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

 

'''나철
羅喆'''
'''성명'''
나철(羅喆)
'''초명'''
나두영(羅斗永)
'''이명'''
나인영(羅寅永)
'''본관'''
금성 나씨
'''호'''
홍암(弘巖)
'''출생'''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사망'''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묘소'''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삼종사 묘역
'''종교'''
대종교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단군신앙운동
3.2. 독립운동방략
3.2.1. 중도주의
3.2.2. 호생주의
3.2.3. 수행주의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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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대종교의 초대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한 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권이 갈수록 쇠진해지고 외세의 각축전이 가속화되자 관직 생활에 뜻을 잃어갔다. 1904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하던 중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해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시키자 5월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 운동을 꾀했다. 그러던 중 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해 포츠머스에서 강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의 장래 문제가 회의에서 다뤄지리라 보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조야에 호소하고자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이 이를 막자 1904년 6월 유람을 명목으로 내세워 도쿄로 간 후 미국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미국행 비자가 나오지 않자 그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친선 동맹을 맺음으로서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천황에게 정의대도(正義大道)와 동양 평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회신이 나오지 않자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하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나철은 분노했다. 그는 매국노를 모두 죽여 국정을 바로잡겠다고 결심한 후 칼 2자루를 행낭을 감추고 11월 30일 귀국했다. 1906년 1월 그는 오기호와 함께 을사오적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하고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대하(李大夏)로 하여금 권총 8정을 구입하도록 했다. 이기(李沂), 윤주찬(尹柱瓚) 등에게 자작회(自作會)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작성하였고 자신은 헌간장(軒奸狀)과 동맹서(同盟書)를 작성했다. 윤주찬 등에게는 한국 정부와 일본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 국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게 하고 김동필, 박대하(朴大夏), 이홍래 등으로 하여금 결사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1906년 나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통감부의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일본 대신들[1]과 접촉해 을사조약을 폐기하고 통감부를 철폐하는 일에 관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지만 폭탄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이후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는데 음력 정월 초하루에 을사오적이 신년 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할 때 처단하려 했지만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 후 대원을 5개조로 나눠서 2월 5일, 8일, 12일 3회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지만 대신들이 경호를 철저히 받고 있어서 실패했다.
얼마 후 동지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고문을 못 이기고 발설하면서 오적 암살 계획은 발각되었다. 그는 동지들이 차례로 체포되자 동지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평리원(平理院)에 출두했고 1907년 7월 3일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보내졌다. 하지만 1907년 12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나철은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 통로를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채 귀국해야 했다.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는데 이 날이 중광절(重光節)이다.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고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한일병합 공포 1달 전인 1910년 7월 30일 나철은 칙령을 발표해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한다고 선포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했으며 단군의 발자취를 찾아 성지 순례의 길을 나서 강화도평양을 거쳐 백두산 아래의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다. 나철은 청파호에서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고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교인과 교조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교육 시설을 마련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일제는 대종교 신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경계심을 품고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이로 인해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나철은 1916년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향했다. 8월 5일 황해도 사리원역에 도착한 그는 역 앞 대기 사진관에서 제자 6명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8월 6일 삼성사에 도착한 그는 8월 한가위에 동네 교인들과 함께 제례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

나철은 제자들더러 삼성사의 문을 봉하게 한 뒤 그 안에서 여러 편의 유서를 남겼다. 그는 먼저 자신이 자결을 선택한 까닭을 밝히는 순명삼조(殉命三條)를 작성했다.

一. 철(喆)은 죄가 무겁고 덕이 엷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 겨례의 망케 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어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은 교를 받든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님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서 장차 뭇사람을 구원할 듯 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거룩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한배검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이 이제 온 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진 길에서 괴로움에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대신 받으리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 남기는 밀유(密諭)를 작성했다.

아! 우리 종문(倧門)에 뒤를 이은 이들은 항상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한울을 숭배하며 한얼님을 받들고 반드시 지극한 어짐과 사랑으로 사람을 건지고 세상을 구원하라. 이 교를 베풀어서 덕을 넓히고 업을 빛내며, 그 일의 처음을 좇아 벼리를 끌고 벼릿줄을 떨칠지어다. 마음을 놓아 신명(神明)을 속이지 말며, 기운에 지나쳐 선동하여 떠들지 말고, 빗나간 행동으로 정치에 간섭하지 말며, 망녕되이 움직여 법률에 범하지 말고,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함과 미혹함을 가까이 말고,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지르지 말며, 고우를 믿고, 세상 공론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 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궁하고 가난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라.

안정함으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願禱)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불리고 자손에게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화목하게 사랑하고 정밀하게 안으로 어짐과 지혜를 닦으며 삼가 밖으로 믿음과 정의로 사귀고 두터운 정성을 일으킴엔 반드시 내 집에 일찍이 있는 여덟 가지 금함(팔관(八關))을 쓰며, 두터운 예절을 강구함엔 반드시 우리 도의 예부터 내려오던 아홉 가지 맹세(구서(九誓))를 쓰고 세 법(삼법(三法) :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 물결의 고요히 쉼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넓게 열림을 얻으라. 이와 같이 실천하면 한울이 반드시 복을 내릴 것이요, 만일 거슬려 어기면 한얼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리실 것이 조심하고 힘쓸지어다.

나철은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도 유서를 남겼는데 내용은 "자신의 죽음은 나라와 겨레를 위함이며 대종교는 한 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함이니 탄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아기(딸)에게 유서 안집

열네해 동안 니 얼굴을 못보고 오늘 천고영별은 니 맘에 맺힌 한이 있을 듯하고 내 눈에 항상 걸릴듯하나 기 길은 곧 영생하는 하늘길이니 부디 애희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거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믿고 아비를 만나려거든 공부를 통하여 하늘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잊지 말라.

친부자필

정경, 정문, 정채, 정강, 정기 다섯 아해에게

너 아비의 돌아감은 한울에 순함이니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수십 년을 밖에 있어서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개천구령에 빠지게 하니 실로 너 아비의 덕이 없음이라. 너의 무리 가운데 혹시 내 뜻을 이어서 몸을 종문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내 아들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

초상 장사 제사의 세 가지를 아래에 적으니 너희들은 경계하야 행할지어다.

一. 초상에는 머리를 푸지 말며 울음을 울지 말며 염함에 명주 비단을 쓰지 말며 다만 삼베 무명으로 하고 아침 저녁의 곡을 폐할 것.

一. 장사에는 시체를 짜는 데 관곽을 쓰지 말며 다만 부들자리로 하고 꽃상여 등 엣 제도를 쓰지 말며 명정에는 다만 성명 두 자만 쓰고 화장하여 깨끗함을 얻게 하고 궤연, 제복, 방립, 상장직령, 조석전, 시묘 등 옛 제도를 폐하며 다만 삼백예순여섯날로써 복을 벗고 기공 등은 이에 따라서 감할 것

一. 제사에는 기일에 고기, 술들을 쓰지 말며 다만 한 그릇 밥과 한 가지 반찬으로 하고 신주를 만들지 말며 소리내어 울지 말 것.

한님이 나리신지 사천삼백일흔세해 병진 팔월 보름날에

아비가 아사달메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

사위에게 남김.

사랑하는 사위 안종익 호는 백호

나는 너는 아주 사랑하고 너도 나를 믿었다. 내가 도의 두자로 너를 면려하엿는데 너는 과연 그것을 믿고 모름지기 힘을 썼구나. 지금 한 올 목숨을 절단하면서 바라건데, 중생의 죄를 대신하여 종도를 천하에 베풀 것을 기다린다. 또 죽고 사는 것은 몸껍질에 있지 아니하고 신의는 오직 신명을 맑게 하는 것이니, 너는 능히 대도를 수련하여 천리에 도달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죽음에 임하여 세상을 잊을 수 없어서 한 말을 남긴다.

단제 강세 4373년 병진 중추절에

늙은이 홍암 친서

8월 16일 새벽 제자들이 인기척이 느끼지 않는걸 이상하게 여겨 문을 뜯고 들어가보니 나철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한다. 대종교에 따르면 나철은 폐기법(閉氣法)으로 조천(朝天)[2]했다고 하는데 스스로 숨을 멈춰서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호흡은 대표적인 불수의 작용이고 스스로 호흡을 멈추면 당연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3] 종교 학자들은 나철이 폐기법으로 조천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만 역사학자들은 폐기법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나철이 자결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나철의 묘는 중국 지린성 허룽시(和龙市)에 있다. 나철과 함께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힘쓴 서일, 김교헌의 묘도 함께 있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정보

3. 사상



3.1. 단군신앙운동


나철이 편찬한 <대종교 경전>에 나타난 단군전승은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교서를 중심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단군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대종교 경전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 등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환인과 환웅의 시대를 중요시 여기며 우주와 인류의 기원, 그리고 인류의 역사적 전개를 보다 자세히 다룬다. <대종교 경전>에 따르면, 환웅은 사람으로 화하여 백두산 박달나무에 내려왔다고 한다. 또한 한웅은 한얼 사람으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가지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와 뇌공(雷公) 등 여러 신장(神將)을 부려 산하를 개척하고 사람과 사물을 이치로 자라게 하고 한얼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철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곰이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으로 변한 뒤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은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단군의 신화적 요소보다도 단군의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대종교의 <신사기>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는 이름의 남녀가 짝을 이뤄 그 자손이 나뉘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남색 인종 등 다섯 빛깔의 종족이 되었다. 황인종은 넓은 벌판, 백인종은 호숫가, 홍인종은 남녀 바닷가, 남색 인종은 여러 섬들에서 살게 되었다. 이 가운데 황인종이 가장 커졌으며, 다시 네 갈래로 나누어져 개마산 남녁에 사는 이들은 양족(陽族)이 되고, 동녘에 사는 이들은 간족(干族)이 되고, 속말강인 송화강 북녘에 사는 이들은 방족(方族)이 되고, 서녘에 사는 이들은 견족(畎族)이 되니라.

나철은 <중광가>와 <신리대전> 3장 "한얼사람"에서 다섯 종족, 구종(九種), 오주(五主), 오훈(五訓)에 대해 기술했다. 다섯 종족은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홍인종, 남색 인종 등 다섯 빛깔의 종족을 의미하며, 구종은 오족에 양족, 간족, 방족, 견족을 합한 것이다. 오주는 곡식, 명령, 질병, 형벌, 선악의 오사이며, 오훈은 한울, 한얼, 한울집, 누리, 참리치의 다섯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렇듯 대종교는 환인과 환웅, 그리고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포괄적인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나철은 당시 다양하게 전개되던 단군신화와 단군신앙운동 가운데 백봉의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단군신화를 새롭게 수용하고 단군신앙운동을 전개했다. 대종교 측의 주장에 따르면, 백봉이 태백산에 들어가 10년간 하늘에 기도하던 중 단군신명의 묵시를 받아 백두산 석함에서 단군교의 경전과 <단군조실사(檀君朝實史)>를 얻었으며, 나철이 백봉의 제자 백전과 두일백을 통해 전수받았다고 한다.
나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인, 환웅, 단군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을 재해석했다. 그는 환인은 절대적 최고신이며,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큰 존재를 의미하는 순수한 한글 '한임'을 한자로 표기하여 환인(桓因)이라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단군을 모든 선악을 다스리고 복락의 근원이자 재앙을 막는 대황조(大皇祖) 또는 성신(聖神)으로 여기고 지극한 인과 큰 덕을 근본 삼아 성심, 성의로 받들고 공경해야할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단군의 가르침의 신교의 명칭이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달리 불려져 왔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부여 시대엔 대천교, 신라 시대엔 숭천교, 고구려 시대엔 경천교, 발해 시대엔 진종교, 고려 시대엔 왕검교, 만주에선 주신교라고 불려왔으며, 선가의 천선종조, 석가의 제석존숭, 유씨의 상제림여, 야소의 야화화, 회회의 천주신봉 등이 모두 '한배님'의 다른 이름이라 여겼다.
나철은 단군의 신교가 모든 종교의 근원으로서 세계 정신문명이 하나로 상통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환인, 환웅, 단군이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고 주장했다. 대종교의 <신사기>는 이러한 삼위일체 사상의 근간이 되는 한임, 한웅, 단군에 대한 역사를 <조화기>, <교화기>, <치화기>로 나누어 기술했다. 이중 <조화기>에서, 한임의 조화주(造化主)로서의 역할과 인간의 기원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삼가 상고하건대, 만드는 임자인 조화주는 한임이시니, 천국을 여시어 뭇누리를 만드시고, 대덕(大德)으로 만물을 기르시나니라. 뭇신령들과 모든 밝은 이들에게 명령하사, 제각기 직분을 주어 누리 일을 갈라 맡기시되, 먼저 해누리의 일을 행하시니라. 해사자(日使者)는 불을 맡고, 뇌공(雷公)은 번개를 맡고,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는 물을 맡고, 풍백(風伯)은 대기(大氣)를 맡고, 여러 성관(星官)들은 칠백 누리들을 맡게 하시니라. (중략) 외짝 양(陽)으로써는 낳지 못하고, 또 외짝 음(陰)으로써는 변화시키지 못하며, 한 쪽으로 기울면 도리어 이루지 못하나니, 둘이 서로 어울려야만 기를 수 있느니라. 신령과 밝은 이들이 그 명령대로 저마다 제 직분을 행하되, 차고 더움과 마르고 젖고 하기를 때 맞게 하여, 음양이 고르니, 기고 날고 탈바꿈질하고 헤엄질치고 심는 온갖 동식물들이 지어지니라.

또한 나철은 대종교 홍범 1조에 "교명은 대종이니 한배 단군의 창립하신 교이니라."라고 하였으며, <의식규례발포안>에서도 신앙의 대상처를 분명히 했다. 그는 삼신은 서로 셋이면서 하나의 존재임을 강조했다.

세검한몸이신 한배검은 우주가 생성하기 전부터 더 위가 없는 으뜸자리에서 우주를 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조화주 한임이오,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는 만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는 교화주 환웅이오, 만물과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치화주이신 한검이다. 그래서 세검은 한몸으로 한배검이라 받들어 모신다.

나철은 대종교 신앙의 사상적 틀인 삼신일체 사상을 <신리대전>에서 철학적으로 서술했다. 그는 한얼님 자리(신위), 한얼님 도(신도), 한얼 사람(한배검, 신인), 한얼님 교화(신교)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임, 한웅, 한검이 각각 삼위로 각기 조화, 교화, 치화의 역할을 하는 삼위일체적 신앙을 근본으로 삼았다. 한임, 한웅, 한검은 나누면 셋이 되고, 셋이 합하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신도를 형상 없는 모습을 지니고 말없음으로 말하며 함이 없이 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형상 없음은 모든 형상의 나타나는 근원이 되고, 말씀 없음은 모든 교화의 근원이 되며, 행함이 없음은 모든 행함이 이루어지는 근원이 되는 것이 신도의 이치라는 것이다. 대종교 3대 교주 서일은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얼님 도의 변화를 말함인데 모습하시어 조화의 자취가 나타나니 그러므로 이를 힘입어 나는 것이요, 말씀하시어 교화의 기틀이 보이니 그러므로 이를 힘입어 교화되는 것이요, 함이 계시어 치화의 공적이 베풀어지니, 그러므로 이를 힘입어 이루는 것이니라.

이렇듯 무형, 무언, 무위가 형상, 말씀, 행함의 근원이 되기에, 신인은 형상이 없으나 형상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게 되고, 말이 없으나 한 번 말함으로써 교화의 말이 되고, 행함이 없으나 한 번 움직임으로써 치화의 덕이 된다. <신리대전>의 마지막 장인 <신교>에서는 이러한 삼신일체사상을 집대성하면서 이같은 이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아 진리를 얻게 될 때 하느님 한배검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즉, 대종교는 단순히 단군만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삼신일체의 천신을 받드는 신앙사상인 것이다. 또한 대종교는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서 한국 건국의 시조인 동시에 신교인 대종교의 교조이며, 삼위일체의 현실로 나타난 신적 존재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로서 일제 치하의 잃어버린 한반도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회복하고자 했다.

3.2. 독립운동방략


나철은 <백두산 천제문>에서 한민족이 망국의 노예백성으로 고통받는 원인은 경봉천신을 외면함으로써 받는 업보라고 봤다. 그리고 <이세가>에서는 일제 식민지 정책을 종교적 도덕감으로 공박하고 식민지를 악의 세상으로 보고 선을 통해 살벌한 세상을 순치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중광가>에서는 광명정대한 신앙의 자세로 악의나 불의에 꺾이지 말 것을 당부했으며, 일제 식민지 정책에 구속되어야 하는 대종교 교주로서의 자신을 성찰하고, 순교를 통한 속죄를 암시했다. 또한 그는 대종교 교주로서 한배검의 모욕됨과 대종교의 속박, 그리고 민족 구성원을 식민지 백성으로 타락시킨 것에 대한 죄의식을 여러 글에서 토로했다.
이렇듯 당시의 민족적 상황에 대해 고발과 탄식을 한 나철은 대종교의 사상을 토대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대종교를 훼손하거나 한배검께 불경하는 자가 있으면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로 인해 희생을 당한 자가 있으면 그 뜻을 높이 받들고 처자식을 돌보라고 덧붙였다. 한편 나철은 순교를 통해 도를 수호하고자 했고 애(愛)를 실천하고자 했으며, 궁극적으로 수(修)를 완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나철의 독립운동방략은 크게 중도주의, 호생주의, 수행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3.2.1. 중도주의


나철의 중도주의는 도(道)를 중시하는 사상으로서, 정신문화에 대한 복원을 의미한다. 그는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고 민족의 생일로 자리잡게 하고자 했으며, 민간 유속 속에 남아있던 신교문화의 재건을 촉진해 민족적 자긍심을 이끌고 이를 토대로 대일항쟁의 요소로 삼고자 했다. 또한 중도주의는 한글 정착과 민족 문학 개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글의 명칭을 처음으로 명명한 주시경은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후 단군 정신을 토대로 한글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예수교인으로 있었던 것 부터가 이미 서구의 정신적 침략을 받았던 것이라며, 우리 민족이 과거에 사대사상에 매몰되었던 것은 종교 침략의 결과였으니 종래의 국교인 대종교로 개종한다고 천명했다.
지석영 또한 대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나철의 순교 당시 수행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두봉은 조선어학회 설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침으로서 대종교 정신을 통한 한글 연구와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이극로 또한 윤세복이 주도하던 대종교시교당에 기거하면서 주시경의 제자이자 대종교의 중심인물인 김영숙을 만나 그로부터 한글 연구와 관련된 여러 참고서를 전달받고 한글을 연구하게 되었다. 또한 이극로는 윤세복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8.15 해방 이후에도 대종교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최현배 역시 중도주의를 토대로 한글연구를 개척했다. 그는 한민족의 이상을 단군신화에서 찾았고, 인류 구제의 대이상을 품고 이 세상에 내려온 민족은 배달겨례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종교야말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적 신앙으로 갱생한 하느님을 신앙하는 종교라고 극찬했고 한글 완성은 한민족의 하느님이 부여한 신명이라고 여겼다.
중도주의는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문학사>를 편찬해 한국 국문학의 통사체계를 처음으로 수립한 안자산(安自山)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을 적극 주장했지만, 서구문명 우월주의를 거부하고 한민족의 역량에 의한 개화와 선진문명 성취를 제시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한민족의 고유 사상의 핵심은 단군의 '삼신의 도'로 규정하고, 그것을 종(倧)으로 구체화시켰다. 또한 한국 현대시조문학을 연구한 이병기도 대종교의 중도주의를 수용했다. 그는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흘러온 국교의 가치로 이해하고 대종교의 믿음을 통해 문명국으로 우뚝 서기를 소망했다.
중도주의는 한국사학사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는 대종교를 경험하기 전에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대종교를 경험한 후에는 한민족 고유의 선교(仙敎)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바꾸고 선교의 실체를 연구했다. 그는 1910년 이후 한민족 고유의 선교를 연구하는 데 몰입했다. 국혼(國魂)을 중심으로 정신사관을 펼친 박은식도 대종교를 경험하기 전에는 유교의 혁신을 통한 사회변화를 모색하면서도 그것의 대명제로 '공부자(孔夫子)의 도'를 내세웠다. 하지만 1910년 대종교를 경험한 후에는 나철의 중도주의를 추종하고 대종교를 국교로 인식했다. 그는 국혼이 과거에 자신이 숭봉하던 '공부자의 도'에 의해 핍박받고 멸시되던 가치였다고 인식하고 유교적 가치에 대한 환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몰민족적 가치로 규정했다.

3.2.2. 호생주의


나철이 주창한 호생주의는 천덕(天德)과 인애(人愛)가 어울어진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로, 천리와 인애를 위배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도덕적인 투쟁이라고 간주한다. 호생주의적 투쟁은 이데올로기나 소아적 집단 대립에서 드러나는 물리적 갈등구도가 아니라 선과 악이 대립하는 도덕적 갈등구도로 형태가 짜여진다. 또한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권선징악을 통해 반망즉진(返妄卽眞: 인간사회의 모든 거짓을 돌이켜 참에 이른다)을 이룸으로써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철은 <단군교포명서>에서 대종교를 숭봉하여 선을 따르고 악을 피함으로서 영원한 복리가 모두에게 퍼지기를 소망했다. 또한 그는 대종교 전래의 종교가인 '얼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이 노래가 고구려의 당시 군가라고 주장했다. 이 노래의 내용은 한배검에 대한 근본을 잊지 말자는 맹세로 시작해서 선을 숭봉하고 악을 구축해야 하며, 선행이야말로 배달민족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결을 택했을 당시 일본총리에게 보낸 유서에서 증오와 원한을 담을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대신 대종교의 내력과 교리를 소개하면서 종교적인 감화를 유도했다. 그는 일본 신토의 원류가 한국의 신교에 있음을 밝히며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냈고, 대종교와 당시 시국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나섬으로써 일제 관료들이 이걸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길 유도했다. 이렇듯 나철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천리를 바탕한 사랑이라는 것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는 한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자신의 '순교'가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나철의 호생주의는 여러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서일은 나철의 유해를 봉장할 때 스승을 기리는 제문을 올렸다. 이 글에서는 스승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일제를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내용은 추호도 없고, 스승의 음덕을 통해 식민지의 굴레를 벗고 도덕적 삶의 세계를 맞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또한 신규식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망국의 원인은 선조들의 교화(敎化)와 종법(宗法)을 망각함에 있다고 봤으며, 대종교의 흥망이 곧 민족의 흥망으로서 한민족이 부흥하려면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또한 나철이 죽은 지 이듬해인 1917년 3월 15일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제사 사원들과 대종교 교도들, 그리고 유학생들과 함께 추도식을 거행할 때 나철의 순교를 애통해하면서도 그의 순교가 해방을 이끌어낼 것임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추도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3.2.3. 수행주의


나철은 평생 동안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수행이 홍익인간을 구현하기 위한 종교인으로서의 의무라고 여겼다. 사실 그는 대종교를 창시하기 전부터 수행을 통해 속세와의 단절을 모색했고, 대종교의 오대 종지를 정함에 있어서도 수행을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웠다. 특히 한일병합 소식을 들은 뒤에는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고 말하며 죽은 나라를 위해 죽을 떄까지 흰 옷으로 복을 입고 살겠노라 다짐하며 그것을 실천했다. 그리고 망국의 죄인으로 좋은 음식을 가까이 할 수 없음을 밝히며 죽을 때까지 조촐한 음식으로 연명했다.
이러한 나철의 수행주의적 가치는 김교헌, 서일, 윤세복 등의 삶에도 그대로 영향을 줬다. 그들은 나철을 본받아 수행과 포교,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그들은 수행은 개인의 의지를 굳히고 안목을 열어주는 요체로서 배달 민족 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배달국이라는 이상향을 이룬다는 대의명분을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여겼다. 특히 서일은 자결하기 직전에 나철의 유서 내용 중 일부 구절을 읊조리며 자신은 나철이 선택한 순교라는 극단적인 수행을 본받을 것임을 드러냈다고 한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이범석은 훗날 당시 만주 교포의 대다수가 대종교도였고 대종교의 확장은 독립운동의 호가장이었으므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독립군 병사들이 대부분 대종교 신앙에 뭉쳐서 파벌이나 사리잡념이 없었고 광명정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병사들이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돼지나 소를 잡아 제천보본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철의 수행주의가 독립군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4. 기타


  • 나철은 호남에서 7대조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인물들의 자금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종교가 교단을 확장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 장남 나정련, 차남 나정문도 대종교 포교 활동에 적극 가담했고, 독립운동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두 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영화 사바하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방교 교주 풍사 김제석의 신문 사진에 나철 영정을 무단 도용해 논란을 일으켰다.[4] 제작사 측은 곧바로 명백한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5] 이정재가 사이비 종교를 취재하면서 "교리 쪽은 좀 어때? 동학 쪽이야? 단군?"이라며 묻는 대사가 나오고, 대종교 경전 중 하나인 <<천부경>>의 81수에 맞춰 암호를 푸는 장면 등을 볼 때 단순 실수로 보기에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나철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보성군 측에서도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고[6], 4월 4일 홍암나철기념사업회 회장과 회원 30여 명이 영화사에 항의 방문하였다. 제작사 측에서 잘못된 사진 교체를 완료하고서[7] 4월 9일 보성 홍암나철기념관 사당에 참배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8]
나철은 1916년 일제에 항거하여 순교를 결심하고 황해도 구월산 행을 하였는데, 해당 사진은 1916년 음력 8월 5일 황해도 사리원 역 앞 대기사진관에서 촬영해 전해지는 2장 중 하나다. 동정 달린 흰색 도포는 백두산과 한민족을 상징하고, 왼손의 단주(檀珠, 박달나무 염주)는 신단수와 민족경전을, 오른손의 단장(檀杖)은 대종교 지도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사진에는 주시경의 제자이자 나철의 수제자인 김두봉 외 엄주천(본명 엄주동,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등 나철을 뒤따라 간 6명의 시봉자가 함께 촬영했다.
  • 나철에 관한 특집은 여수MBC, 「잊혀진 민족의 지도자 홍암 나철」 (2000.4.7),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4회 특집)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2004.2.29), 광주MBC, 「(창사 52주년 특집) 홍암 나철, 백년의 유산」 (2016.10.27) 총 3회 방영되었다.
[1] 흑룡회의 창설자이자 쑨원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우치다 료헤이, 현양사를 창설한 일본 우익의 거두 토야마 미츠루 등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적들이었기 때문에 나철은 이이제이를 시도한걸로 보인다.[2] 대종교에서 도가 높은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3] 스스로 숨을 참다 기절하면 자동으로 호흡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4]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328_0000602995[5]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328/94791391/1[6] https://www.yna.co.kr/view/AKR20190402102900054?section=search[7]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405/94912734/2[8]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