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

 



子路.
(기원전 542년~기원전 4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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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 '지성선현반신상[1]'에 그려진 자로(子路)의 반신상.
1. 개요
2. 공자와 만나다
3. 공자의 평가
4. 죽음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찍이 누군가 증자의 아들인 증서曾西에게 물었다.

"당신과 자로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하겠습니까?"

증서가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말하였다.

"그분은 제 아버지께서도 경외하셨던 분입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편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이다. 공자(孔子)의 핵심 제자 공문십철중의 한 사람. 본명은 중유(仲由)로, 흔히 알려진 이름인 자로는 이다. 계로(季路)라고도 부른다. 공자보다 9살 아래다.
공자의 여행 동안 고난을 함께 하였다. 주로 공자의 호위를 자처하며 시기하는 무리들로부터 공자를 여러 번 지켜내기도 했다. 자공, 안연과 함께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자공이 지(智), 안연이 인(仁)으로 유명하듯 자로는 보통 용(勇)에서 으뜸가는 인물로 꼽힌다. 또한 성격 때문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비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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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 芳年, 1839년~1892년)가 그린 '독서의 달(読書の月)'.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자로의 집안은 본시 가난하였으므로 자로는 어려서부터 나물밥만 먹으며 자랐는데, 그럼에도 자로는 부모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래서, 후일 장성하여 출가한 뒤에 고향집에서 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된 데다가 그 본인조차 끼니 거르기를 자주하는 형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자나 깨나 가난한 부모의 끼니 걱정만을 하였으니, 때문에 어쩌다 쌀을 구하기만 하면 쌀포대를 들쳐업고 백 리의 길을 달려 가 부모를 봉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기록은 二十四孝의 爲親負米(부모를 위해 쌀을 지다.)편에 실려있다.

2. 공자와 만나다


본래 야인(野人) 출신이었으며, 도 셌다. 그 이름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공자의 말에 의하면 자로가 제자가 된 후에는 공자를 험담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자가 강론하고 있는 현장에 뛰어들어 공자에게 행패를 부리려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오늘날 무수히 나오는 '인생의 멘토를 만나 운명이 바뀐 건달' 캐릭터들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2] 그 만남의 일화를 서술하자면 이렇다.[3]
공자가 집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로가 들이닥친다. 더벅한 머리에는 관을 썼는데 꿩의 붉은 깃털을 꽂아 장식했고, 거친 가죽 옷의 옆구리에는 단단히 질긴 끈을 묶어 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와 긴 칼을 찼으며, 양손에는 각각 수탉과 새끼 돼지를 들고 있으니 전형적인 야인(野人)의 모습이었다. 난데없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쳐들어온 자로를 보고 여러 제자들은 당연히 당황하고 경계하는데, 자로가 뭔가 더 돌출행동을 더 하기 전에 공자가 자뭇 능청스레 선수 쳐 질문을 던지며 대화는 시작된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로가 즉답한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공자가 은은히 미소 띠며 천천히 말한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그대가 능한 것 위에 배우기와 묻기[學問]를 더하면 누가 그대를 따라잡겠는가? 나는 이것을 물은 것이다."

자로는 드디어 일갈하기 시작한다. 사실 애초부터 바로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맥락상으로도 잘된 일이다.

"배우고 묻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에 공자가 바로 대답한다.

"군주가 간언하는 신하가 없으면 올바름[正]을 잃는다. 선비가 일깨워 주는 벗이 없으면 들은 바[聞]를 잃는다. 그러므로 길들지 않은 말을 몰 때에는 채찍을 놓을 수 없으며, 활을 잡으려면 도지개로써 바로 해야 한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간언을 들어야 착해진다. 이제 사람에게 가르침과 배움[敎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든[物] 바로잡고 닦고 갈아야 재목으로 쓰이는 것이다. 배우고 묻기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인들 나쁜 일을 하겠는가. 만일 어진 이를 헐뜯고 선비를 미워한다면 필시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배우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로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고, 공 아무개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인물은 아님을 대강 눈치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평소 생각하여 둔 신조가 있고 자존심이 있었으므로 반격을 시도한다.

"남쪽 산의 대나무는 휘지 않고 스스로 곧으니, 이것을 그냥 잘라다가 화살로 쓰면 쇠가죽도 뚫을 수 있다. 천성이 뛰어난 자에게 무슨 배우고 묻기가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공자는 여유롭게 대답한다.

"그 화살 한쪽에다 꿩의 깃털을 붙여다가 깃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다 쇠를 붙여다가 촉을 만들면, 단지 그 쇠가죽을 뚫음에 그치겠는가!"

이에 자로가 즉시 수탉과 새끼 돼지를 내려 놓고 공자에게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감화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설도 있는데 대개 1대1 대결을 벌였는데 공자가 예상 외로 자로를 압도했다거나 , 버티면서 필부의 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설명해주고 더 큰 것을 배우라며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다. 힘이 장사라며 공자도 못 이기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공자부터가 키가 당시로서는 거구인 190cm가 넘는 체구에다가[4], 공자의 아버지는 싸움깨나 한다는 무사였으며 맨손으로 관문을 부쉈다는 언급도 있다. 아예 일대일 대결 부분이 빠진 이야기도 있다.
자로는 공자가 문란하기로 유명한 진후 남자[5]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공자는 '하늘이 보고 있느니라' 란 말로 자신의 결백을 두 번이나 맹세해야 했다. 또한 공자가 두 번이나 읍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다.
자로는 제자라기보다 친구가 아니었나 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으나, 엄연히 자로가 공자를 경어로 부르는 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친구 설이 맞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단, 공자의 제자 중에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이 서술되어 있는 것은 자로뿐이므로 자로와 공자 간의 거리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친밀하고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나이 차이도 10살도 채 되지 않으므로, 공자도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자로를 살갑게 대했던 듯하다.

3. 공자의 평가


자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의 안연편에는 자로는 약속을 다음 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의하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고 일단 배우면 깨우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자로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했는데 또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까 겁냈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할 정도로 열심인 제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혈기왕성한 자로를 자주 꾸짖기도 했지만, 한번 가르치면 충실히 따르는 자로를 몹시 아꼈다.
공자 문하에서는 자공과 함께 제후들의 영입 제의가 많이 들어 온 사람이지만 정작 공자에게 어떤 사람이 자로가 대신감이냐고 묻자 공자는 "아니, 그건 무리"라고 딱 잘라 말했다.[6] 공자가 만족할 정도의 큰 그릇은 아니었다.
논어를 보면 자로는 혼나는 게 일이다. 스승을 위한다고 예법에 어긋나게 높이다 까이질 않나...심지어 칭찬 듣고 좋아한다고 혼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의 용(勇)을 칭찬하니까 좋아서 자신의 신조로 삼고자 그 말씀을 받아적었는데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라는 면박을 들었다.
공자에게 하도 깨져서 나중에 온 어린 제자들까지 자로를 무시하자, 공자는 방안에 들일 정도는 아니라도 마루에 앉을 정도는 된다며 감싸기도 한다.
그래도 공자가 '세상이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며 은거나 할까. 그 때가 되면 나를 따를 이는 유(자로)가 적합하겠지. 유는 나보다도 더 용기있는 인물이니. 다만 사리분별을 못해서 그렇지.' 라고 말할 정도니 재주는 특출나지 못해도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는 사실은 맞는 말 같다. 이 말을 듣고 자기를 스승이 가장 아낀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에구 저 단순한 놈이라며 까서 자로가 의기소침해진다.
그 외에도 공자의 갈굼을 받는 경우가 잦다. 공자가 안회를 칭찬하자 자로가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7]라고 물었는데, 이 때 공자의 대답은 "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 가지 않겠다"였다.
이런 자로도 칭찬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공자가 '낡고 해진 솜옷을 입고 여우나 담비 가죽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 있어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라고 한 것. 그러자 자로는 '원망하지도 않고 탐을 내지도 않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라는 시의 구절을 외우고 다녔다. '''죽을 때까지.''' 그런 자로를 본 공자는 '그 정도의 도를 어찌 훌륭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답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제일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4. 죽음


후에,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위출공의 아비 괴외와 자신의 주공 공회의 반란으로 출공이 쫓겨나자 그 소식을 듣고 성으로 갔다. 가는 길에 동문인 자고가 말렸으나 듣지 않고 "그 녹을 먹은 자 그 난을 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며 성으로 가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주군 공회를 죽일 것을 괴외에게 요구. 주군을 바꾸어 섬기는 이런 자는 쓰지말고 잡아 죽이자고 한다.
괴외가 거부하자 그들이 올라있던 대(臺)를 불태우려다 장공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죽을 때 칼에 맞아 머리에 쓴 갓이 삐뚤어지자 "보라! 군자는 죽더라도 갓은 벗지 않는다!"라고 외치고 갓을 제대로 고쳐쓴 뒤 사망.
공자는 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자로의 강직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예견했다고 한다. "아이고 자로가 죽었겠구나" 라고 했다고 한다. 이전에 자로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고 말았다. 자로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때 공자가 했던 말은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끊어 버리는구나..."라고 두 번 외쳤다. 공자가 제자의 죽음에 절규했던 이야기는 사서에 딱 2번 나온다. 안회가 절명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고 했던 것과 자로의 이것. 자로가 죽은 뒤에는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뒤에, 나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경애하던 스승에 대한 비난을 폭력을 이용해서라도 막았던 자로의 죽음에 대한 탄식이다.
그리고 죽은 후에 젓갈로 만들어져 공자에게 보내져, 후대 2천 년 뒤까지 이어질 공자식인설 떡밥이 되었다. 그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자로만이 아니었건만. 당연하지만 공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집안의 젓갈들을 모두 다 내던져 버리고 멀쩡한 젓갈만 봐도 저 일을 생각하며 입에 대지 못하다가, 결국 자로가 죽은 이듬해 세상을 뜬다.

5. 대중매체에서


"제자백가를 격파하라!"라는 책에서는 단역이긴 하지만, 라이벌을 없애기 위해 유학자들을 습격한 인물들을 검 하나로 다 베어넘기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80년대에 한국, 대만, 일본이 합작으로 제작한 공자전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자 다음가는[8] 덩치를 자랑하며 강직한 성품과 개그 캐릭터의 면모를 뽐낸다. 죽을 때의 모습도 박력있게 쌍검을 들고 자객들 상대로 무쌍을 찍다가 창에 꿰뚫린 상태로 그냥 갓도 아닌 투구를 똑바로 쓰고 죽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첫 등장신에서도 갑옷과 투구를 쓰고 등장했으며,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서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다른 인물들이 위인전 찍고 있을 때 혼자 무협지 찍는 인물이다. 노나라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다른나라로 갈때 공자를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여 습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혼자 옆에 있던 나무[9]를 들고 무쌍을 찍는다.
네이버 웹툰 덴마의 등장인물인 공자의 이름이 밝혀진 후, 지로의 이름에 획 하나만 늘면 공자의 애제자 자로가 되는 것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 至聖先賢半身像,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2] 오늘날 자로가 공자의 3대 제자 중 하나로 추앙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아생전의 일생뿐 아니라 실로 그에 대한 만세의 평가를 바꾼 만남인 셈이다.[3] 아래에 소개된 일화의 원전은 '공자가어'이다.[4] 9척 6촌. 다만 고대엔 도량법이 달라서 170cm 대였을거란 설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당시 평균 키에 비하면 큰 편이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170cm인 쪽이 더 자연스러울 듯. 그러나 어쨌든 사마천의 기록에도 공자의 키가 그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컸던 것만은 분명했던지, 사람들이 공자의 큰 키를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묘사가 있을 정도이다.[5] 南子 위령공의 부인으로 송나라 출생이라 송나라의 성인 子를 위에 붙여 南子라고 부른다. 위령공 사후에도 위나라 정치에 깊이 개입했고 여러 남자를 갈아치우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등 악명이 높지만 의외로 공자를 무척 존경했던 걸로 보인다.[6] 여기엔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한데, 여기서 자로가 대신감이냐고 물은 '어떤 사람'은 계자연이라는 인물로 다름아닌 계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계씨 가문은 예법대로라면 천자의 제사에서만 쓸 수 있는 팔일무를 자기 집 마당에서 추게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며 노나라의 국정을 농단하던 집안으로, 계자연이 자로와 염유가 대신감이냐고 물어본 것도 이미 자로와 염유를 가신으로 등용한 상황에서 자랑하려는 게 의도였던 것. 그래서 공자는 일부러 자로와 염유를 머릿수만 채우는 신하라고 깎아내려서 계씨의 기를 꺾는 걸 의도한 거였다. 출전은 선진편.[7] 술이편[8] 해당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자의 키가 현대 기준으로 190cm대라는 설을 채택해버려서, 풍채가 정말 크고 아름답게 나온다.[9]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그냥 자그마한 묘목 같은 게 아니라 아름드리 통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