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
1. 소개
子貢
기원전 520년경 ~ 기원전 456년경
본명은 단목사(端木賜).[1] 자공은 자(字)이다. 위나라 출신으로 공자보다 31살 연하였다.[2] 공자가 아끼는 제자로서 언변에 뛰어났으며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또한, 장사에도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고, 능력 또한 비범하였기에 '''"중니(공자)보다 자공이 더 낫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3] 허나 그는 남의 단점을 덮어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의 흠을 발견하면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비판을 꽤나 가했다는 것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죽기 일주일 전에 자공이 찾아오자 공자는 자공에게 "왜 이리 늦었느냐?"라며 탄식한 후 그 유명한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예기》 〈단궁상(檀弓上)〉은 같은 기사를 조금 다른 내용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자공이 집 밖에서 저 노래를 듣고서 들어가 공자를 만나니 공자가 "왜 이리 늦었느냐?"라고 탄식했다는 것이다."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哲人)은 스러져가는가!"
(太山坏乎!梁柱摧乎!哲人萎乎!)
먼저 가버린 안회, 자로와는 달리 공자가 죽을 때 올 수 있었던 제자로 공자 사후 3년간 복상을 더 하였다. 즉 6년상을 하였다는 뜻이다.[4] 그 이유에 대해서 추측을 하자면 일단 자공이 스승에게 지니고 있었던 무한한 존경심 때문에 그랬다거나, 아니면 당시 공자학단 내부의 어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분히 의식적인 행위였다는 등 설이 분분하지만, 자공이 공자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전자 쪽이 더 그럴듯하다.
말년은 제나라에서 보냈다. 엄청나게 돈을 벌고 엄청나게 돈을 썼다고 한다. 3대가 부자였는데, 손자 단목숙(端木叔)은 마음 내키는 대로 쓰고 친족과 고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다가 말년에 전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는데 자손들에게는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병이 들어선 약값도 없었고, 그가 죽자 장사를 치를 비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지인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루고 자손들에게 재산을 돌려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있는데, 열자 《양주편》에서는 금골리(禽骨釐)는 단목숙이 미친 사람이며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비난한 반면, 단간생(段干生)은 그가 도를 아는 달인이며 그 덕이 조상보다 낫다고 평했다.
2. 능력
'''비상한 머리+천부적인 장사 실력+뛰어난 정치 감각+유려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한 언변을 자랑하는, 공자 학단 내에서도 독보적인 능력자.'''
조국인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공자는 자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자공은 뛰어난 언변으로 노를 침공하려고 하는 제나라의 대부 전상(田常)에게 가서 그를 설득해 강성한 오나라를 치는 것이 제나라에 있어 얼마나 이득인지 설득하고, 오에 가서 오왕인 부차에게 노를 돕는 것이 패자가 되는 길이라고 설득하고, 뒤쪽의 월나라가 걱정된다고 하자 월로 가서 월왕인 구천에게 오를 돕는 척 하면서 오의 빈틈을 노리라고 조언한다. 다시 오로 가서 월의 과도한 지원을 막고, 노를 도우면서 진나라까지 치는 것을 건의 한 후, 진으로 가서 오의 침공이 걱정되니 방비를 단단히 하라고 조언한다....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가 패자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번 돌아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 사기 《중니제자열전》
결국 자공이 국제 무대에 한번 등장하니 노를 구하고, 제를 뒤흔들고, 오를 멸망시키고, 진을 강대하게 만들고, 월을 패자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자공 한 사람에게 다섯 나라가 놀아난 것이니... 신의 경지에 달한 언변을 볼 수 있다.'''
장사에도 뛰어나, 돈을 많이 벌어 엄청난 재산을 쌓았는데, 이러한 면모가 사기에서 잘 드러난다.
자공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며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衛)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두기도 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삶을 마쳤다.
- 사기 《중니제자열전》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나 재상 직도 여러 차례 지냈는데, 그의 이러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이 논어에 실려있다.子贛旣學於仲尼, 退而仕於衛, 廢著鬻財於曹魯之閒, 七十子之徒, 賜>最爲饒益. 原憲不厭糟穅, 匿於窮巷. 子貢結駟連騎, 束帛之幣以聘享諸侯, 所至, 國君無不分庭與之抗禮. 夫使孔子名布揚於天下者, 子貢先後之也. 此所謂得埶而益彰者乎?
자공은 공자에게 배운 다음 스승 곁을 떠나 위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고 조(曹)나라와 노나라에서 물자를 쌓아두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그리하여 공자의 칠십여 제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해졌다. 공자의 제자 중 원헌 같은 이는 술지게미와 쌀겨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뒷골목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에 비해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제후들과 교제하였고 가는 곳마다 왕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로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퍼진 것도 그가 공자를 모시고 다닌 덕분이었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어 그 이름이 더욱 높아진다'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 사기 《화식열전》
이 말은 군자가 악행을 꺼리는 이유를 말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나라의 마지막 군주는 다음 왕조에 의해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얘기로도 해석될 수 있어, 군자에 대한 사상을 표현함과 동시에 자공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자공이 말했다. "주왕의 선하지 못한 점이 그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니, 세상의 악한 것들은 모두 그리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 논어 《자장》[5]
[6]
또한 자공은 이런 말을 남겼다.
군자[7] 의 거동은 공개적일 수 밖에 없어서, 공실이 온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게 되는 세태를 통찰해낸 말이라 할 수 있다.자공이 말하였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 같아서,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
- 논어 《자장》
3. 공자와의 일화
-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자공의 말솜씨가 뛰어난 것을 공자가 항상 꾸짖어 경계시켰다고 한다. 자공의 장점이 한편으로는 단점이 될 수 있다고 공자는 여긴 듯 하다.
- 어느날 공자는 자공에게 "안회와 너 중에 누가 더 나으냐?"라고 묻자 자공은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둘밖에 알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이 대답을 잘 음미해보면 자공은 겸양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은근히 자신감을 내비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공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래, 너는 안회만 못하다. 너와 나 둘 다 안회만 못하니라."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문일지십'. 즉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이다.
- 자공이 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너는 그릇이다." 라고 말했다. 자공이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공자는 "종묘에서 쓰는 호련[8] 이지."라 말했다.[9] 그런데 공자는 이전에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결국 '너는 능력은 뛰어나긴 하나 군자는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 자공이 남들의 단점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공자는 "사(賜)는 현명한 사람일까? 나는 그럴 겨를이 없는데." 라고 말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난 남 욕할 시간도 없던데 넌 뭐가 그리 잘났냐?" 정도의 뜻이다.
더구나 자공은 일신의 능력은 출중하나 자부심이 강하고, 겸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자는 자주 그에게 충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로도 마찬가지로, 자로는 공자라는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회나 자공 이상 가는 친분이 있었지만 매일 꾸중을 듣는 것이 일이었다. 최근에는 이를 두고 공자 본인이 자공을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융의 이론을 적용하자면, 안회는 공자의 페르소나고 자공은 그림자라는 뜻이다. 배운 것을 조용하고 성실히 잘 실천하는 안회를 본 공자에게는 이 것이 자공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작용하여 가장 열심히 지도했다는 해석이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공자를 다룬 애니메이션 <공자전>에서는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 안회나 자로보다도 더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 애니메이션 자체가 자공이 공자의 묘에서 6년상을 치를 때 증삼이 찾아와서 그와 함께 스승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성우는 장세준.
크래시피버에서 사마천 일행이 도망치는 것을[10] 돕는다.
5. 기타
이렇게 언변이 뛰어난 자공도 '''말에서 눌린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자 《양왕편》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인 원헌과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이다.[11]
비슷한 내용이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도 실려 있다.원헌이 노나라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사방 한 칸의 작은 집이었다. 초가지붕에는 풀이 자라고, 싸리문은 부서져 있고, 뽕나무 줄기로 문지도리를 삼고, 깨진 항아리를 박아 창을 낸 두 개의 방은 칡으로 창을 가리고 있었다. 위에서는 비가 새고 아래 바닥은 축축했는데, 원헌은 똑바로 앉아서 금을 뜯으며 노래하고 있었다.
자공은 큰 말이 끄는 수레를 탔는데, 수레 안쪽은 보랏빛 천으로 장식하고 겉포장은 흰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큰 수레가 그의 집 골목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는 걸어가서 원헌을 만났다. 원헌은 가죽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쓰고 뒤축도 없는 신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 문에 나와 그를 맞았다.
자공이 말했다. "아이고! 선생께서는 무슨 병환이십니까?"(子貢曰: "嘻! 先生何病?")
원헌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은 가난하다고 말하고,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을 앓는다라고 한다 했습니다. 지금 저는 가난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은 아닙니다."(原憲應之曰: "憲聞之, 无財謂之貧, 學道而不能行謂之病. 今憲, 貧也, 非病也.'')[12]
자공은 우물쭈물 뒷걸음질치면서 부끄러운 얼굴빛을 하였다.
원헌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평판을 바라면서 행동하고, 자기와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만을 벗하고, 학문은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서 하고, 가르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고, 인의를 내세워 간악한 짓을 하고, 수레와 말을 장식하는 일들은 저로서는 하지 못할 일입니다."
공자의 3대 제자 중에서도 공자를 가장 경외했던 인물은 바로 자공이 아니였나 싶은데, 자공은 공자를 고금의 진실로 위대한 성인이라고 하며 그만한 인물은 세상에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다. 또 공자가 주유열국을 할때 그를 모시고 다니며 지원하였고, 공자 사후 6년상을 치뤄 그를 기렸다. 또한 주유열국의 여정에서 늘 공자의 명성을 높이고 공자의 이름을 알렸으니, 공자가 고금 제일의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자공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13] 허나 아쉽게도 그는 공자의 학문을 이을 적통이 되지 못했고, 또 그런 야망을 드러내는 장면도 보이지 않았는데, 자공이 자신이 경애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지었는지, 또 어떤 야망을 품고 있었는지는 아쉽게도 알 수가 없다.孔子卒, 原憲遂亡在草澤中. 子貢相衛, 而結駟連騎, 排藜藿入窮閻, 過謝原憲. 憲攝敝衣冠見子貢. 子貢恥之, 曰 : “夫子豈病乎?” 原憲曰 : “吾聞之, 無財者謂之貧, 學道而不能行者謂之病. 若憲, 貧也, 非病也.” 子貢慙, 不懌而去, 終身恥其言之過也.
공자가 죽은 뒤 원헌은 세상을 등지고 풀이 무성한 늪가에 숨어 살았다. 어느 날 위(衛)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자공이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호위병들과 함께 원헌을 찾아왔다. 원헌은 낡은 관과 옷을 입고 그를 맞이하였다. 자공은 그의 초라한 행색을 부끄럽게 여겨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병이 들었습니까?"
원헌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貧)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자공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굉장히 따뜻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추정된다. 자공이 제사에서 산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예법을 없애려 하다가 공자에게 이런 말을 듣기도 하였다.
자공이 산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없애자고 한 대목에서 양을 바치는 제사는 곡삭(告朔)이라고 하는, '초하루를 알린다'라는 뜻으로 천자가 매년 마지막 달인 12월에 다음해 열두 달의 초하루, 즉 달력을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고, 제후는 천자로부터 받아온 달력의 초하룻날마다 양 한 마리를 잡아서 태묘에 고하고 천자가 나누어 준 시간을 받들어 시행하겠다고 청하는 제사였다. 달력이라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한 해의 시간의 운행에 대한 것으로 그러한 '시간'(및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사의 모든 연례행사들)을 주관할 권한은 오직 천자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졌다.[14] 공자 당대에는 당연히 천자나 제후의 권위 따위 바닥을 치는 판이었고, 천자나 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곡삭의 예 같은 것은 행해지지 않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양은 잡아 제사하는 의식은 그대로 거행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껍데기뿐인 허례가 맞았다. 따라서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실리주의적이고 잇속에 밝았던 자공으로써는 "요새는 어차피 곡삭도 안 하는데, 부질없이 양만 축내서 뭐하나요?"라는 생각이 나오는 게 당연했고, 이에 대해서 공자가 "너는 양이 아깝겠지만 나는 그 예가 아깝다"고 대답한 것은 곡삭이라는 의례에 담겨 있는 '''천자와 제후 그리고 사대부와 평민으로 이어지는 신분제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공자로써는 더 중요한 관심사라는 취지로 대답한 것이다. 어쩌면 자공이 공자로부터 일부러 이런 대답을 유도하고 꺼낸 말일 수도 있고.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고자 하나 나는 그 예(禮)를 아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