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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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서재운(徐在云)의 아들로 태어났다. 채씨 부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고 어렸을 때 함경도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노규(金魯奎)[1] 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주역을 전공한 후 1902년 함경북도 경성군의 유지의숙(有志義塾)을 졸업했다. 이후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0년 동안 아동을 교육했다.
1910년 일제가 한일병합을 강행하자 서일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함과 동시에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31살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되었지만 중광단 창립 초기에는 항일 무장 투쟁 준비보다는 주로 독립 정신과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정신 교육에 매진했다. 당시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은 대부분 대종교도들로서 서일을 비롯한 백순, 현천묵, 박찬익, 계화, 김병덕, 채오 등 중광단 지도층은 대종교의 중심 인물들이었다. 사실 '중광단'이라는 명칭 자체가 단군 신앙의 부활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에서 따온 것이었고 중광단이 조직된 지역은 대종교의 주요 거점인 왕청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일은 1912년 왕청현 덕원리에 명동 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에 매진했다. 명동 학교 초기에는 왕청, 류수하, 대감자, 서위자, 대흥구 일대에서 35명의 학생들이 수학했고 점차 동만주 각지와 함경북도 일대의 학생들도 다녔다. 1912년 8월 연길현 삼도구 청파호에서 동원당(東圓黨)이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논의했다.
서일은 1912년 10월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그가 대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나철을 만나 그로부터 대종교의 교리를 전해 듣고 설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나철을 언제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철이 화룡현 청파호에 도착한 1911년 7월 21일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일은 대종교 포교 활동에 매진하여 대종교에 입교한지 3년만에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했다. 1913년 10월 참교(參敎)로 피선되었고 1914년 대종교 동도본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1916년 4월 상교(尙敎)로 승진했다. 서일은 대종교 총본사 조직 편제의 중책을 맡는 등 대종교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떠올랐는데 대종교총본사가 편찬한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 따르면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은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했지만 서일은 항일 무장 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유보하기로 했다고 한다.
서일은 나철의 저서인 <삼일신고>와 <신리대전>에 지극한 존경의 예를 표했고 <회삼경>, <구변도설>, <진리도설>, <삼일문답>, <오대종지강연> 등을 저술해 <삼일신고>와 <신리대전>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서일은 <삼일신고>야말로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고 인간의 성품을 트이게 하는 등 이치의 뿌리로서 높이 떠받들었다. 그는 대종교를 신봉한 후 짧은 기간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었고 그 결과 대종교에 입교한지 5년도 안되어 대종교의 최고 교직인 사교(司敎)로 초승(超昇)[2] 되었다.
서일은 대종교 교리, 교사 정리와 보급에도 매진했다. 그는 대종교 동도본사를 이끌던 1918년 1월 대종교 교리, 교사의 핵심이 되는 <신사기>, <신리대전>과 자신의 저술인 <회삼경>, <도해삼일신고강의> 등을 하나로 역은 <사책합부(四冊合附)>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의 출간에는 당시 대종교 동도본사의 주요 인물이자 북로군정서의 핵심 인물인 계화, 정삼, 고평 등이 참여했다.
서일은 1919년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을 조직해 단원 1만 5천 명을 확보했다. 한편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동명 학교를 직접 설립했으며 중광단을 통해 동일 학교, 청일 학교, 학성 학교, 선구 학교 등 10여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39명이 대한독립의군부를 명의로 삼고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을 때 서일은 직접 서명하지 않았지만 배후에서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들과 연합해 대한정의단을 조직하고 조직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곧 양측의 이념 대립이 발생했는데 공교도들은 보황주의[3] 를 내세웠고 대종교인들은 대종교의 교의인 홍익인간 속에 배태되어 있는 인본주의적 가치와 가까운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결별했고 중광단은 순수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해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했는데 이때 서일은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했다. 대한정의단에서 제정한 4대 강령, 7대 규약, 3대 부신(符信)은 다음과 같다.
4대강령
1. 정대한 의리의 찬양
2. 정당한 의무의 이행
3. 정직한 의무의 장려
4. 정순한 의리의 찬동
7대 규약
1. 서약을 반드시 실천함
2. 명령을 반드시 집행함
3. 양민을 침범하지 말 것
4. 다른 단을 간섭 말 것
5. 규율을 반드시 준수할 것
6. 역무를 반드시 부담할 것
7. 망언을 하지 말 것
대한정의단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했으며 산하 단체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7월 서일은 계화, 김붕, 김일봉, 정신, 김암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3대 부신
1. 단장의 인증 또는 증권의 호수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복종하지 않을 것.
2. 단장의 수집명령에 의하여 굴기 집합할 것.
3. 서약서와 동호의 증권이 있지 않으면 단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 단 증권을 분실했을 때는 보증연서로서 청원함, 또한 본 증권의 호수를 비밀로 할 것.
서신 내용을 요약하자면 세계 열강들은 대개가 백인들로서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하고 지배하여 왔는데 아시아에서는 현재 일본이 그들과 같이 침략 행위를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한국을 합병한 일이 일본에게 불리하다며 근거로 7가지를 들었다. 한국과는 오랜 관계를 지속해왔던 나라에 행할 행위가 아니므로 일본은 침략 행위를 중단하고 세계 평화에 힘써달라는 내용이다.기미 칠월 모일 조선인사 서일, 계화, 김붕, 김일봉, 정신, 김암 등은 일본 내각총리대신 원경(原敬) 각하에게 삼가 글을 보냅니다. 무릇 때는 다시 오지 않고 세(勢)는 양립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무(時務)를 아는 자는 세에 연유하기를 귀히 여기고 세위(勢位)를 잡는 자는 때 타기를 귀히 여기니, 이것이 소위 시무와 세위가 아니면 영웅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일 일본은 과연 동아 선진국이니 저희들은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일본이 또다시 세계 부강국가 되니 저희들은 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사자(執事者)는 조선인으로써 조선을 위해 듣기를 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양의 다행스러움이 심합니다. 시험삼하 보건대 서세(西勢)가 동점(東漸)하는 것이 날로 심한데 하루라도 오히려 동양인의 위세가 멀리 서양 땅에 한 치라도 보탰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릇 오족(五族) 중에 세력의 우승(優勝) 경계를 점한 자는 오로지 백인(白人)이며, 육대주(六大洲) 중에서 크게 시국의 경쟁 마당이 된 것은 오로지 동아(東亞)입니다. 영국이 인도에게, 프랑스가 안남에게, 독일이 소아세아에게, 아프리카가 서백리아에게 있는 것이 모두 그러한데, 오로지 일본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원동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 유신 50년에 울연히 동아의 강자가 되었으니, 일전하여 청조에서 대만을 나누어 가지고 두번 싸워 아령에서 여순을 빼앗고, 세번 싸워 덕조에서 청도를 점거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의 세력이 해가 중천에 뜬 것 같아서 백인의 원동의 책략이 드디어 크게 꺾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다만 땅을넓힐 계획에만 힘쓴다면 이미 심근고체하여 황족(黃族) 사이에서 우이(牛耳)를 잡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장차 백인의 뜻을 능가함이 있다면 일본이 지금 동아시아에 베풀고 있는 책략 또한 이미 늦었을 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19세기 이래로 서인 침략주의의 자취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20세기가 갈수록 새로워지는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성효는 항상 착착 서인의 뒤에 서있게 되니 어찌하겠습니까?
다행인 것은 하늘은 가득 찬 것을 누르고, 크게 강한 것은 반드시 꺾이므로 구주의 전쟁이 생각 밖에서 일어나면 백인이 우세하고 강한 자가 저절로 서로 죽이는 까닭으로 황족의 화가 그 때문에 조금 늦어질 뿐입니다. 만약 수년 전에 백인국으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합하여 오로지 원동의 계책에 뜻을 두었다면 하나의 일본으로는 능히 그 칼끝을 묶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가 진실로 추나라로 초나라 대적하기를 면하지 못하고 황족의 살이 백인의 강식이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지금인 즉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세력이 한 번 죽고 한 번 다치는데 만약 가운데 서서 그 변하는 것을 보는 자가 있어서 다치는 것을 따라서 찌른다면 저 백인이 어찌 저자거리의 새끼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황족이 떨치지 못하는 것은 그 또한 백인의 다행일 뿐입니다. 개전 이래 구주와 백인의 나라가 상처를 입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백 년 동안 도모하던 원동의 책략이 일거에 땅을 휩쓸자 이에 서서 도모하는 자는 그 배꼽을 씹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자는 그 발을 그려서 때를 구하고 세를 당길 책략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회의가 겨우 끝나자 연맹의 논의가 또 거론되니, 이 두 가지가 백인을 위한 계책이라 한다면 가하나 진실로 황족의 이로움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수년 동안의 전쟁에서 백인의 성년 중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수년을 이어간다면 백족은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회의가 부득불 속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난을 겪은 여러 국가로 하여금 백성과 더불을 휴식함으로써 삶을 도모하고 교훈의 계책으로 삼지 않는다면 백족에 강일이 없으니, 이것이 연맹회가 부득불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백인은 어찌 능히 동아의 여러 나라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나의 일본이 있어서이니 백인이 베개조차 감히 높이 베지 못하고 황하의 설(황화론)이 따라서 일어나면 밖으로는 평화의 주장을 펼쳐 동서 소약 제족들이 합치기를 유혹하지만, 안으로는 실로 황족의 강자를 견제하는 것입니다. 호주는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하지 않는 나라인데 이것이 아니면 어찌하겠습니까? 미국은 배일운동을 때만 있으면 격렬하게 일으키는 자인데 또 이것이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아프고 두 번 눈물 흘리는 때인데. 방관자는 이것을 황족의 위기라 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당국자는 오로지 스스로 편안히 여기는 계책으로 삼는 즉 어찌 ㅅ그스로 원교근공의 계책에 빠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진취주의를 견지하는 자는 걸핏하면 섬나라는 답답해서 살수가 없을 뿐이니 반드시 한반도를 병탄해서 대륙으로 나아가는 거점으로 한 연후에야 동양의 패권을 잡을 수 있고, 서양인이 세상에 횡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호라. 이는 바로 때를 지나치고 세를 거스르는 주장입니다.
대저 때와 세라는 것은 상(常)을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전제국가인 노서아가 변하여 공화정이 되니 때에는 항상 윗계급에 있을 수 없으며, 세계최대 강국인 보로사(프로이센)가 한 번 패하여 포로, 죄수가 되니 세에는 항상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민족 평등의 시대이며, 특별히 지난날 한 사람이 횡행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한 소위 침략주의자는 이미 호로가 되었을 뿐입니다. 다만 조선 한 가지 일로 논한다면 합병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것이 불리를 야기하는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조선은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 역사가 독립되었고 그 종교가 독립되었으며, 언어, 문자, 윤리 습속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라도 독립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대만이나 유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그 백성의 지혜가 조금이라도 열리고 인심이 자결(自決)한다면 십수 년 내에 정부가 동화를 고심한 것이 헛된 일로 돌아갈 뿐이니 그것이 첫번째 불리함입니다. 합병한 이래 한국에게 베푼 시책이 성수불루(盛水不漏)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생각이 압죽사순 달퇴암수인 까닭에 관리에 있는 자 감히 대도시 가운데를 혼자 걸을 수 없어서 항상 경찰의 역할에 급급해야 하며, 마음을 쓰고 재물을 쓰는 것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이 두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온 나라의 재물을 통틀어도 경상의 용도에 제공할 수 없어 모국의 재물을 쏟아 보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세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강한 민족입니다. 임전무퇴, 배물견적의 유훈과 여습이 오래도록 사람 마음속에 젖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최근 봄에 독립을 선언한 이래로 적수단심 갑부을기로 사상과 형옥의 참상을 당하였으나 분발하여 스스로를 돌보지 아니하고 광복한 후에야 그만두기를 기약하니 까마귀도 궁하면 오히려 쪼는데 하물며 온 나라 사람이 일심 동성함이겠습니까? 만약 일본으로 하여금 대규모로 진압 정책을 시행하고 수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억의 재물을 쓴다면 다행히 전승하는 공은 있겠으나, 진실로 그 마음을 열복시키기에는 어려우니, 그것이 네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황족의 다툼은 백인의 이득이니 조개가 도요새를 물면 반드시 어부의 독수가 있을 것이며, 참새가 사마귀를 잡으면 우인(虞人)의 비탄이 없을 수 없으니, 그것이 다섯번째 불리함입니다. 일한(日韓)의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중화의 반대당과 아국의 과격파 또한 장차 기회를 타서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대책이 장차 무너질 것이니, 그것이 여섯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일본의 강함은 구미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것이 조선 독립을 도와 독립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자가 어찌 우리 한국을 진실로 애련(愛憐)해서이겠습니까? 그 방도가 진실로 일찍이 일본의 세력을 점점 깎으려는 것이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재물을 써서 없애는 것이 조금도 아까움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로써 팔을 굴복하려고 하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곘습니까? 그것이 일곱번쨰 불리함입니다.
이렇듯 큰 불리가 있는데도 일본이 오로지 유리하다고 한다면 저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동아를 위한 계책으로는 두 가지 이익에 만전을 기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조선을 분립함으로써 지난날 우방이 부식한 맹약을 실천하고, 중화와 친선함으로써 동양평화 유지 정책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정치(鼎峙)하여 서고, 순치(脣齒)로 의지하며 그 주권을 굳건히 하고, 그 실력을 배양하여 구미 사대 강국과 능히 싸울 수 있은 다음에 나아가 안남, 인도 등 백인에게 속박 아래에 있는 동아 제족들을 구한다면, 서인들이 감히 고기를 묶듯이 할 수 없으며, 동양인들은 일본에 덕을 돌리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를 대적하는데 장차 무엇이 거리껴서 하지 못하겠습니까?
백인이 일패도지하고 일본이 홀로 동아의 영웅이 되는 것 또한 시세의 조화가 아님이 없으며 실로 천년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때가 이르렀는데 행하지 않으면 지자(知者)가 경계할 바이며, 그 허물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어찌 당국 집사가 심모원려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일찍이 오늘날의 병렬하여 오강을 논하자면 일본이 자부심으로 기뻐하기에는 부족하며, 인종차별은 바로 일본의 막대한 치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계책을 계획한 것은 진실로 선제후진(先薺後秦)이 아니며, 일본이 이 계책을 쓰는 것 또한 위초비조(爲楚非趙)가 아닙니다.
원컨대 광부(狂夫)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또한 사사로이 도모한 것이라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우리 동양의 다행이요 황족의 복입니다. 각하의 판단을 공경하며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서일은 <일민보>와 <신국보>라는 한글 신문을 발행하여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는 각지에서 결사대원 또는 단지 결사대원을 모집해 결사대원 총 1037명을 확보했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군사 부문에 대해 전문적이지 못해 항일 무장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좌진, 조성환 등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전문가들이 많은 길림군정서와 연합해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하고 명칭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변경해 본격적인 항일 무쟁 투쟁 기지를 구축했다.
북로군정서 총재로 부임한 서일은 서간도에서 결성된 서로군정서 대표 이상룡과 서신 및 대표 파견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군사 작전 협조를 도모했으며 중앙 조직을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고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 업무와 행정 업무를 담당했고 사령부는 군사 부문을 담당했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서일은 총재부를 담당해 북로군정서를 지원했으며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여 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했다."라고 보고했는데 실제 수치에 비하면 과장된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독립 운동 세력의 사기가 고양된 것은 분명했다.
일제가 청산리 전투 패배를 보복하고자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소련과 만주 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킨 뒤 다시 연해주로 이동해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항일 무장 투쟁 방략을 모색하고자 했다. 연해주는 1910년대부터 항일 운동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약 20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대규모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어 지원을 받기 용이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정부가 피압박 약소 민족 해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해주는 독립군에게 있어 새로운 희망으로 인식되었다.
서일을 비롯한 독립군 단체 지도자들은 연해주로 이동한 후 하나로 통일된 독립 군단을 결성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했다. 대한독립군단 조직은 3개 대대로 조직된 1개 여단을 두었으며,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각 소대의 인원은 27명이었으며 총 병력은 3500명에 달했다. 서일은 대한독립군단 총재로 추대되어 이들을 통솔했으며 부총재는 홍범도, 고문에는 백순과 김호익, 외교부장에 최진동, 참모부장에 김좌진, 참모에 이장녕과 나중소, 군사 고문에 지청천, 제1여단장에 김규식, 제1여단 참모에 박영희, 제2여단장에 안무, 제2여단 참모에 이단승, 제2여단 기병대장에 강필립, 중대장에 김창환과 오광선과 조동식을 선임했다.[4]
1921년 3월 14일 노령 소추풍령에 집결한 독립군 1천여 명이 하나로 뭉쳐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했다. 이들은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과격파와 연맹하고 인쇄기 2대를 구입해 문서를 인쇄하여 선전했다. 1921년 4월 12일 이만에 모인 독립군 단체 수뇌들은 다시 독립군 대회를 열어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원동 정부의 공동 항일 투쟁 제안에 반대하여 서일,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계열의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함으로서 해체되었다. 이후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다른 독립군들이 자유시로 갈 때 따라가지 않고 밀산으로 되돌아왔다. 그 덕분에 서일은 자유시 참변의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21년 6월 27일 벌어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한 서일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노령 국경 부근인 밀산에서 재기를 위해 군사 훈련을 수행했지만 1921년 8월 26일 당벽진에서 수백 명의 토비들에게 습격을 받아 진중이 초토화되고 많은 청년 병사들이 주살당하는 참극을 겪고 말았다. 이에 서일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살설과 피살설이 제기되는데 역사학계는 부친 서재운(徐在云)의 통신을 감청한 일제 정보부의 기밀 보고서 <원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의 사망에 관한 건>을 근거로 자살설에 무게를 싣고 있다. 1921년 11월 27일 외무대신 우치다에게 전달된 이 보고서에는 서일의 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대종교 총본사가 집필한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 따르면 서일은 목숨을 끊을 때 다음 구절을 읊조렸다고 한다.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은 마적의 유탄을 맞고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그런 사실이 없고 현재 생존해 있다고 전하는 정보 등 구구하다. 그런데 11월 13일 밀산현에서 재 왕청현 대왕청 유수하 친부가 서일이 자살했다는 통신이 있었다. 자살이라는 것은 서일의 죽음을 장식할 한 수단이 아닌가 생각되나 작년 9월 이래 그 행동에 관한 소식이 두절된 등 오늘날까지 경과에 비추어보면 사망설은 사실인 것 같다. 전 군정서 총재 서일은 음력 8월 27일 밀산현 쾌상봉 벽리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이 11월 13일, 14일경 재왕청 현 대왕청 유수하 친부 서재운에게 통신이 있었다.
이 통신에 서일이 자살 사망에 이른 사정에 관해서 말하는 것에 의하면, 서일은 음 8월 27일 동지 10여 명과 만나 독립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지만 금후의 행동에 관해 아무런 기대할 만한 방침 등이 없고 또한 유일하게 의지한 태평양회의는 형세 전도가 낙관할 만하지 못하다는 일반의 관측이 있어서 서일은 이를 매우 비관하여 나철의 유서를 품에서 꺼내어 재삼 암송하고 나서 자리를 바꿔 모인 동지들에게 말했다.
"지금 나 선생의 유서를 보니 나의 희망한 조국독립의 전후관계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본서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급히 토의할 필요도 없다."
이후 산회하였는데, 동일 저녁 때에 이르러 서일이 외출한 채로 돌아오지 않은 결과 음력 9월 9일에 쾌상봉 벽리라고 하는 산곡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사체를 살펴보니 전신에 한 점의 상처도 없었다. 생각건대 독약자살을 기도한 것 같다.
또한 서일의 자살의 원인에 관해 다음의 일설이 있다. 러시아 과격파의 지원을 받는 최명록(최진동) 일파와 서일 일파와는 항상 서로 반목한 상태에 있었다. 최근 최명록의 세력이 커지는데 반해 서일 측은 고립되고 세력을 잃는 모습을 보이는 데다가 최명록은 위압적으로 그 손을 서일 일파에게 뻗쳐 서일의 부하를 자신의 세력 안에 흡수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사실에 관해 서일이 분개하였고, 또한 유일한 희망을 건 태평양회의에서 조선 독립문제를 의논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오히려 죽어서 명예를 후세에 남기려한 점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자살한 것이라는 별보가 있었다.
서일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고 1924년 3월 16일 대종교 제3대 교주 윤세복은 서일에게 종사의 교질을 추증했으며 1927년 봄 서일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고 화룡현 청호로 이장했다.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 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 겨례의 피, 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3. 대중매체에서
1982년작 KBS1 기록드라마 <우둥불>에선 배우 이동주가 연기했다.
4. 여담
독립기념관 내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는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