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쉐쓰
1. 개요
봉천군벌의 수령 장쭤린의 4남. 만주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2. 생애
1916년 선양에서 장쭤린과 장쭤린의 넷째 부인 허주양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에서 왕서경의 가르침을 받아 진보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920년 9월, 장쭤린은 직예군벌의 수령 차오쿤의 딸과 장쉐쓰를 약혼시켰으나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면서 파혼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어머니 허주양을 모시고 톈진으로 이주했다. 1933년 4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7월 장쉐량의 추천으로 중앙군사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장쉐량과의 연계를 의심받아 긴급체포되었다. 12월 25일 석방되었으며 1937년 1월 중앙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톈진으로 돌아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후 상하이로 돌아가 장쉐량의 부인 조일적과 함께 절강성 봉화에 연금되어 있던 장쉐량을 문안했으며 1937년 8월 공산당에 합류했다.
1938년 10월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옌안으로 이동, 마르크스-레닌 학원에서 공부했다. 1939년 9월 마르크스-레닌 학원을 졸업하고 항일 군정대학 3분교 동북 간부대 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연안여자대학교 학생 사설평에게 반하여 1940년 결혼했다. 1941년 9월, 동북 간부대를 이끌고 차하얼, 산서, 하북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했고 하북 군수사령부 참모처장, 군수부 참모장, 진찰기 군수 참모처장, 평진분구 부사령관 겸 참모장을 지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10월 부대를 인솔하여 심양을 공격했고 1946년 10월 요녕성 정부주석 겸 군구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동북행정위원회 부주석 겸 요녕성 사무처 주임 등을 역임했다. 1949년 9월 1회 전국 정협에 참여, 11월 중국 인민해방군 제1해군학교 부교장 겸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1953년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령부 해군 부참모장에 임명, 1955년 해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956년 8월 소련의 레닌그라드로 유학, 보로실로프 해군학교에서 공부했다. 처음에 소련 측에서는 장쉐쓰가 대군벌 장쭤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으나 저우언라이의 후원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2년 간 유학한 후 1958년 졸업하여 귀국, 해군 제1참모장을 거쳐 1961년 3월 해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펑더화이 숙청 직후 새로 국방부장이 된 린뱌오가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와 갈등을 빚었다. 1965년, 저우언라이는 장쉐쓰에게 국방부 조선산업부로 전근가서 화를 피할 것을 권유했으나 장쉐쓰는 거절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고 얼마 안되어 동북방패당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배후로 지목되어 린뱌오의 명령으로 체포되었고 1967년 모필유라는 가명으로 북교위수구에 주둔한 대대에 10평도 안되는 작은 방에 갇혀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자신이 수감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장쉐쓰는 중국 해군당위원회와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투옥된 이유를 물었으나 저우언라이와 중국 해군 당국은 모두 장쉐쓰의 편지를 묵살했다.
1968년 2월 18일, 장쉐쓰는 결핵, 심장병, 위중한 영양실조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중병에 걸려있음이 확인되었음에도 당국은 장쉐쓰를 도로 감방으로 되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장쉐쓰는 죽기 직전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 삶은 감자를 먹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이 역시 묵살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생하던 장쉐쓰는 1970년 5월 29일 감옥에서 5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가족사항
부모형제에 대해서는 장쭤린/가족관계 문서 참조. 사설평과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고 자녀들은 현재 베이징과 홍콩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4.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