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1. 개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1]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이자 이 운동으로 70일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자 프랑스에 있던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이었다. 자코뱅,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여성 참정권의 보장, 최대 노동 시간 제한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군의 극심한 탄압으로 붕괴했다."코뮌이 이러저러한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 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2. 탄생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너무나도 한심한 대처를 보여주자 결국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제3공화정이 수립된다.어제까지는 이름조차 없었으나 곧 만천하에 그 이름을 날릴 이 미천한 프롤레타리아트ㅡ국민 방위대 중앙 위원회 성원들ㅡ가 정의와 권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프랑스와 공화정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충만하여 침략당한 조국과 위협받는 자유를 구하러 단호히 일어섰다.
우리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부흥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의 코뮌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코뮌은 모든 정치 체제의 토대다.''' 코뮌은 자치를 보유해야 한다. 즉 코뮌의 독특한 특성과 전통과 필요를 인정하는 자치 행정, 자치 정부를 가져야 한다.
<3월 18일 혁명>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3월 20일 자
하지만 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도 나폴레옹 3세 못지않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굴욕적인 사태가 지속되었다. 빌헬름 1세의 즉위가 베르사유 궁에서 이루어졌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새로운 국민의회가 자리를 잡은 도시가 하필이면 또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던 베르사유. 전쟁 직후에는 보르도에 수립되었으나 임시정부가 완전히 구성되고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파리가 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인 만큼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 정반대인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은 이런 일로 인해 더더욱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은 의용군인 국민위병의 처리 문제였는데, 안 그래도 불신을 받던 임시정부가 프랑스군의 예비군의 역할을 하던 의용군을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3월 18일, 티에르는 국민위병이 보유하고 있는 대포를 탈취하고자 정규군을 파견하였다. 군인들은 대포가 있던 몽마르트 언덕에 도착하여 대포를 차지했지만 곧 분노한 시민들과 국민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이 모여들자 정부군 여단장은 발포를 명령했지만 '''군인들이 시민들과 손을 잡으면서''' 정부의 진압 작전은 실패한다. 이 일로 정국의 주도권은 시민들에게로 넘어간다.
곧 3월 26일 코뮌 평의원 선거가 파리에서 치뤄지고 84명의 평의원이 선출되면서 '코뮌 평의회'가 출범하였다. 평의원들은 대다수가 자코뱅과 공화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고,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3월 28일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파리코뮌의 성립을 선언한다.''' 이튿날부터 파리 코뮌은 10개의 위원회[2] 를 구성하고 자치 정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3. 진행
파리와 프랑스는 지금 진행되는 혁명의 성격, 원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당하는 이 비탄, 고통, 불행의 책임이 프랑스를 배신하고 파리를 외국에 내준 후... 이 위대한 도시의 파멸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을 당연하다.
코뮌은 파리 주민들의 열망과 바람을 확인하고 명확히 할 의무가 있다... '''파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인민의 권리, 자유롭고 정상적인 사회 발전에 부합하는 유일한 통치 형태인 '''공화정을 인정하고 공고히 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 능력과 자질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코뮌의 절대적 자치'''를 요구한다....
보라, 무기를 든 파리는 용맹과 평온을 지키고... 열정과 활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파리는 만인의 자유와 영광에 헌신하고자 무기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투쟁할 의무, 승리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 인민에게 고함>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4월 20일자
3.1. 파리 코뮌의 정책
다양한 스펙트럼의 좌익으로 구성된 코뮌 정부는 상당히 진보적인 활동을 벌였다. 먼저 정치적 주체를 인민으로 설정했고, 인민 주권을 표방하였다. 그래서 코뮌 평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시민들의 찬반에 따라 직위를 유지하거나 상실하였다. 또한 이런 구조하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정책들을 펼쳤다.
코뮌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위를 향상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많이 시행하였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공장을 접수하도록 했으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공장을 운영하여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도왔다. 또 노동 시간을 하루 최대 10시간으로 제한하였고, '''최저 임금제'''와 '''야간 노동 금지''' 등의 파격적 조치도 발표했다. 이외에도 주택 임대료를 조정하고, 빈곤층을 구제했으며, 공창제를 폐지하고 도박을 금지시켰다.
교육에서는 '''교회와 교육을 분리'''하였다. 당시 가톨릭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는 종교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코뮌 정부는 정교분리를 강조하여 세속주의적 교육관을 퍼트렸다. 그런가 하면 초등 과정에서 '''의무 교육제'''를 무료로 시행했으며, 직업 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교육도 강화했다. 교육 내용도 실용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또 예술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예술가들을 지원해주었다. 이 당시 코뮌의 지원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가 귀스타브 쿠르베이다. 그는 코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코뮌 진압 이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코뮌 정부는 또 여성과 외국인의 권리 신장에도 신경을 썼다. 파리 코뮌은 여성들과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들이 코뮌 정부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최초의 여성 대중 운동 조직''' '여성 동맹'을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코뮌은 자유로운 결혼을 인정했으며, 독신 여성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연금 지원도 실시했다. 놀라운 것은 법률혼뿐 아니라 사실혼인 경우에도 이 정책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코뮌 정부는 '권위주의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여 나폴레옹 1세 당시 세워진 방돔탐 등 여러 권위적 건물과 기념물, 문화유산들을 정책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다.
4. 결말
초기에는 코뮌 측의 병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나, 2주일만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베르사유의 정부는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파리에서 철수시킨 정규군 대신 지방에서 징집한 군대를 집결시키고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포로로 있던 40만의 프랑스군을 귀환시킨다. 코뮌과 정부 간의 협상도 있었으나 결국 4월 2일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코뮌 측은 훈련부족과 기율 결핍으로 패배를 거듭한다. 특히 명확한 지휘계통의 부재와 다양한 정파들 간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전투는 코뮌군의 계속된 패배로 이어진다.
당시 코뮌군의 훌륭한 지휘관이었던 로셀은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그만 두면서 사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국 5월 21일 밤 정부군이 시내로 돌입하여 28일 오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코뮌 의원 동지들, 모두들 토론은 하나 아무도 따르지 않는 지휘의 책임을 내가 계속하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코뮌이 토론은 하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만일 내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다면 나는 적을 징계할 수 있다..... 포병위원회의 엉터리가 포병대 조직을 막았고, 중앙위원회의 머뭇거림이 집행을 지연시키고, 대장들의 사소한 선입견이 군대 동원을 마비시키고 있다...."
코뮌측 중 절망한 과격파들은 파리의 대주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반대파를 학살했다. 또한 튈르리(튀일리) 궁전, 루브르 궁전, 팔레 루아얄과 중세 시절부터 건축된 각종 정부, 법원 청사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을 고의로 불태우면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정부군도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포로를 즉결 처형하는 등 처절하게 보복했다. 보복은 보복을 일으키고 그 강도를 계속 더 해 갔다.[5]
이 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만명 정도로 잡는데#, 1871년의 파리 인구는 175만명 정도였다. 2019년의 파리 시내 인구가 220만명이니 지금 수준으로 봐도 1% 이상이다. 1871년 당시 파리 인구로 치면 거의 2%에 가까운 대학살이었다.
이 학살극 이후 코뮌 정부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후 보복도 이어져서 4만여 명이 법정에 끌려나왔으며, 이 중 13450명이 재판을 받아야 했다.이 중 사형 270명, 강제노동 410명, 요새 금고형 3989명, 유형 3507명이다. 일부 코뮌 참여자들은 프랑스를 빠져나와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은 다시 명맥을 잇는다.
5. 영향
비록 코뮌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시도는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세우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으며[6] ,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본보기/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사에 비춰보면, 파리 코뮌은 그간 프랑스 혁명을 이룬 상퀼로트들의 최후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있다. 역사가 데이빗 톰슨에 의하면 파리 코뮌은 1789년 이래의 프랑스 혁명적 전통의 매듭 중 가장 큰 것으로서, 파리 코뮌이 문명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끝나자 이후 폭력에의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가 평화적 타결로 혁명을 이어가는 이유가 파리 코뮌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뷰리라는 역사가는 파리 코뮌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향으로 우선 파리 코뮌을 통해 혁명의 중점이 파리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들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파리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모든 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고 지방의 반발은 파리의 중심을 차지한 혁명세력에게 짓눌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파리를 차지했는데도 지방에 밀려서 패배'했다. 파리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는 늘 동반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실패로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다시 지연시켰다는 면도 있었다. 물론 이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지만,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이 해체되면서 국민위병 부대도 해체, 19세기 내내 정부와 별개로 민중을 대변했던 힘이 소멸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파리 코뮌을 통해 제2제국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실현이 한층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전세계 좌익에서 널리 불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 인터내셔널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2000년에 피터 왓킨스가 감독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뮌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 당시 벨기에에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뮌에 대해 동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후일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자 정부군이 파리에 들어오며 끔찍한 전투와 학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절규했고 <참혹한 해(L'Année terrible)>라는 시집을 1872년 출판한다. 그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는 다음과 같다. 원문
6. 문화재 파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파리 코뮌 기간 동안 파리를 상징하는 각종 유서 깊은 역사적 건축물들과 문화재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과격한 코뮈니스트들이 건축물들과 문화재들을 대거 파괴했기 때문이다. 파리 코뮌이 진압되고 나서 도시가 거의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것은 코뮈니스트들의 엄청난 방화 때문이었다.
파리 시내에 있던 여러 궁전, 의회, 정부, 법원, 오페라하우스 건물 등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코뮤니스트들은 역사적 건축물에 의도적으로 방화했으며, 석유와 액체 타르 등을 써서 방화한 덕분에 많은 건물들이 속수 무책으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파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궁전인 튀일리 궁전도 이때 코뮤니스트들의 방화로 완전 전소되었으며, 루브르 궁전에도 방화가 시도되었으나 화재가 조기 진압되어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튀일리 궁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 튀일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16세기에 지어져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유명한 파리 시청도 이때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나중에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7. 기타
러시아-소련 해군의 강구트급 전함 중 파리시스카야 콤무나(Парижская коммуна)는 이 파리 코뮌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정확히는 소련 건국 이후 붙여진 것으로, 제정 러시아 시절의 이름은 '세바스토폴'. 앞서 말했듯이 파리 코뮌은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로 꼽히므로, 러시아 혁명 직후 국제주의 - 이상주의 성향이 많이 남아 있던 소련에선 당연히 이를 기념할 필요가 있었다. 비슷한 예로, 같은 강구트급 전함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는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혁명가 장 폴 마라의 이름을 따서 '마라(전함)'로 바뀌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세운 토마스 쿡이 처음으로 패키지 여행 서비스 대상으로 삼은 곳들 중 하나가 바로 파리 코뮌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파리 시가지였다. 당시 색다른 것을 찾던 부유한 영국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만든 시뮬레이션 게임인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프랑스 진영에서 공산주의 루트를 선택할 시 프랑스 코뮌으로 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