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

 


1. 개요
2. 탄생
3. 역사
3.1. 제1차 인터내셔널(1864-1876)
3.2. 제2차 인터내셔널(1889-1916)
3.3. 제3차 인터내셔널(1919-1943)
3.4. 제4차 인터내셔널(1938-1963)
4. 같이 보기
5. 영화


1. 개요


사회주의 단체의 국제적 조직. 공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이지만, 일반적으로 첫 단어만 빌려와서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2. 탄생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는 산업혁명의 물결이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이념 역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의 성장은 여전히 미약한 상황이어서 기껏해야 같은 직종에 국한되고 있는 판국이었다.[1] 또한 어렵사리 파업과 같은 계급 투쟁 운동이 성사된 경우에도, 자본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쉽사리 어려움을 극복하곤 하였다.[2] 이에 따라 보다 효율적인 계급투쟁을 위하여 국제적인 단위의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1863년 1월 발생한 폴란드의 독립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명분으로 같은 해 7월 영국 런던에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회합을 갖는다. 칼 마르크스에서 부터 오언주의자, 푸르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파의 좌파 세력[3]이 모인 이 회합을 통하여 마침내 국제노동자협회가 탄생하게 된다.

3. 역사



3.1. 제1차 인터내셔널(1864-1876)


1차 인터내셔널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창립선언을 비롯한 주요 문서를 작성했다. 1차 인터내셔널은 1872년까지 6차례 대회를 열었으며, 이를 통해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하여 지금까지도 실행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기본적인 운영 방안이 정립됐다. 또한 1일 8시간 노동,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 민족 자결주의 지지 등의 활동도 병행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무정부주의, 오언주의, 푸르동주의 등 온갖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했던만큼 1차 인터내셔널은 1864년에서부터 1876년에 이르는 12년의 존속 기간 내내 다양한 분파들간의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겪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던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와 미하일 바쿠닌이 이끄는 무정부주의 세력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즉각적인 혁명을 통한 체제 전복을 주장하였던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적 발전단계에 입각한 점진적인 체제 개혁을 주장하였고,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바쿠닌을 비롯한 무정부주의 세력은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되어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한다.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을 장악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등장을 목도한 유럽의 각국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등장에 대해 진지하게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탄압을 실시한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기로 예정됐던 7차 인터내셔널 대회가 미국 당국의 탄압으로 무산된 것이 가장 단적인 예. 또한 마르크스 본인 역시 다른 좌파 세력들과의 오랜 키보드 배틀에 지쳐 인터내셔널 초창기만큼의 열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1876년 1차 인터내셔널은 해체된다.

3.2. 제2차 인터내셔널(1889-1916)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창설되었다. 1차 인터내셔널을 이끈 칼 마르크스는 이미 6년전이었던 1883년에 사망했고, 이에 따라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2차 인터내셔널의 이념적인 기반을 뒷받침해주었다. 총평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가졌던 1차 인터내셔널과 달리, 2차 인터내셔널은 각국의 노조 및 사회주의 정당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산업화가 서서히 마무리되어가던 당대 유럽의 사회적 배경과 결부되어 2차 인터내셔널은 세계 곳곳에 사회주의 운동을 성장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차 인터내셔널만큼은 아니었지만 2차 인터내셔널 역시 정치적 노선을 둘러싸고 상당한 내홍을 겪는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제국주의 및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고,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하여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기 때문.[4][5] 그리고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이 2차 인터내셔널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민족계급의 선택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이끌던 쌍두마차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나란히 민족을 선택했고[6], 1차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제2인터내셔널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가 1916년 결국 해체된다.
다만 '선거등의 합법적 수단을 중심으로 한 점진주의적,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노선'(흔히 말하는 사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노선)이라는 정치적 정체성과 각국의 노조 및 사회주의 정당들의 느슨한 연합체라는 조직 구성상의 특성을 가진 국제조직의 명맥 자체가 1916년에 단절된 것은 아니다. 1916년 해체되었던 제 2 인터내셔널의 경우 제 3 인터네셔널(코민테른)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1920년 재결성되었고, 이후 1921년 제 2 인터내셔널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제 3 인터네셔널에도 반대하여 통칭 2.5 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린 사회당 국제노동연맹(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이 결성되었다가 1923년 제 2 인터내셔널과 합병되는 등, 제 2 인터네셔널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 자체는 2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그러나 20년대의 제 2 인터내셔널 재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약 20년간 합법적 개혁주의 노선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활동은 중단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47년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위원회(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의 결성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재건 시도가 다시 시작되고 결국 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재건에 이르게 되는 것. 물론 51년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1889년의 제 2 인터내셔널을 같은 조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자신이 제 2 인터내셔널의 후계조직임을 자처하고 있고 성향 및 노선의 공통점을 생각한다면 계승자 정도로는 인정해 줄 만 하다. 이 계승성을 인정할 경우, 60년대 후반의 전성기에는 서유럽의 부유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20개에 육박하는 국가에서 가맹 정당이 정권을 차지했고, 21세기 이후에도 나름 강력한 조직으로 남아있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통해 그나마 역사적 전통과 흔적이 잘 보존된 사례로 볼 수도 있는 것. 자세한 내용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참고.

3.3. 제3차 인터내셔널(1919-1943)



3.4. 제4차 인터내셔널(1938-1963)


4차 인터내셔널은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이 1938년에 만든 인터내셔널이다. 4차 인터내셔널의 상징인 좌우가 상반된 낫과 망치덕에 숫자 4를 연상시키어 4와 낫과 망치가 겹쳐진것이 로고이다.

4. 같이 보기



5. 영화




[1] 예를 들면 같은 프랑스 안에서조차 광부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같은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같은 광부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서로 편가르기가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 가령 독일 지역의 경우에는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을 주로 고용했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언어가 똑같은 벨기에 출신 노동자들을 애용했다.[3]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상적 사회주의.[4] '무리하게 유혈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사회 실현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어차피 산업화가 진행중인만큼 노동자가 전체 사회의 51%가 되어 과반을 차지하게 되면 그 때 우리가 정권을 자연스레 잡고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어도 늦지 않다.'라는 온건 수정주의가 2차 인터내셔널 안에서 대세를 차지했다. 참고로 이러한 수정주의에 대하여 독일 사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카를 카우츠키는 '''"우리 당은 (이념적으로는) 혁명적이지만, (실제행동은) 혁명적이지 않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5] 현실 사례를 보자면 핀란드에서 유일하게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선거로 200석 중 103석 51%를 달성했지만 우익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핀란드 내전이 터졌다.[6] 특히 독일 사민당(SPD)의 경우 전쟁 발발 직전에 전비 조달을 위한 국채 발행 안건에 대해 찬성을 당론으로 정했다가 2차 인터내셔널 회의장에서 푸짐하게 욕을 얻어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