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고황후

 


''' '''
'''孝慈高皇后 | 효자고황후'''
'''시호'''
효자정화철순인휘성천육성지덕고황후
(孝慈貞化哲順仁徽成天育聖至德高皇后)
''''''
마씨(馬氏)
''''''
수영(秀英)
'''부모'''
마공(馬公)[1], 정온(鄭媼)[2]
'''배우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
'''재위기간'''
'''명나라의 황후'''
1368년 ~ 1382년
'''생몰기간'''
1332년 ~ 1382년
1. 소개
2. 일생
2.1. 어린 시절
2.2. 주원장과 혼인과 킹메이커 생활
2.3. 황후 시절
2.4. 별이 지다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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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족 왕조 명나라 제1대 황제 홍무제 주원장의 정비이자 명나라 최초의 황후이다. 성은 마(馬)씨이며, 이름은 수영(秀英)이다.
공식적으로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효자정화철순인휘성천육성지덕고황후(孝慈貞化哲順仁徽成天育聖至德高皇后)'''이나 주로 ''' 마황후(馬皇后) '''라고 불린다.
아버지는 마공이며, 양아버지는 저양왕 곽자흥이다. 의문태자 흥종 주표명성조의 어머니이고, 건문제[3], 홍희제[4]의 할머니이다. 마씨 사후에 태어난선덕제의 증조할머니,영락제의 정비인 인효문황후의 시어머니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국모'''로 불리는 인물이자 남편을 황제로 만들고 보좌한 킹메이커로선 문덕황후 장손씨와 더불어 투탑으로 꼽히는 여장부이다. 하지만 장손왕후의 남편 당태종의 자질과 마씨의 남편 홍무제의 자질 차이를 고려해보면 그냥 마씨가 원탑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주원장이 천하에 이름을 떨친 후 천자가 되고 그 치세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준 일등공신인 사람이다.

2. 일생



2.1. 어린 시절


마황후는 주원장보다 4살 어렸으며, 이름()은 마수영이다. 1332년 안휘성 숙주(宿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공(馬公)인데, 원래 장수였으나, 집안이 한미했다. 아버지 마공은 특히 곽자흥이랑 친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결국 지병으로 죽자, 이를 안 곽자흥은 마공의 딸인 마수영을 수양딸로 삼았다. 부모를 일찍 잃은 마수영은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컸다. 그때 당시 보통 사대부 여인들은 전족을 했는데, 마수영이 전족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마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경서를 가까이 해 똑똑했다. 거기에 성품이 인자하기까지 해 곽자흥은 마수영을 상당히 예뻐하며 키웠다고 한다.

2.2. 주원장과 혼인과 킹메이커 생활


1352년 21살이 되었을 때, 마수영 양부 곽자흥의 수하였던 주원장과 결혼을 했다. 주원장과 결혼한 이유는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당시 주원장은 아무것도 없는 고아인 데다 탁발승 출신 이었다. 그때 고생을 많이 해서 마마까지 앓아서 얼굴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거기에 결혼도 정략적인 느낌이 다분했음에도 주원장-마수영 부부는 사이가 좋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주원장은 아내의 말을 명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주원장 본인이 그녀에게 자기 개인 서찰에 대해 직접 관리하게 하였다. 사실 착하고, 똑똑하고, 헌신적이고, 남편 잘 챙겨주고, 일도 잘 도와주는 아내를 싫어할 남편이 어디있겠냐만.
부부는 금슬이 좋아 자녀를 낳았는데, 5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주표[5], 넷째 아들인 주체[6]를 낳았다.
그녀의 양부 곽자흥은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믿어서 특히 남편 주원장을 의심 했는데 그녀의 기지로, 누명을 풀 수 있어 양부 곽자흥을 신임을 받게 하였고, 한편 곽자흥의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원장을 음해하여 감옥에 가둬두게 했다. 마씨는 가슴에 뜨거운 전병을 넣고 감옥에 고생하는 주원장을 직접 주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양모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서 양부 곽자흥에게 이야기하자 이를 안 곽자흥은 두 아들에게 매질을 하고, 주원장을 풀어줬다.
그녀는 평소에 말린 고기를 충분히 준비하여 남편에게 제공했지만, 자신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거기에 수시로 병사들의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주원장이 용만에서 진우량과 결전을 벌일 때는 궁중의 모든 금은보화와 비단을 털어 군사를 위로했다고 한다.

2.3. 황후 시절


1368년 남편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응천부[7]에 궁을 짓고 대명(大明)이라는 나라를 짓고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초대 황후가 되었다. 마황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나라에 흉년이 들면 자신은 푸성귀 반찬을 먹으며 하늘에 기도하는 등 백성에 대한 사랑도 많이 줬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이 남을 못 믿고 다혈질적인 남편에게 항상 조언을 많이 하였다. 신하들에게 포악한 모습을 가진 홍무제였지만 젊었을 때 같이 고생하던 조강지처 마황후에게 항상 고마워해서 많이 아꼈다고 하고, 그녀의 건의에 대해서는 많이 수용했다. 마씨는 항상 식사를 검소하게 하였으며, 공주들과 후궁들과 같이 자수와 방적을 많이했고, 옷을 직접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그런 일도 많이 했다. 이러한 마황후의 행동에 후궁들은 엄청 감동했다 한다. 또한 자식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황후가 가장 잘한 일은 신하들의 숙청에 대한 제어를 했기 때문이다. 남편 홍무제는 자수성가해서 나라를 건국한 황제였지만 그 속에서도 비판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신하를 숙청하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죽었던 신하들이 10만 명 정도였고, 숙청하는 방식이 매우 잔인했다고 한다. 이러한 숙청을 막은 사람이 바로 아내 마황후다. 그나마 마씨가 살아있을 때 이성적으로 숙청을 할 때도 있었다. 억울하게 숙청을 당하게 된 신하가 그녀를 찾아오면 마황후는 신하를 두둔하면서 안정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설득을 하면, 주원장도 마음을 바꾸어 신하들을 용서했으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마황후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말리기도 했다. 이런 마황후의 노력으로 많은 충신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태자 주표의 스승이자 대학자였던 송렴이다. 그도 죽을 뻔했는데 마 황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호유용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마 황후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주원장에게 간곡히 화를 풀라고 부탁했으나, 웬만하면 마 황후의 말을 듣던 주원장도 이번에는 마 황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마 황후는 명 태조의 수라상을 직접 들고 왔는데, 뜻 밖에도 술과 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명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소첩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송 선생을 위하여 재계(齋戒)하고자 주육(酒肉)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재계란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데, 당신도 술과 고기를 당분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그러자 명 태조는 송렴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음 날 그는 송렴을 사면하고 무주로 유배를 보내 목숨은 살려주었다.
발이 매우 컸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큰 발 마 황후'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마 황후가 실제로 발이 컸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족을 하지 않아서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족이란 성장기에 발을 천으로 강하게 매서 성장하지 못하게 하여 억지로 작은 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상류층 여성들은 거의 반드시 이렇게 했다. 이런 작은 발은 미의 기준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에 딸들이 고통스러워해도 부모들이 억지로 시켰다고. 그러나 도적단 수장의 양녀였던 마 황후는 전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발이었고, 그래서 상류층 여성에 비교해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마 황후의 발이 크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녀에겐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주원장과 결혼했을 때 첫날밤에는 주원장이 발이 크다고 이야기하자, "나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좋아하니, 당신도 나의 발을 좋아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한 일화도 있으며, 한번은 민간에서 마 황후를 큰 발이라며 비웃는 그림이 나붙었는데, 마침 암행 중이던 주원장이 이를 보고 대노하며 그림 앞에서 낄낄거리던 백성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 하자 황후가 "제가 발이 큰 건 사실이니 그런 일로 처형하지 마시라"고 간언하여 주원장도 그들을 살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중국에서는 복을 뜻하는 글자인 福을 쓸 때 거꾸로 쓰는 일이 있는데, 이를 '다오푸'라고 한다. '다오푸'가 '집에 복이 들어온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 풍습이 마황후와 연관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어느 백성이 위에 언급한 발 크기로 황후를 조롱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원장은 집 앞에 福 글자를 거꾸로 쓴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마 황후는 주원장 몰래 아랫 사람들에게 지시해서 도성 내 모든 집 앞에 거꾸로 쓴 福 글자를 달아놓도록 하였다. 그래서 백성을 잡으러 출동한 황제의 부하들은 어떤 집인지 찾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이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퍼지면서, 마황후의 어진 성품에 감사하는 마음과 거꾸로 쓴"福"자가 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서 이 풍습이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 마 황후는 매우 어질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 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2.4. 별이 지다


홍무 14년 (1382년)에 그녀는 지병으로 고생 중이었다. 그녀는 어의가 지은 탕약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만약 탕약을 내려 먹고 죽으면 남편이 아내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를 죽일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에 남편 홍무제에게 "폐하께서는 널리 현자를 구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처음 세웠을 때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유언을 남겨 향년 51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마황후 죽음에 홍무제는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 이후 주원장은 황후를 더이상 들이지 않았다. 시호는 '''효자황후(孝慈皇后)''' 로 정했으며 능은 효릉(孝陵)으로 장사지냈다. 그녀가 죽은 지 16년 만에 남편 홍무제가 사망하여 효릉에 합장하였다. 남편 홍무제가 죽은뒤에 받는 그녀의 시호는''' 효자정화철순인휘성천육성지덕고황후(孝慈貞化哲順仁徽成天育聖至德高皇后) '''로 받았다.
마 황후의 죽음 이후 브레이크가 사라진 주원장은 제대로 폭주하여 온갖 공신을 때려잡는 잔혹한 황제로 변해버렸다. 태자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이라고 말하자 주원장은 화가 나서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 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 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는 일화가 있다.

3. 평가


마씨는 당태종의 아내 문덕황후 장손씨와 더불어 중국사 최고의 황후로 평가를 받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주원장이 천하를 쥐어잡아 황제라는 자리에 올라 이후 치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녀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내로서 남편을 항상 도왔고 전장에 나가는 주원장을 독려했고, 남편이 자신의 양오빠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있을 때 매사에 남편에게 음식을 주었고, 누명도 직접 풀어 주었다. 황후가 되었을 때도 남편에게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남편의 무분별한 숙청을 할 때 직접 막았으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게끔 이끌었다. 주원장이 이러한 내조에 깊이 감사하고, 그만큼 많이 사랑했음은 물론이다.
어머니로서는 자식 교육에 집중하였는데, 아들이 5명이 있었는데 특히 막내아들 주숙이 가장 문제아였다. 이에 후궁인 귀비 강씨에게 감독을 하게했는데, 자신의 베옷과 매를 주면서 만약에 잘못을 했을 때 베옷을 입고 야단을 치라 하고, 만약에 말을 안 들으면 조정에 보고하라고 전했다. 이를 안 주숙은 가르침에 순종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원말명초를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반드시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이 나온다. 보통 미녀 배우를 캐스팅 하지만 초상화대로 인자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포근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으로 나온다.
2006년 제작된 호군(胡軍) 주연의 46부작 드라마 <주원장>에서는 주원장이 마씨의 양부 곽자흥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혼인한 후에도 홍무제가 마황후에게 '누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아낀다. 나중에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어의들이 올린 탕약을 물리치고 남편에게 어의들을 벌주지 말라고 당부하는 등 사소한 면에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자 슬픔이 극에 달한 홍무제는 마황후의 유해를 염습하려던 신하들을 죽이면서 황후가 아직 죽지 않았다며 분노를 터뜨리지만, 맏아들 주표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애원하자 '누이가 죽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혼절한다. 마황후의 장례 행렬이 도성을 떠날 때 연도에 운집한 백성들이 통곡하자 행렬을 뒤따르던 홍무제는 저 백성들을 관부에서 동원한 것이냐고 측근에게 묻지만, 마황후가 생전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베푼 덕을 입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애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에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

[1] 이름은 실전됨.[2] 온(媼)은 한자로 어머니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친 정씨. 진짜 이름은 불명이다.[3] 남명에서 혜종(惠宗)으로 추존했다. 마씨의 큰아들인 주표의 차남. 원래 상우춘의 딸인 황태자비 상씨(효강황후)의 아들이 장남이었는데 일찍 죽어 주윤문이 실질적 장남이다. 참고로 건문제는 황태후 여씨의 소생이다.[4] 묘호는 인종(仁宗), 그녀의 4남 영락제의 큰아들이다.[5] 건문제의 아버지다. 성격이 인자했지만 몸이 약해 황태자 신분으로 요절했다. 아들 명혜종 때 흥종(興宗)으로 추존했지만 동생 연왕 주체가 즉위하고 나서 의문태자로 격하됐지만 다시 추존하였다.[6] 훗날 영락제이다. 명나라 개국하고 나서 연왕이라고 불렀다. 사실 영락제의 출생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는데, 효자고황후가 실제로 낳은 아들이다.[7] 지금 난징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