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원

 


장종원(張宗源)
생몰년도
1917년 10월 19일 ~ 2012년 10월 29일
출생지
길림성 북간도 용정(龍井)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학력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상훈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독립운동 내용
4. 징역 판결문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17년 10월 19일 길림성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조선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함경북도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만주 유학생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1937년 4월 만주로부터 파견되어 일본에 도항, 동경고등수의학교(東京高等獸醫學校)를 거쳐서 1941년 5월 홋카이도제국대학(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 1943년 9월 동 대학을 졸업했다.
그런데 사실 이로부터 먼저 1943년 7월 만주국 정부 기술관 고등관 시험에 합격해서, 동년 12월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용정(龍井) 재류 당시 조선인은 대개 일본의 통치 밑에 복속하는 것을 꺼려하여 기피하는 사정을 알게되므로부터 점차 민족적 의식이 짙어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도항한 뒤 하숙문제 취직문제 등에 관하여 일본인조선인에 대한 차별 등을 분개하고, 특히 홋카이도제국대학 입학 후 조선독립을 염원하는 동 대학생 임종묵(林鍾默)·향산담(香山潭) 등과 알게 되어 더욱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으며, 또 경제학 공부에 의하여 일본의 압박 정치 밑에 있는 조선농민을 구제하고 조선인의 자유 행복을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완성하는 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임종묵(林鍾默)·손응룡(孫應龍)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태평양전쟁으로 한국에 대한 일제의 통치력이 약화되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의하고, 상호간에 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함과 동시에 독립운동의 실행방법등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5월 12일 일본 북해도 삿포로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한국독립유공자 미국 북가주지회 광복회(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S.F. USA)의 설립의 중심이 되었다.
2012년 10월 29일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2013년 그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독립운동 내용


1942. 9월 일본(日本) 북해도(北海道) 제국대학(帝國大學) 재학시(在學時) 한국인 유학생(韓國人留學生)등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앙양(昻揚)하고 조선독립 실행 방법(朝鮮獨立實行方法)등을 계획(計劃)하다가 피체(被逮)되어 1944. 5월 일본(日本) 북해도(北海道) 찰황지방재판소(札幌地方裁判所)에서 징역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4. 징역 판결문


장종원(張宗源)에 대한 조선독립운동 관계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 판결
1943년 10월 1일
횡빈 지방재판소
예심 판사 재등효차(齋藤孝次)
장종원(張宗源)에 대한 조선독립운동 관계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 판결
판결문
본적 함남 함흥부 만세정(萬歲町) 8번지
주소 북해도 찰황시(札幌市) 북 9조 서(北九條西) 4정목[1]
북촌영차랑(北村榮次郎) 방[2]
만주 유학생 장종원(張宗源) 32세
위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향강국송(向江菊松)의 관여로 심리를 수행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단 미결구류 일수 중 150일을 본형에 산입한다.
이유
피고인은 길림성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조선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만주 유학생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1937년 4월 만주로부터 파견되어 일본에 도항, 동경 고등수의 학교를 거쳐서 1941년 5월 북해도 제국대학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 1943년 9월 동 대학을 졸업한 것인데 이로부터 먼저 동년 7월 만주국 정부 기술관 고등관 시험에 합격, 동년 12월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 예정이었다. 그런데 용정(龍井) 재류 당시 조선인은 대개 일본의 통치 밑에 복속하는 것을 꺼려하여 기피하는 사정을 알게 되므로부터 점차 민족적 의식이 짙어져 반일감정을 품게 되어 일본에 도항한 뒤 하숙문제 취직문제 등에 관하여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등을 분개하고 특히 북해도 제국대학 입학 후 조선독립을 염원하는 동 대학생 임종묵(林鍾默)·향산담(香山潭) 등과 알게 되어 더욱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으며 또 경제학 공부에 의하여 일본의 압박 정치 밑에 있는 조선농민을 구제하고 조선인의 자유 행복을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완성하는 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고 태평양전쟁 수행 도중 일본 국력이 피폐해져서 조선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된 기회를 타서 일제히 봉기하여 소련의 원조 밑에 조선독립을 쟁취하려고 결의하고 이를 위해서 당면 동지와의 결합을 도모하여 상호간에 민족의식의 앙양에 노력함과 동시에 조선독립 실행방법 등에 관한 모의를 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전기 목적 달성에 기여할 것을 기도하였다.
제1. 1942년 9월 경부터 1943년 1월 중순 경까지의 기간에 북해도 제국대학 농학부 교실 등에서 종종 전기 임종묵(林鍾默)외 수명의 조선인 학생과 개별적으로 회합할 즈음에 민족적 입장에서 일본인의 차별대우 조선통치정책의 비위 등 모든 문제에 비판 검토를 가하고 상호간의 민족의식 계몽 앙양에 노력하였는데 그 중에도 이 기간 내 전기 장소에서 수회에 걸쳐서 임종묵에 대하여
(1) 조선인 학생은 다만 이과계통의 공부만을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을 광범하게 연구하여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서 그 지도자가 될 만한 소지를 배양할 필요가 있는 것
(2) 조선인의 개인주의적 성격을 시정하여 단결심의 함양을 도모 장래 조선독립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것
(3) 조선민족의 지도자가 되도록 서로 항상 민중과 휴척(休戚)을 같이하여 정신을 채득 양성할 필요가 있는 것
(4) 자기가 출생한 북간도 및 소련 연해주 방면에 재류하는 동포들은 지극히 왕성한 애국심을 품고 있는 것 등을 역설 강조하였다.
제2. 1942년 9월 경 동 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입학한 만주 파견 조선유학생 손응룡(孫膺龍)과 알게 되어 동인이 열렬한 독립사상를 품고 있는 것을 살핀 이래 1943년 10월 하순 경까지의 기간 찰황(札幌)시 북 9조 서정목 북영관(北榮館) 북촌영차랑(北村榮次郎) 집 피고인 거실에서 종종 회합하고 동인 등과 연락을 계속하였다.
(1) 장래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에는 군함 기타 병기를 필요로 하므로 조선학생은 이공과 계통에 진학하여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는 것.
(2) 조선독립에 대비 조선인 특히 조선여성의 체위향상을 도모할 필요가 있는 것.
(3) 조선학생은 마음을 가다듬고 대학의 소정한 군사교련에 참가하여 조국 국군 수립에 대비하게 할 것.
(4) 조선역사를 연구하고 조선인의 민족적 단결을 도모할 것
(5) 만주에서 파견된 조선유학생을 규합하여 조선독립 지도단체를 결성할 필요가 있는 것.
(6) 피테가 저작한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민족의식 앙양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서적이므로 우인에게도 그 번독을 권장할 것.
(7)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원조를 받든지 또는 소련의 원조를 받을 것이냐 아니냐 등의 모든 사항에 대하여 각기 협의를 수행하고 혹은 그 사이에 동인에 대하여 일한합병 등에 있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압박의 경위, 일한합병 조약문제 등의 해설을 하고 또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조선과 유사한 인구, 면적을 가진 태국·폴란드·덴마크 등의 국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 등을 역설 강조함과 함께 민족문제 연구의 참고서로서 인정식(印貞植) 저≪조선의 농업기구≫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의 연중행사≫ 고전보마(高田保馬) 저 ≪민족 내핍≫ 등의 열독을 권장하여 동인의 민족의식 계몽 앙양에 노력하는 등 제반 활동에 종사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사항 실행에 관한 협의, 기타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것이다.
증거
1. 피고인의 당 공정에서의 공술
1. 피고인에 대한 검사 청취서의 기재
적용법령
치안유지법 제5조 형법 제21조
1944년 5월 12일
북해도 찰황지방 재판소 형사부
재판장 판사 관원이랑(菅原二邱)
판사 송본중미(松本重美)
판사 우염덕차(羽染德次)

[1] 홋카이도대학 정문 바로 앞이다.[2] 北栄館은 숙소로 바뀌어 영업했고, 2008년 기준 폐업하였다. 이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