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가족관계
1. 개요
장쭤린의 가족관계를 설명하는 문서.
2. 부모와 형제들
장쭤린의 아버지는 향리인 장발의 세번째 아들 장유재이다. 장유재는 소씨 부인을 첫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자식을 보기 전에 소씨가 죽었다. 이에 왕씨 부인에게 다시 장가를 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이 장작태인데 18에 병으로 죽었고 차남 장작부는 봉천성 흑산현의 예경총장 벼슬에 올라 마적 토벌을 맡았으나 선통제 즉위 직후에 전사했다. 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어릴 때 양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장유재는 장쭤린이 10세 때 사망했다.
3. 부인들
3.1. 첫번째 부인 조귀계
장쭤린이 처음으로 맞아들인 부인이자 정실부인은 조귀계다. 조귀계는 봉천성 신민현 출신으로 장쭤린과 동갑인데 장쭤린과 조귀계가 결혼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장쭤린이 무일푼의 도박꾼이던 시절 노름에 지고 돈이 없다며 주지 않았는데 화난 노름꾼들이 장쭤린을 나무에 묶어놓고 두들겨팼다. 하지만 장쭤린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마주 욕을 퍼부으며 맞섰다. 이걸 보던 조씨성을 가진 남자가 장쭤린이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여겨 자신의 딸과 장쭤린을 결혼시키려 했으나 조씨 일가들이 무일푼의 장쭤린에게 귀한 딸을 주는 것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세월이 흘러 장쭤린이 벼슬길에 올라 초장에 임명되었을때 장쭤린은 2개월의 휴가를 얻어 조씨 집안을 방문하였다. 장쭤린은 처음에 자신이 그저 놀러온 것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조씨 집안 사람들에게 자신의 훈장과 계급장을 보여주면서 운을 띄웠고 기회를 보아 청혼했다. 이번엔 조씨 일가가 모두 동의하여 장쭤린과 조귀계는 21세의 나이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귀계는 장쭤린 사이에서 모두 2남 1녀를 낳았다. 1898년 장녀 장관영을 낳았으며 1901년 장남 장쉐량을, 1904년 차남 장쉐밍을 낳았다. 1911년 조귀계가 장쉐밍을 데리고 봉천에서 근무하던 장쭤린에게 생활비를 받기 위해 찾아왔다. 식구들이 같이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장쉐밍이 잠에 깨어 울기 시작했다. 화가 난 장쭤린이 장쉐밍을 한대 때렸는데 이것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화가 난 조귀계는 신민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1912년 4월 병으로 사망했다.
항간에는 그녀가 사팔뜨기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정작 발견된 사진에는 정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3.2. 두번째 부인 노수훤
노수훤은 봉천성 북진현 중안보의 사숙 훈장의 딸이었다. 서화에 능하고 미모가 뛰어났는데 우연히 장쭤린이 그녀를 보고 반하여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훈장은 생판 본 적도 없는 외지인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장쭤린이 다시 청하자 이미 결혼한 걸로 아는데 귀한 딸을 첩으로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장쭤린은 둘 모두 정실로 맞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장쭤린이 물러날 생각을 보이지 않자 노씨 집안은 노수훤을 북진현성 안으로 피신시키려 했는데 40리나 떨어진 성으로 가다가 마적단의 습격을 받을 것이 걱정되어 그러느니 차라리 장쭤린을 사위로 맞아들이는게 낫다는 판단을 하고 장쭤린과 노수훤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에 1900년, 장쭤린과 노수훤은 결혼하게 되었다.
노수훤은 장쭤린과 2녀를 두었으며 1907년 장녀 장회영을, 1911년 차녀 장회경을 낳았다. 1912년 조귀계가 죽은 이후 안주인을 맡아 조귀계가 낳은 자식들을 길렀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톈진으로 이주, 장쭤린의 다른 식구들과는 떨어져 살다가 1974년까지 장수했다.
3.3. 세번째 부인 대씨
대씨 부인은 장쭤린이 신민부의 오영통대에 오른 후에 들인 첩이다. 대씨는 북진현의 마적을 토벌하는 포도반 반장의 딸이었는데 굉장히 소문이 난 미녀였다. 이에 1906년 장쭤린이 많은 돈을 주고 네번째 부인 허주양과 함께 아내로 들였다. 하지만 대씨는 돈으로 이루어진 결혼에 불만이 많았고 성격이 사나웠기 때문에 하녀를 구타하고 사사건건 장쭤린에게 대드는 등 장쭤린의 체면을 구기는 일을 했다. 결국 하녀 구타 사건이 터지고 나자 이때 봉천독군의 지위에 있던 장쭤린은 대씨를 불러 공개적으로 꾸짖었는데 화가 난 대씨는 남동생을 불렀다. 대씨의 남동생은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대씨가 장쭤린과 결혼한 덕에 봉천독군 장군부 경호원으로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대씨는 남동생에게 장쭤린에게 혼이 난 일을 하소연했는데 역시나 화가 난 남동생은 즉각 길거리로 나와 권총을 쏘아 길거리의 가로등을 모두 부숴버렸다.
이후 봉천성 전기관리국은 가로등을 쏘아 부순 사람을 조사하여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이에 화난 장쭤린은 경호대장에게 즉시 처남을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경호대장은 장쭤린이 홧김에 죽이라고 명령한 것으로 생각하여 총살형을 집행하지 않고 잠시 미루었다가 며칠 후에 장쭤린이 기분 좋을 때를 골라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버럭 화를 냈다.
이걸 알게 된 대씨가 울고불면서 동생을 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장쭤린은 단호히 거절했다."너,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거야? 그렇다면 즉각 너부터 총살시켜야겠다!"
결국 대씨의 동생은 총살당했고 이후 대씨는 장쭤린과 싸우고 집을 나가 비구니가 되었다. 이후 1916년 어떤 절에서 우울증을 앓다가 죽었다."내가 당신 동생을 죽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고향의 어르신이나 친척을 비호할 수 없다. 동북의 수장으로 친척의 불법을 눈감아준다면 무슨 낯으로 국가와 민족을 논하겠는가!"
3.4. 네번째 부인 허주양
허주양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처녀였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반한 장쭤린이 1906년 강제로 학업을 중단시키고 대씨와 함께 자신의 첩으로 들였다. 이후 집안에서 사숙을 열어 독학하여 학식을 쌓았고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톈진으로 이주했으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국으로 이민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자 귀국했고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여 팔보산 열사공원에 안장되었다.
장쭤린과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1911년에 장남 장학증, 1916년 차남 장학사, 1909년에 장녀 장회동, 1913년 차녀 장회희를 낳았다.
3.5. 다섯번째 부인 수의
수의는 흑룡강성 독군 수산의 첩인 왕씨의 딸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성을 따서 왕아군이라고도 불렀는데 중학교를 졸업하여 당대 여성 중에서는 지식 수준이 높았다. 장쭤린이 반하여 1906년에 첩으로 들였다.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았기 때문에 장쭤린의 총애를 받았으며 덕분에 원수부의 안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927년 장쭤린이 대원수로 추대된 이후에 장쭤린에게 제의하여 그전까지 X씨로 불리던 장쭤린의 부인들을 일괄적으로 부인으로 존칭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장쭤린은 이를 들어주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여섯번째 마 부인과 함께 톈진으로 이주하였으며 1948년 상하이를 거쳐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1966년 병사했고 가택연금 중인 장쉐량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어 생일 때마다 장쉐량의 문안을 받았다고 한다.
장쭤린과 4남을 두었는데 1920년에 장남 장학삼, 1922년 차남 장학준, 1924년 삼남 장학영, 1925년 사남 장학전을 낳았다.
3.6. 여섯번째 부인 마악청
마악청은 톈진의 악극단에 팔려서 노래를 하는 배우 출신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장쭤린의 눈에 들어 장쭤린이 마악청을 수의의 하녀로 원수부에 데려왔고 잠시 하녀로 두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작은 엄마란 뜻의 '이랑'으로 불렸는데 1928년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철수할 때 같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황고둔 사건에 휘말려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에 수 부인과 함께 톈진으로 이주했고 1948년 수 부인과 함께 타이완으로 떠났다. 1975년에 70세로 사망했다.
장쭤린과는 딸 장회민을 두었다.
4. 자식들
4.1. 아들들
4.1.1. 장남 장쉐량
해당 문서 참조.
4.1.2. 차남 장쉐밍
해당 문서 참조.
4.1.3. 삼남 장학증
1911년 출생.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으며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정부 비서처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장여황은 화학을 공부하여 미국 석유개발공사 연구원으로 일했고 차남은 미술을 공부했다.
4.1.4. 사남 장쉐쓰
해당 문서 참조.
4.1.5. 오남 장학삼
1920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항공학을 배웠고 중일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여 국민혁명군에 입대, 소교 계급을 받았다. 이후 톈진 경비사령부 비서를 지냈으며 1948년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나 다시 하와이로 이민가서 항공회사에 근무했다. 1995년 8월 30일 부인과 세명의 딸을 거느리고 중국을 방문, 베이징에서 열린 중일전쟁 승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으나 9월 8일 갑자기 사망했다.
4.1.6. 육남 장학준
1922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40년대에 베이징의 보인대학을 졸업했고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민혁명군에 입대했다. 1948년 타이완으로 이주했다가 영국령 홍콩으로 옮겼다. 1950년대 말에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왔으나 평생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다가 1983년 타이완에서 자녀도 없이 죽었다.
4.1.7. 칠남 장학영
1924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국부천대 시에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나 다시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하여 빈곤 속에서 죽었다.
4.1.8. 팔남 장학전
1925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톈진으로 이주했고 1943년 동북의 공산당 점령 지역으로 이동하여 영구시 세무서에서 일했다. 톈진이 인민해방군에게 점령된 후 세무서를 관두고 톈진으로 돌아갔다. 1960년 저우언라이의 허락을 받아 톈진시 55중학에서 일하였다. 이후 톈진시 정협위원에 선출되었다.
유치원 교사 마온란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1녀를 두었다. 1992년 사망했다.
4.2.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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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장녀 장관영
1898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흑룡강독군 포귀경의 아들 포육재와 결혼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톈진으로 이주했다. 중일전쟁 종결 이후 심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베이징에서 살았다. 1954년 사망했으며 포육재와의 슬하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4.2.2. 차녀 장회영
1907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1921년 5월 장쭤린이 몽강경략사에 취임한 이후 내몽골의 친왕 다얼한의 아들 바오푸와 결혼했다. 하지만 바오푸가 선천적인 저능아라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고 1928년 황고둔 사건 이후 바로 이혼하여 외교부장 대리 진록지의 아들 진우수와 결혼해 상하이에서 살았다. 이후 톈진으로 이주하여 동생 장회경과 살다가 국공내전이 발발하기 전에 사망했다.
4.2.3. 삼녀 장회동
1909년 봉천에서 태어났다. 전 동삼성 총독을 지낸 조이손의 아들 조천사 박사와 결혼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4.2.4. 사녀 장회경
1911년 출생. 장훈복벽의 주인공인 장쉰의 아들 장몽조와 결혼했으나 장몽조가 신경기능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이혼했다. 이후 강병옥과 재혼하여 톈진에서 살았으며 톈진시 정협위원을 지냈다.
4.2.5. 오녀 장회회
1913년 출생. 국무총리 진윈펑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1928년 황고둔 사건 이후 이혼했다. 중일전쟁 이후 모친인 허주양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서 워싱턴에서 거주했다.
4.2.6. 육녀 장회민
1924년 태어났다. 베이징 보인대학을 졸업했고 전 봉천성장 적문선의 손자인 기술자 적원곤과 결혼했다. 1948년 모친 마악청과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며 타이베이 사범대학과 타이완 보인대학 교수를 지냈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5.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