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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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uguste Blanqui
1805.02.08 ~ 1881.01.01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혁명가, 사상가. 적극적인 반체제 운동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 운동에 평생을 보냈다.
블랑키는 1805년 프랑스 퓌지에테니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1818년 파리에 가서 6년 동안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22살이 되던 1827년부터 샤를 10세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운동에 발을 들였다. 그는 부르봉 왕조를 쓰러뜨린 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하여 그 성과에 열광했으나, 공화주의가 아닌 7월 왕정의 성립에 실망한다. 블랑키는 이 때부터 정치에 참여하여 '인민의 친구회(Societe des Amis du Peuple)'라는 공화주의 단체에 가입한다. 이 일로 그는 1831년과 1836년에 각각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정부 활동을 하면서 그는 필리포 부오나로티의 사상을 배우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등에 관심을 둔다. 블랑키는 폭력혁명을 통한 구체제 전복과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꿈꿨고, 이는 비밀결사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는 '가족회(Societe des Familesl)'와 '계절회(Societe des Saisons)'를 몰래 조직하여 혁명 운동을 펼쳤다. 1839년 5월 12일에는 계절회 회원 500여 명과 함께 파리 시청을 점거하는 봉기를 시행하여 이틀 동안 저항했으나 진압당했다. 이 일로 블랑키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유배를 당했다. 1848년에 풀려난 그는 2월 혁명에 고무되어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체포되어 봉기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1848년부터 1859년까지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블랑키는 석방 직후에도 다시 비밀결사 조직에 나서다 또 감옥에 갇혔고 마침내 1865년 벨기에로 망명했다. 한편 이러한 투옥과 석방의 반복 속에서 그는 <사회비판(Critique Social)>이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2]
이후 보불전쟁이 터지자 블랑키는 혁명은 물론이고 애국도 강조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군대에 저항하여 프랑스를 지킬 것을 주장했다. 헌데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한 후 수립된 제3공화국은 전쟁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블랑키는 이에 저항하다 1871년 3월 17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가 체포된 바로 다음 날 파리 시민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서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 블랑키는 체포된 신분이었으나 파리 코뮌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하였고, 파리코뮌이 진압된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파리코뮌 이후 블랑키는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고[3] ,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벌이다가 1881년 1월 1일 사망했다.
블랑키의 사상은 블랑키주의(Blanquism)이라고 불리는데, 그 골자는 ''''비밀결사를 통한 소수 정예분자들에 의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Louis Auguste Blanqui
1805.02.08 ~ 1881.01.01
'''"신도 없고, 주인도 없다(Ni dieu ni maître)."'''[1]
"총알은 총구를 떠났고 그 총알은 현재도 끊임없이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있으며, 민주의 자유와 행복의 적이 단 한 놈도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날아가 꽂힐 것입니다." #
1. 개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혁명가, 사상가. 적극적인 반체제 운동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 운동에 평생을 보냈다.
2. 생애
블랑키는 1805년 프랑스 퓌지에테니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1818년 파리에 가서 6년 동안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22살이 되던 1827년부터 샤를 10세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운동에 발을 들였다. 그는 부르봉 왕조를 쓰러뜨린 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하여 그 성과에 열광했으나, 공화주의가 아닌 7월 왕정의 성립에 실망한다. 블랑키는 이 때부터 정치에 참여하여 '인민의 친구회(Societe des Amis du Peuple)'라는 공화주의 단체에 가입한다. 이 일로 그는 1831년과 1836년에 각각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정부 활동을 하면서 그는 필리포 부오나로티의 사상을 배우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등에 관심을 둔다. 블랑키는 폭력혁명을 통한 구체제 전복과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꿈꿨고, 이는 비밀결사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는 '가족회(Societe des Familesl)'와 '계절회(Societe des Saisons)'를 몰래 조직하여 혁명 운동을 펼쳤다. 1839년 5월 12일에는 계절회 회원 500여 명과 함께 파리 시청을 점거하는 봉기를 시행하여 이틀 동안 저항했으나 진압당했다. 이 일로 블랑키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유배를 당했다. 1848년에 풀려난 그는 2월 혁명에 고무되어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체포되어 봉기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1848년부터 1859년까지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블랑키는 석방 직후에도 다시 비밀결사 조직에 나서다 또 감옥에 갇혔고 마침내 1865년 벨기에로 망명했다. 한편 이러한 투옥과 석방의 반복 속에서 그는 <사회비판(Critique Social)>이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2]
이후 보불전쟁이 터지자 블랑키는 혁명은 물론이고 애국도 강조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군대에 저항하여 프랑스를 지킬 것을 주장했다. 헌데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한 후 수립된 제3공화국은 전쟁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블랑키는 이에 저항하다 1871년 3월 17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가 체포된 바로 다음 날 파리 시민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서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 블랑키는 체포된 신분이었으나 파리 코뮌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하였고, 파리코뮌이 진압된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파리코뮌 이후 블랑키는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고[3] ,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벌이다가 1881년 1월 1일 사망했다.
3. 사상
블랑키의 사상은 블랑키주의(Blanquism)이라고 불리는데, 그 골자는 ''''비밀결사를 통한 소수 정예분자들에 의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