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효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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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 주체의 정비이다.
홍무제과 효자고황후의 넷째며느리. 이름은 서대사. 홍희제의 어머니이자, 홍희제의 장남인 선덕제의 할머니다. 참고로 건문제의 숙모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이다. 자신의 시어머니인 효자고황후랑 더불어 성품이 인자하고 온후했던 황후이다.
공식 시호는 '''인효자의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仁孝慈懿誠明庄獻配天齊聖文皇后)'''이다.
보통 '''서황후(徐皇后)''' 라고 불리며, 가끔 '''인효황후'''라고 불리는 경우 있다.
2. 일생
남편 영락제보다 2살 어린 서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의 큰 딸로 1362년에 태어났다.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홍무 9년(1376년)에 시아버지인 홍무제가 친정아버지인 서달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해 연왕 주체에게 시집을 갔다. 서씨는 어려서 부터 성격이 착할 뿐만 아니라 독서를 좋아해서 이런 계기로 시아버지 홍무제가 친정아버지에게 사돈 맺자고 했던 것. 일단 혼인을 했으나 서씨 가문에서 대숙청에 휘말려 있었다.
주체는 이러한 성격에 서씨를 아꼈고 사랑하였으며, 서씨도 연왕을 내조를 하였는데, 주체와 그녀 사이에서 3남 4녀를 얻었다. 장남은 명인종[1] 이며, 차남은 서씨의 손자인 명선종[2] 에게 반란을 했다가 죽었던 주고후이다.
건문 4년(1402년)에 남편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어 되자 황제에 등극 하여 서씨 본인도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후에 서씨는 영락제에게 조언을 자주 해주었고, 자신의 친정을 멀리 하였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영락제가 자신을 돕기 위해 죽은 서씨의 동생 서증수에게 작위를 추서하려고 했지만 서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를 반대하였다. 영락제가 서씨 몰래 작위를 주고 나중에 알리자 서씨는 끝까지 감사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명사(明史)에 전한다.
1407년에 서씨 본인이 지병으로 인해 "백성을 아끼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황실에 예를 다하되 자신의 외가친척들을 절대 돌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장릉에다 장사지냈다.
이 인물 사후 황후전이 비어있는 사이 내명부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영락제의 조선과의 관계를 참조.
3. 성격
서씨는 어려서 부터 천성이 온화했고, 공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독서광이어서 항상 교양이 넘쳤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서씨의 시어머니인 효자고황후 마씨에 버금가는 현명한 황후이며, 서씨의 장남인 홍희제가 어머니 서황후의 성격을 매우 닮았다. 아들 홍희제 도 성격이 인자하였지만 병으로 고생한 사람이었다. 남편 영락제는 성격이 호탕한 스타일인데, 이에 반대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이를 보면 호탕한 스타일인 영락제도 그녀를 매우 아낀 듯 하다.
황후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남편 영락제를 도왔으며, 항상 조언을 했으며, 심지어 외척에게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계를 하였다.
4. 사후
1407년에 그녀가 죽자 '''인효황후(仁孝皇后)''' 정했으나 남편 영락제 사후 정식으로 '''인효자의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仁孝慈懿誠明庄獻配天齊聖文皇后)'''가 되었다.
5. 여담
- 야사에 따르면 인효황후의 여동생 서묘금이라는 여성이 영락제의 청혼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한다. 1407년에 언니 인효문황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영락제는 크게 상심하였는데, 그 이후에 언니인 서황후를 인효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락제가 자신의 처제인 서묘금에게 청혼을 하였다고 한다. 처제인 서묘금은 재주와 용모가 친언니이자 영락제의 정비인 서황후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정비의 모습을 닮은데다가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본 영락제는 1407년 그해에 새로운 황후의 간택령을 내렸다가 취소하고, 바로 서묘금을 불러들여 청혼을 시도하려 했다. 서묘금은 학식도 뛰어나고 역사서와 고전에 능했다 한다. 그러나 영락제를 멸시하던 서묘금은 영락제의 청혼을 여러번 사양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신을 보내 영락제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 서신에서 자신은 양가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욕심도 없고 부귀영화도 꿈꾸지 않으며 오직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것과 열심히 불공을 드려 황제의 앞날을 축원하겠다는 것과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 세상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묘금의 장문으로 된 청혼거부 서신을 받자 결국 그는 결혼을 포기한다. 이후 그는 새 황후를 맞이하지 않고 여생을 보낸다. 하지만 명나라 중기 역사가 왕세정에 의하면 서묘금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위의 내용은 사실이 아닌 야사에 가깝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