부(新民府) 조직에 동의하였다. 그는 신민부 통합을 위해 대한군정서 본부를 신민부 본거지로 결정된 영안현으로 옮겼다. 그는 신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장과 검사원장을 맡았다.
1926년 초에는 신민부 대표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신한촌에서 열린 재만조선동포간부회의에 참여해 임시정부·고려공산당·정의부·의열단·대한통의부 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했다. 3월 중순에는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정의부 김동삼, 이탁 참의부 오동진 등과 함께 전만주의 통일을 계획하고 군사기관 확장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1927년 1월 15일 현천묵 선생은 대종교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질(陞秩)되어 대종교 지도자로서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인 1928년경 사망했다. 향년 66세. 그의 친우였던 강우는 그를 기리는 추도문을 올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천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아아, 슬픈지고, 백취선생. 산천이 정기를 모아, 생장하신 고장은 함경도에서도 북쪽 경성의 남방이었읍니다. 자질은 영웅 호매(豪邁)하고 인품은 순수 선량하였읍니다. 특출한 기개, 활달한 마음에, 의협스러운 높은 기풍, 개결(介潔)한 맑은 지조였습니다. 세상이 소란해지자 마음속으로 분발하여 학교와 서당을 건설하며 사방으로 분주하니 끓어오르는 더운 피로 언제나 교육장에서 울었습니다. 대교(大教)를 숭앙하여 받드는데 게으르고 폐지하는 일이 없이 10년을 한결 같은 정성이었습니다. 청파호 교당에서 신고(神誥)를 크게 읽고 한검 교리 널리 펴니, 상교(尙教)는 천직이요, 부전(副典)은 인망(人望)이었습니다.
북관(北關)의 호걸이요, 동도(東道)의 문장으로 흰 머리를 흩날리며 청년들을 격려 지도하시었습니다. 오래도록 독실이 믿고 늙으면서 더욱 건강하시니, 백세는 누리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신병이 어인 일이었소. 풍진 세상에 표박(漂泊)하는 생활, 집과 나라 황량해지니 세상을 개탄하며 오래도록 병석에 누었다가 끝내 저 세상을 가시었습니다. 밀강(密江) 강상에 원한 잠긴 물이 흐르는데, 슬픈 물결은 목메어 울고, 수심하는 구름은 처량하게 떠돕니다. 한 마디 소리로 크게 슬퍼하니 태양도 광채가 없습니다.
보일 듯한 그 모습 빈 들보에 지는 달만 비치는데, 정령(精靈)은 어디 계신지, 옥경(玉京)이 아득하게 멉니다. 가서 상제 보좌(寶座)에 호소하소서, 한배님 계시오리다. 5계(界)는 괴롭고 어둡지만 3궁(宮)은 길하고 상서롭습니다. 이 세상 길이 떠나서 무강한 쾌락을 누리소서. 천전(天殿)을 우러러 뵈오니 내 마음 비감하와, 멀리서 추도의 의식을 올리며 술을 드리옵니다. 신령이 와서 느끼시면 복록을 반드시 내리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