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1. 개요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 중국에서는 7.7 사변(七七事变)이라 부른다. 이 사건의 배경이 된 '루거우차오(卢沟桥, Lúgōu Qiáo)'는 베이징 시에 있는 다리의 이름으로,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노구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선 마르코 폴로가 이 다리를 언급했던 탓에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른다.
2. 배경
청나라와 북양정부의 수도이자 북방 최대의 도시인 베이핑 근처에는 의화단 운동 이후의 신축조약의 영향으로 1,80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한 이후 국민정부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겠다는 수약외교를 선포하자 각 열강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고 군대를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하였지만, 일본만은 완강하게 조약 개정을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 이후 당고정전협정, 하매 협정, 진토 협정을 거쳐 군대를 5,600여명까지 증강시켰다. 이들은 톈진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하북의 요충지에 병력을 주둔시켜 언제라도 허베이 성을 침탈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베이핑 서남쪽에 연결된 루거우차오는 베이핑과 용딩 허(永定河)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베이핑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베이핑을 3방면에서 포위하고 베이핑의 안보를 위협하자 진토 협정에 따라 차하얼성에서 철수하여 허베이 성으로 이동한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제29군이 평진지역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29군 산하에는 4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3개 독립여단 등 8만의 병력이 있었으며 그외에 차하얼에서 허베이 성 전역에 걸쳐 동북군 잔여세력, 옌시산 세력, 펑위샹 잔여세력 등을 합쳐 총 23만명의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루거우차오 서쪽은 일본군이, 동쪽과 완평현성은 풍치안의 37사단이 수비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길성문의 21구단이 루거우차오의 수비를 담당했다.
한편 국민정부와 일본 제국 사이의 최후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하여 루거우차오 인근에서 연일 군사훈련을 벌이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풍대에서 루거우차오에 이르는 6천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구입하여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으나, 지주들은 일본군이 막대한 금액을 불러도 땅을 팔지 않고 저항했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한편, 훈련 빈도를 더하여 중화민국을 더욱 도발하였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6월 6일 "일본 쪽에서 적극적으로 친선을 구하는 것은 배일, 매일의 태도를 증가시킬 뿐이므로 차라리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육군 중앙에 상신하였으며, 6월 16일 동북에 2만명의 일본군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6월 25일 루거우차오에서 장기 훈련을 실시하였다.
3. 전개
3.1. 총성과 일본군 병사의 실종(?)
그러던 중 1937년 7월 6일, 풍대에 주둔하고 있던 지나주군둔 제1보병연대 3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1] 가 500명의 일본군을 지휘하여 중국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루거우차오 동북쪽의 황무지의 중국 관할 구역을 침입하여 실탄 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에 중국군은 긴장하여 완평현성에서 대책을 논하며 일본군이 중국군 기지 100미터 안에 진입할 시에 대응사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행히도 7월 7일 밤까지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치키 소좌는 훈련을 끝내고 철수하기로 결정해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7일 밤 10시 40분, 용왕묘 방면에서 수발의 총성이, 제방 방면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울리자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 대위는 즉각 병사들을 집결시켜 점호를 실시했다. 점호 결과 기병 척후병인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미즈 대위는 이것을 중국군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이치키 소좌에게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7월 8일 0시에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 대좌에게 병사가 실종되었다는 오보가 올라갔고 무타구치는 즉각 병력을 출동시키고 완평현성에 주둔한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7월 7일 심야, 29군 부군장 겸 베이핑 시장 친더춘에게도 일본군 병사 한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기찰정무위원회 외교위원회 주임위원 위종한, 전원인, 임경우가 친더춘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당시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이 휴가를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베이핑 시장 친더춘이 쑹저위안을 대신하여 베이핑의 군정대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쑹저위안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지금 일본의 특무기관장 마쓰이가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가 중국군에게 사격을 받아 1명이 행방불명된 일의 조사를 위해 완평현성에 들어와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구교는 중국 영토이며, 일본군은 우리 측의 동의도 없이 연습을 행하여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범하고 있다. 이는 국제법 위반이며 행방불명된 일본인 병사에 대한 우리 측의 책임은 없다. 더구나 일본군이 성 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단, 양국의 우호를 생각해 날이 밝으면 우리 측 군경에게 조사시키겠다고 회답하도록."
3.2. 중일교섭
7월 8일 오전 2시, 마쓰이는 친더춘에게 완평현성 안에 조사를 실시하게 해달라고 다시 요구하는 한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으로 완평현성을 포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친더춘은 완평현장 왕렁자이, 외교위원 위종한을 파견하여 교섭하게 했다. 왕렁자이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219단 단장 길성문과 37사단장 풍치안에게 요청하여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평현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8중대 전원도 심야에서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문제는 실종된 병사는 점호 20분 후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2] 이미 복귀한 병사가 수색한다고 나올리도 없었고 문제의 병사조차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는''' 코미디 영화를 방불케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뒤늦게야 문제의 병사가 복귀한 것을 알게 된 시미즈 대위는 병사의 명예를 위해서 차마 보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상부에 알리지 않았다.
한편 일본군 공병대의 공작으로 베이핑과 완평현 사이의 전화선이 절단되어 불통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오전 3시 30분, 길성문은 일본군 보병 4,5명이 산포와 기관총을 가지고 풍대에서 노구교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합동 조사를 위해 자동차를 타고 완평현성으로 이동하던 왕렁자이는 300명의 일본군이 대형 자동차를 타고 출동하는 것을 확인했으며 완평현성 동북쪽의 사강 지역에서 다수의 일본군이 배치되어 전투 상태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친더춘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길성문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왕렁자이와 임경우가 완평현성 안으로 들어오자 무타구치 렌야가 갑자기 면담을 요청했다. 왕렁자이를 만난 무타구치는 사건을 해결할 권한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별것 아닌 사건을 과장해서 취급하는 등 트집을 잡아댔다. 새벽 4시, 완평현성 내부의 행정감찰전원 공서에서 완평현장 왕렁자이, 하북성 주석 겸 37사단장 풍치안, 베이핑 시장 겸 29군 부군장 친더춘이 일본측과 교섭하기로 하였다. 일본측 대표로는 일본군 특무기관장 마쓰이 대좌, 기찰정무위원회 고문 사쿠라이 도쿠타로 중좌가 배석했다. 풍치안이 먼저 문제의 장소에는 중국군이 없었으므로 중국군이 발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제야 마쓰이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루거우차오 및 완평현성을 고수하라. 국토의 방위는 군인의 천직이다. 완평형성, 루거우차오를 우리 군의 가장 영광스러운 분묘로 삼으라. 그러나 일본군이 발포하기까지는 절대로 쏘지 마라. 일본이 만일 먼저 발포하면 이에 응수해 공격하라."
이에 완평현장 왕렁자이는 "그런 문제라면 행방불명병 자신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더욱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면 쌍방에서 조사원을 파견하면 될 일 아닌가."라고 반박했지만 마쓰이는 완강하게 쌍방 합동 조사를 요구했다. 도쿄에서 보고를 받은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서 현지에 해결의 일임을 맡기는 등 어쨌거나 일본군 스스로 생각해도 워낙 황당한 일이라 별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자."
3.3. 무타구치 렌야의 역습
한창 협상이 진행되던 와중인 새벽 4시 20분, 갑자기 무타구치 렌야가 현장에 출동해 있는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의 3대대에게 즉각 중국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중일 대표들이 만나 교섭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이치키 소좌는 당황하여 "정말 공격해도 좋습니까?"라고 전화로 되물었지만 무타구치는 "정말 해버려도 좋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중국군을 공격할 것을 재차 명령했다. 이에 새벽 4시 50분, 일본군의 포격이 시작되어 평한철도의 중국군을 상대로 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평한철도의 중국군 초소를 기습점령한 일본군은 일문자산과 용왕묘를 공격했다. 용왕묘에는 이미 중국군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30분 만에 철수했다.
이어 일본군 300명이 용왕묘 부근에서 영정하를 도하하여 장시점을 공격하려 했으나 중국군은 장신점에서 4시간 동안 반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완평현성도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여 1시간 동안 쌍방이 총격전을 벌였다. 장신점 점령에 실패한 일본군은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하였으나 중국군에게 완평현성을 비우고 철수할 것을 막무가내로 요구했다. 중국군이 거부하자 일본군은 다시 공격에 들어갔다. 정오 즈음에 일본군이 계속 증강되어 일본군은 연대 규모의 병력을 갖추었으며 장갑차 6대의 지원을 받아 장신점에 대한 돌격을 감행했으나 중국군은 이를 격퇴했다.
이 황당한 상황에 사쿠라이 중좌가 일본군의 공격을 일단 중지시키고 직접 완평현성에 들어가 왕렁자이와 담판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무타구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오후 5시, 무타구치가 직접 루거우차오에 나타나 왕렁자이와 길성문에게 사쿠라이 중좌를 내보내고 성안의 모든 중국군과 중국인들을 영정하 서쪽으로 소개하라고 요구하며 만일 이를 받아들인다면 일본군은 영정하 동안으로 철수하겠지만 따르지 않으면 즉각 포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왕렁자이가 무타구치의 요구를 거절하자 무타구치는 "황군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자."라면서 6시에 완평현성에 대한 포격을 지시했다. 그리고 기자들을 불러모아놓고 피묻은 붕대를 감아서 중국군의 도발을 격퇴했다면서 자신의 용맹성을 선전하는 생쑈까지 벌였다.(...) 여담으로 이 싸움의 발단이 된 실종되었던 병사는 시미즈 대위가 7월 8일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는 이유로 용서해줬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평현성 내부의 전원공서 건물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군 219단 2중대는 이 상황에서도 권총, 대도, 수류탄으로 무장한 특공대를 투입하여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괴멸시키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7월 8일 하루 동안 쌍방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며 일본군 10여명이 사상했으며 중국군은 20명이 전사, 60여명이 부상당했다. 자신의 명령 없이 교전이 실시된 것을 안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 소장은 격분하여 현장에 출두하였으나 무타구치의 월권 행위를 막기는커녕 이를 구경만 하다가 돌아갔으며 무타구치는 가와베가 자신의 결단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했다. 물론 가와베는 그런 적 없다고 반박했는데... 어쨌거나 이미 군의 정상적인 명령계통이 붕괴된 추태였다.
이날 오후 6시, 고노에 수상이 각의를 소집하여 사태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켄기치와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이러한 중앙의 결의를 무시하고 1혼성여단과 11혼성여단을 출동시켰고 조선군도 이에 호응하여 20사단을 급파하여 7월 11일 산해관에 전진배치시켰다. 또한 츠지 마사노부가 루거우차오에 직접 파견을 가서 "관동군이 뒤에서 밀어줄 테니 걱정 말고 마음껏 저질러라."라고 무타구치를 선동했다. 심지어 직접 폭격기를 몰고 중국군을 폭격하라고 요청하겠다고 했으나 상부의 거절에 단념하기도 했다. 이를 보고 지나주둔군 참모들이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3.4. 마쓰이-친더춘 협정
한편 낙릉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쑹저위안은 장자충, 풍치안, 친더춘으로부터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한 급보를 받게 되었다. 쑹저위안은 일본군이 완평현성에 포격을 가했다는 말에 극도로 분노하여 완평현성을 사수하고 있던 길성문에게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사태가 확전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장자충과 풍치안에게는 "반드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회를 보아 대처하여 위기를 피해야 한다. 지금 일본이 아직까지 중국에 대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약간의 양보를 표시하여 가능하다면 국부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침을 하달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졌을 때 정치위원회 주석 왕징웨이와 함께 중국 국민당 하계훈련단을 주최하고 있던 장제스는 7월 8일 친더춘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격노하여 쑹저위안에게 항전을 지시했다.
또한 제2집단군 사령관 유치와 군령부장 쉬융창에게 카이펑 이서의 부대 중 1개 사단을 파견하여 황하 이북으로 이동시키고 카이펑, 정저우에 차량을 집결시켜 2개 사단 이상의 부대가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또한 40군 군장 방병훈에게 정태로에서 스좌장으로 진출해 협동작전을 벌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완평현성을 고수하라.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된다. 전원을 동원하여 사태 확산에 대비하라."
한편 일본의 육군 중앙부는 참모본부 작전과, 지나과, 육군성 군사과를 중심으로 사태를 확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금이야 말로 화북 5성을 제2의 만주국으로 삼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장 이시와라 간지와 참모본부 전쟁지도과, 육군성 군무과는 대 소련 군비 전념을 위해 중국과의 전쟁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7월 6일의 각의에서 더 이상 사태를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반발한 육군상 스기야마 하지메의 반발로 7월 8일 야간에 다시 각의가 소집되었다. 스기야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또한 스기야마는 3개 사단의 증파를 주장했으나 해군상 요나이 미쓰마사가 반대하여 파병안은 보류되었고 일단 사태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방침을 재확인했다. 참모본부는 육군참모총장의 명의로 지나주둔군에 "사건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자발적인 무력행사를 피하라."라는 400호 명령을 하달했다. 7월 8일 오후, 베이핑에서 친더춘과 지나주둔군 참모장 하시모토 소장 사이에서 정전 교섭이 진행되었다. 일본군 특무기관장 겸 기찰정무위원회 고문 마쓰이 다쿠로 대좌도 기찰당국에 실종된 병사는 이미 부대로 복귀하였는데 오해가 있었으므로 평화적인 해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새벽, 친더춘은 마쓰이와 3개항을 구두 합의하였다."이번 사건은 중국군의 계획적인 도발임에 틀림없기에 자위권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의 반일사상에 있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기에 확실히 눌러놓아야 한다."
- 1. 쌍방은 즉시 총격을 정지한다.
- 2. 일본군은 풍대로 철수하고, 중국군은 루거우차오 서쪽으로 물러난다.
- 3. 완평현성 안의 방비는 중국측의 별도의 보안대 2~300명이 전담하기로 하고, 9일 오전 9시부터 임무에 들어간다.
- 1. 29군 대표는 일본군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여 장래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한다.
- 2. 풍대의 일본군과 인접한 완평현성 및 용왕묘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지 않으며, 보안대가 치안을 유지한다.
- 3. 항일단체를 철저히 단속한다.
4. 결과
쑹저위안은 톈진으로 돌아온 이후 사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여 7월 12일 "이번 루거우차오에서 발생한 사건은 동아시아의 불행이지만 국부적인 충돌은 언제나 해결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예하부대에 7월 14일부로 계엄령을 해제하고 열차를 정상운행하라는 지시를 하달했으며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일본군에게 통고했다. 7월 14일, 장자충, 치셰위안, 진각생이 쑹저위안의 대표로 지나주둔군 참모장 하시모토 군 소장과 회담했다. 기찰당국은 일본군이 제시한 즉각적인 철병, 항일분자 단속, 길성문의 처벌에 동의하였다. 이어 친더춘이 중국 대표로 일본에 사과하였고 베이핑의 방어는 37사단에서 38사단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더 이상 일본의 침략을 묵과할 생각이 없었고, 신속하게 일본에 대한 항전 준비에 착수했다. 이를 본 일본군도 적반하장으로 이것이 일본을 업신여기는 증거라고 날뛰면서 일본군의 파병을 결정, 화북전역이 개막함에 따라 양국은 운명을 건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5. 여담
5.1. 진상은 무엇인가?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총성에 대해서는 양국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일본은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중국은 '우리가 쏜 게 아니라 일본 쪽 진영에서 들리던데?'라는 식. 병사의 실종에 대해서는, 병사가 설사를 하러 간 것이 진상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사실 해당 병사에 대한 추궁을 아무도 안 해서 그 원인은 미상이다. 이 때문에 요즘에 조사를 충실히 한 서적에서는 그냥 잠시 실종되었다가 복귀했다 정도로만 적고 있다. 실종 원인에 대해서는, 성매매를 하러 갔다는 설도 있고, 훈련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넘어지는 바람에 기절(...)했다는 설도 있다. [3]
또한 전투에 들어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일본은 '중국측의 사격 이후 실종된 병사의 수색에 중국이 합의를 했음에도 그 후 또 한 번 중국측의 사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전투에 들어갔다', 중국은 '애초에 그딴 거 합의한 적도 없는데 일본군이 수색을 구실로 부대를 끌고서 쳐들어오길래 반격했다'. 결국 일본에서는 중국군의 우발적 발포로 원인을 돌리고 있고, 중국에서는 싸울 구실을 찾기 위한 일본측의 자작극으로 보고 있는 추세다.
5.2. 음모론
일본 극우파 측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음모라는 식의 주장도 내놓고 있다. 가사이 준이치라는 사람이 중국 공산당 음모론의 대표적 인물로, 그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에서 "루거우차오 사건은 류사오치의 지시로 이뤄진 것이다"라고 쓰여진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가사이가 자기가 봤다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 실물을 내놓지 못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치부되고 있다. 뭣보다도 노구교에서 벌어진 총성은 부차적인 것이고 결정적 원인은 미쳐 날뛴 무타구치 렌야, 방관한 가와베 마사카즈[4] , 그리고 폭주한 일본 육군 주전파 등이 문제니까 누가 총 쐈는진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반면 중국측의 사격이란 것도 일본의 조작이었단 음모론이 있다. 노구교 사건 직후 어느 장교가 대지일격론을 주장하던 장교와 대화하던 중 상대로부터 중국측의 사격은 중국의 항일 학생들의 사격이었단 말을 듣게 됐는데, 무심코 그 '항일 학생'들은 당신들이 사주한 거고?라고 되물었는데 상대가 움찔 놀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하지만 문제의 사격 자체는 적어도 일본군이 조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5.3. 기타
이 사건에서 얼굴을 내민 가와베, 무타구치, 이치키는 이후로도 일본군의 남방전선에서 활약(?)한다.
중국에서 29군은 과거 열하사변부터 항일대도를 실전용으로 사용한 부대로 유명하며, 맥신이라는 사람은 1937년에 이 루거우차오에서 소총이랑 대도만 들고 일본군과 맞서는 것을 보고 '대도진행곡'을 썼다. 해당 문서 참고.
또 독립운동가이자 국민혁명군 참전자이기도 한 김자열(金子烈)이 이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29군 소속으로 싸운 적 있다.
6. 매체에서
대만 영화 '호소자 2'에서 산 속에 살면서 할아버지에게 무술만 수련받아서 상식이나 역사는 도무지 모르는 세 손자를 타이베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던 할머니가 아이들을 교장에게 데려다주는데, 교장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7월 7일에 벌어진 사건을 토대로 벌어진 전쟁이 뭐냐?"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한 손자가 "초류향이 싸움을 벌여 이긴 날이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답변을 하여 교장을 뒤집어지게 한다(...)
쓰르라미 울 적에 마츠리바야시 편에서 히나미자와 증후군 연구를 반대하는 세력이 나오는데, 다름아닌 '''루거우차오에서 히나미자와 출신 병사가 복무했기 때문.''' 만약 히나미자와 증후군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중일전쟁 개전의 책임이 완벽하게 일본측에 돌려진다면서 연구를 반대하는 논리가 성립된다. 일본에서는 중국군의 우발적 발포를 원인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소재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 FPS 광영사명에서 2015년 9월 1일에 승전 70주년을 맞아 루거우차오 사건을 다룬 코옵 모드가 업데이트 되었다. 지금까지 매체에서 나온 닥치고 돌격하는 일본군이 아닌 굉장히 천천히, 신중하게 수색에 임하는 일본군의 움직임이 포인트. 국민혁명군 29사단은 그저 뒤쪽의 배경으로만 나오는 주제에 군장 재현만은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호이4에서 이벤트로 구현되어 있다. 일본측에서 황도파 숙청 루트를 선택한 후 국가집중으로 일으킬 수 있으며 이때 중국은 화북 지역을 일본군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방지할 수 있으며 만약 영토 할양 요구를 거부하면 즉각 중일전쟁이 터진다.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기 전에는 영토를 할양해도 바로 쳐들어오는 인성터진 일본 AI의 만행 때문에 영토 할양을 하는 것이 미친 짓이었지만 이제는 영토 할양 후 휴전상태에 들어가서 대개 1938년 봄까지는 시간을 벌어준다. 하지만 십중팔구 일본은 바로 중국에 전쟁 클레임을 걸어서 중일전쟁은 시간문제가 되는데 어차피 전쟁 터질거 전선이 좁아 방어하기 쉬운 하북에서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해 영토 할양을 거부하는 플레이가 선호되는 편이다.
카르마 온라인 노구교(蘆溝橋) - 팀데스매치
7. 참고 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쇼와사 1권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8. 관련문서
8.1. 30년대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8.2. 중일전쟁
[1] 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900명을 잘 정비된 미군 진지로 몰아넣어 전멸시킨 그 이치키 지대의 이치키 대좌.[2] 일반적으로는 문제의 병사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용변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근래에 들어서 정체불명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3] 이 2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 때문에 용변 때문에 늦었다는 설이 신빙성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절했다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에 복귀했고 성매매하러 갔다기에도 너무 애매한 시간이다. [4] 여담으로 이 사람은 훗날의 행적도 비범(?)한데,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임팔 작전을 렌야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유로 승인해줬다. 즉 임팔 작전의 책임은 렌야 다음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