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복벽
1. 소개
장훈복벽은 중국의 군벌 장쉰이 1917년 7월 1일 베이징을 점령하고 신해혁명으로 멸망한 청나라의 부활을 선포하고 선통제를 복위시킨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그의 복벽은 11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정사복벽이라고도 한다. 그냥 복벽(푸비)라고 부르는 건 대개 이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2.1. 종사당의 복벽 운동
1913년 10월 10일,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독재 권력을 강화하며 황제 즉위를 꿈꾸었고 1915년 12월 12일 추대의 형식으로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1916년을 홍헌원년으로 선포했지만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주도한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고 얼마 후인 6월 6일 사망했다. 위안스카이가 나라를 들쑤셔 놓은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중화민국은 군웅할거의 난세로 돌입했다.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득세하여 자신들의 독립 왕국을 꾸려나가는 동안 멸망한 청나라의 옛 황족들은 제국을 복고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꾀하고 있었다. 선통제가 퇴위하기 직전인 1912년 1월 12일 청황실 왕공와 친귀들이 모여 종사당을 조직하고 황위의 유지를 목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군주제 유지를 주장하는 조직을 만들어 공화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벌였으나 선통제는 그해 2월 12일에 퇴위하였다.
하지만 300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청나라 황실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숙친왕 등은 다렌에서 일본과 결탁하여 만몽을 독립시켜 그곳에서만이라도 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베이징, 다롄, 칭따오, 상하이 등지에서 복벽당이 준동하여 직예성[1] , 산동성, 호북성과 만주에서의 왕정복고 움직임을 꾀했다.
이들 복벽당은 초기엔 위안스카이를 설득하여 그의 손으로 황실을 복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 황제의 스승을 비롯한 복벽당 인사들은 1914년 8월 31일에 쉬스창에게 복벽을 청했고 황실 복벽론자들을 규합해 언론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하여 복벽주의자들을 처벌하고 11월 23일 복벽주의의 주장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복벽주의는 잠시 수그러들었으나 위안스카이가 황제병에 걸려 칭제를 하려 하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선포했다가 12월 25일 호국전쟁에 직면했고 몇 달 만에 전국각지에서 호응하는 독립선포가 이어졌다.
위안스카이가 궁지에 몰린 상황을 틈타 쉬스창, 장쉰 등은 선통제의 복벽을 시도하였다. 청 황실을 복벽하여 제국을 연 다음에 위안스카이가 총리가 되면 현재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민당의 무리가 조용해질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은 이들과 동조했다가 만일 실패하면 민국에서 청나라 황실에 약속한 특권(자금성과 예산 지원 등)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하여 그들의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았다.
2.2. 장쉰의 복벽 운동
복벽론은 변법자강운동을 이끌던 거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한편 캉유웨이는 1916년 4월 4일 국가의 안정을 위해 공개적으로 복벽을 주장했고 량치차오는 5월 8일에 캉유웨이의 주장을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비판했다. 두가지 중요한 논쟁이 촉발되었는데, 1. 우선 중국인들이 민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국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위안스카이의 칭제 반대 운동으로 입증되었으며 2. 군주제는 혁명을 촉발함으로 황실을 위기로 몰아넣으니 오히려 황실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한편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펑궈장은 17개 성의 대표를 난징에 초청하여 위안스카이 퇴위 후의 체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대안으로 청나라의 복고도 제기되었다. 이때 장쉰은 위안스카이가 죽은 다음날인 6월 7일에 장쭤린에게 전보를 보내 선통제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했다. 6월 9일 난징 회의가 끝나자 장쉰은 직예, 호남, 안휘, 봉천, 길림, 흑룡강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1차 서주 회의를 열고 복벽을 주장했다.
6월 28일 위안스카이의 영구가 그의 고향에 안장되자 북양군벌 지휘관들은 위안스카이 문상을 위해 모인 김에 비밀 회의를 열었다. 쉬스창을 의장으로 하는 이 회의에서 북양군 지휘관들은 모두 복벽에 찬성했다. 하지만 복벽주의의 목소리 사이로 남방에선 제제(帝制= 군주정)를 주장하는 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장쉰은 "군주(君主) 민주(民主) 주장이 각각 다르며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데, 누가 죄를 짓는 것이고 누가 화수가 된다고 하겠으며 어느 것이 성공하고 실패한다고 단안을 내리겠는가"라고 양비양시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복벽주의 운동 처벌을 반대함으로 복벽주의에 대한 찬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편 대리 총통 리위안훙과 국무 총리 돤치루이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면서 안휘독군 장쉰은 안휘독군 니쓰충 등과 함께 각성의 독군들을 9월 20일~9월 22일 서주에서 모아 2차 서주회의를 열고 일본과 연합하여 복벽을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복벽 운동은 제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수많은 자들의 이합집산이었다. 장쉰의 경우에는 청나라 황실을 부활시킨 다음에 자신이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그 권세로 중국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고 어떤 이는 리위안훙을 내쫓기 위해 복벽이란 구실을 빌리고 싶어했으며 어떤 이는 천자를 다시 세움으로 제후들을 다스리는 체제를 만들고 싶어 했다. 장쉰은 이를 잘 알았음으로 이들이 보낸 여러 편지들을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자신의 복벽이 실패하자 자신을 토벌하려는 자들도 사실 복벽에 찬성했었다고 폭로함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그 덕분인지 나중에 장쉰은 복벽에 실패하고 나서도 징계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복벽 음모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보내 준 재물을 받아 챙겼다. 장쉰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복벽 운동에는 돤치루이도 찬성했다 한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제거하고자 그 구실로 복벽을 내세울 생각이었다. 한편 청나라의 복고를 원했던 일본도 장쉰에게 복벽을 단행하라고 연일 부추겼다. 냄새를 맡은 숙친왕과 몽골 군벌들도[2] 장쉰에게 접근했다. 하남 군벌 뇌진춘, 몽골 군벌, 장쭤린, 장쉰 등은 일제히 봉기하여 선통제를 복위시킬 계획을 꾸몄으나 몽골군이 1916년 10월 12일 열하에서 참패함으로 무위에 그쳤다.
한편 국무경 쉬스창 역시 복벽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쉬스창은 교통 은행 차관을 받으러 간단 명목으로 심복 육종여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의중을 떠보았다. 쉬스창은 일본에 다음과 같은 복벽조건을 제의하였다.
아마 이 보정왕의 자리에는 쉬스창 자신이 오르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쉰은 크게 불쾌해하며 자신 역시 보정왕이 될 수 있다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 간 육종여는 일본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빈 손으로 귀국했다.
3. 전개
3.1. 부원지쟁과 장쉰의 베이징 입성
1916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은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펑궈장의 직예군벌이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1916년부터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돤치루이-리위안훙의 정쟁이 심각하였고 1917년 시점에는 세계대전 참전 문제로 시끄러웠다. 협상국 측이 중국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청하자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는 열렬히 호응하며 대독절교안, 대독선전안을 내놓았고 대독절교안 통과 이후에는 깡패들을 풀어 국회의원들을 폭행하기까지 하면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돤치루이가 이렇게 전쟁 참여에 집착한 이유는 이를 이용하여 리위안훙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돤치루이의 심복인 국무원비서장 쉬수정은 대놓고 리위안훙만 없앨 수 있다면 어떠한 수단이건 다 좋다고 했는데 그 수단에 복벽과 1차 대전 참전도 있었다. 하지만 돤치루이의 막 나가는 행보 때문에 5월 22일 돤치루이는 해직당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부원지쟁 문서 참조.
원래 장쉰은 리위안훙을 이용하여 돤치루이를 하야시키고 다시 독군들을 이용하여 리위안훙까지 하야시킴으로 최종적인 청제복벽을 이뤄낸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장쉰이 돤치루이와 연합하여 2차 서주회의를 개최, 13성구 연합회 맹주로 추대된 것도 복벽을 위한 군사연맹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장쉰은 자신이 돤치루이는 지지하는 척 하면서 5월 21일 5차 서주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5월 22일 대총통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면직시키자 격노한 돤치루이는 톈진으로 물러나 교통계, 연구계를 규합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회 설립을 준비하는 한편 안휘, 봉천, 산동, 하남, 직예 등 자신의 세력들에게 중앙과 관계를 단절한다는 통고를 내리게 하고 베이징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장쉰 역시 이에 호응하는 척 총통 제거안을 회의에 상정하고 안휘의 니쓰충, 직예의 차오쿤, 하남의 자오티, 산서의 옌시산, 산동의 장회지,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봉천의 장쭤린 등의 독립을 선포하게 했다. 여기에 쉬스창이 호응하여 장쉰에게 각 성과 연합할 것을 청하고 자신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려고 하자 장쉰은 이를 자신의 공을 채가는 것으로 여겨 5월 30일, 돤치루이에게 전보를 보내 쉬스창의 육해군 대원수 추대에 반대하였다. 이에 쉬스창은 자기 집에 칩거하였다.
돤치루이가 막나가자 이걸 막을 군사적인 힘이 없었던 리위안훙은 겁에 질려 장쉰에게 도움을 요청, 5월 31일 베이징으로 오라는 전문을 보내고 6월 1일 다시 전문을 보내 시국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6월 6일 톈진의 독립각성총참모단에서 뇌진춘과 장진방이 장쉰을 대신하여 복벽을 주장하자 참가한 군인들이 일제히 반대를 표명하였고 회의는 험악하게 해산되었다. 장쉰은 복벽을 자기 혼자 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6월 7일 기차를 타고 서주에서 북상하기 시작하여 6월 8일 자신의 휘하 변자군 5천명을 거느리고 톈진에 도착, 총통 비서장 하수강의 환영을 받았다. 장쉰은 변자군은 베이징 외곽에 주둔시켰으나 자신은 텐진에 남아 돤치루이, 쉬스창 등에게 복벽에 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던 리위안훙에게 시국 조정 6개 방안이라는 것을 내밀며 책임내각 실시, 3일 안의 국회의 해산, 성의회 해산, 헌법 재정, 총통부 관리 징계, 정치범 특사를 통해 각성의 독립 취소를 꾀하자고 요구했다. 여기에 저항할 방도가 없던 리위안훙은 6월 12일[3] 국회 해산령을 내렸다. 국무총리 리징시를 대리하고 있던 외교총장 오정방이 서명을 거부하자 그를 경질시키고 보병통령 겸 경진임시경비부사령관 강조종을 새로운 국무총리 대리로 삼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톈진에서 장쉰은 쉬스창을 만났다. 쉬스창은 3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무리한 요구에 장쉰은 당연히 거부하고 6월 14일 리징시, 장진방, 뇌진춘, 돤즈구이를 거느리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3.2. 선통제 포섭
6월 15일 리위안훙이 총통부에서 장쉰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장쉰은 책임 내각의 조직, 헌법 회의의 소집 등을 요구하는 한편 청실 우대 조건을 헌법에 포함하고 유교를 국교로 정하며 자신의 병력을 20개 대대로 증원해달라고 요구했다. 리위안훙은 각성의 독립 취소와 톈진의 참모처 폐지 등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6월 16일 장쉰은 선통제에게 문안을 올리고 황제의 스승들과 복벽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정작 선통제 자신은 복벽에 대해서 몰랐다. 6월 18일 장쉰은 각성에 독립을 취소하라는 전보를 치고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며 캉유웨이를 베이징에 불러들이는 등 복벽파와 비밀리에 상의함으로 복벽의 준비를 갖추었다. 복벽 직전에 장쉰은 선통제를 찾아 "대청을 회복하여 혼란된 정국을 수습해 주시옵소서."라고 청했다. 하지만 12세의 선통제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한다. 이에 장쉰이 묻기를
그러자 선통제는 "내 사부인 진보침은 시경에는 이렇다, 공자께선 이렇게 말했다, 온종일 이런 것만 가르치고 있소.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끝이 없소. 어찌해야 이 지루한 공부보다 더 좋은 일에 관심을 가질 시간을 낼 수 있겠소?"라고 하였고 장쉰은 "만약 폐하께서 다시 보좌에 오르신다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국정이 있으므로 더 이상 공부 따위에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습니다." 했다. 선통제가 반색하며 "내가 다시 황제만 된다면 정말로 공부를 그만두어도 되는 거요?"라고 되묻자, 장쉰은 "역사상 천자는 모두 마상 천자였습니다. 독서 천자라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답했다. 선통제는 이 말을 듣고 기쁘게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대로 하시오. 나는 무엇이든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 하고 답했다 한다.그렇다면 폐하께서 거부하시는 이유를 이 늙은 신하에게 말씀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6월 24일, 마침내 리징시가 내각을 조직하고 재정총장을 겸하였으며 왕스전을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에, 싸전빙을 해군총장에 임명하고 정벽광을 해군총사령관에 임명했다. 6월 25일, 리징시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광동독군 천빙쿤 등은 리징시를 국무총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통전을 보냈다. 6월 27일에는 캉유웨이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3.3. 정사복벽의 시작
1917년 6월 30일 새벽 4시 장쉰은 육군총장 왕스전, 보군통령 강조종, 경찰총감, 12사단장 진광원, 13사단장 등을 거느리고 자금성으로 가서 선통제를 알현한 다음에 어전회의를 열어 선통제의 복위와 왕정복고를 결의했다. 그리고 왕스전, 양정분, 강조종을 총통부에 파견하여 정치를 반환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도록 요구하였지만 리위안훙은 거절했다. 장쉰은 북경성문을 열어 변자군을 입성시키는 한편 전보국을 폐쇄하여 베이징과 타 지역의 연락을 끊었다. 7월 1일, 장쉰은 청나라 대신의 복장을 하고 캉유웨이, 왕스전 등 유신 수십 명을 거느리고 고개를 조아리며 22성 군민의 대표 자격으로 선통제에 정권 회수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선통제는 장쉰이 준비해둔 유지를 발표함으로 7월 1일에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며 대권을 회수하겠다고 하였다. 캉유웨이가 복위 조서를 낭독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조서 낭독 후 캉유웨이는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 복벽 주접 원고는 애초에 캉유웨이가 기초한 것이 많았는데 이는 캉유웨이가 선통제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모범으로 삼은 헌정의 이상을 실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3.4. 12일 천하
7월 1일 선통제는 조정에 나가 9개 조의 시정 방침을 발표했다.
선통제의 12일 간의 짧은 복위 중에서 그나마 통치같은 것을 한 것은 그 중에서도 6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6일 동안 선통제는 민국 6년을 선통 9년으로 고치고 각성에서 3명 씩 추천하여 헌법 국회를 준비하라고 명했고(7월 4일) 남은 시간 동안 작위를 수여하고 관작을 임명했다. 7월 1일 리위안훙이 일등 공작에 봉해졌고 내각을 조직했는데 내각 총리를 따로 두지 않고 장쉰, 왕스전, 원대화, 장진방, 진보침, 양돈언, 유정침 등 7인을 내각 의정대신에 봉했다. 또한 외무상서에 양돈언, 민정상서에 이가보, 탁지상서에 장진방, 해군상서에 싸전빙, 육군상서에 뇌진춘, 학부상서에 심증식, 법무상서에 노내선, 농상상서에 이성탁, 이번상서에 공상낙이포, 참모대신에 왕스전, 우전상서에 섬천우를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쉬스창, 캉유웨이에게 필덕원(弼德院) 정원장과 부원장 자리를 주었고 장쉰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펑궈장은 양강총독 겸 남양 대신, 루룽팅은 양광 총독에 임명되고 독군을 모두 순무로 고쳤다. 7월 2일 대학사를 임명했고 7월 4일 쉬스창을 태부로, 7월 6일 다시 태부, 대학사로 임명했다. 임명된 사람들 중 양돈언, 장진방, 뇌진춘, 심증식, 공상낙이포 등은 벼슬을 받아들였으나 나머지 인물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복벽에 대해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동의한 바가 없으며 알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복위된 것을 보고 억지로 동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이에 대해서 반복벽파도 인정하였다. 청실은 이후 중화민국 정부에 '장쉰이 군대를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거짓 유지를 발표하여 국체를 바꾸었다'고 변명했으며 돤치루이의 글에는 태비들이 통곡하며 복벽을 면하여 달라고 사정했다고 되어 있다. 청 황실이 복벽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은데, 만약 복벽이 실패한다면 청 황실이 멸문지화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영국은 복벽에 반대했고 일본 군부는 복벽에 찬성했으나 일본 정부는 돤치루이의 손을 들어주며 복벽에 반대했다. 오로지 독일이 복벽을 찬성했는데 이는 빌헬름 2세가 중국의 공화정을 혐오한 탓도 있었고 돤치루이가 1차 대전 참전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복벽에 찬성하자 협상국의 어그로가 올라 세계 각국은 모두 복벽을 반대하게 되었다.(...)
3.5. 반복벽파의 역습
하지만 장쉰의 복벽은 머지 않아 난관이 부닥쳤다. 중국 어느 곳에도 장쉰의 복벽을 원하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베이징 시민들은 용기 게양을 거부하였고[4] 10여종의 신문이 정간함으로 항의했다. 전국 각지의 신문들은 복벽을 반역으로 성토했고 광둥에서 호국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쑨원은 7월 4일 탕사오이 등과 함께 토역 선언을 발표했다. 국민당이야 공화정을 위해 수십년을 투쟁한 세력이니 말할 것도 없었고 원래 복벽에 호의적이었던 돤치루이나 북양군도 리위안훙의 축출을 원했지 장쉰이 선통제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꼴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량치차오를 비롯한 정객들도 입헌 군주정을 버리고 공화정을 지지하기로 한 터라서 캉유웨이 정도를 제외하곤 복벽을 비판했다. 반복벽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혁명당원들은 물론 펑궈장을 비롯한 다수 군벌들이 복벽 반대의 통전을 장쉰에게 보냄으로 여론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리위안훙은 1등 공작 자리를 거절하는 한편 일본대사관으로 도피하여 7월 2일 톈진으로 밀사를 보내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부총통 펑궈장에게 대총통 자리를 대행하도록 전보를 보냈다. 7월 3일 돤치루이는 톈진 마창에서 국무총리 임명을 수락하고 장쉰을 토벌할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전국에 보내고 교통계 양사이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량치차오 등의 문필 지지를 받았다. 이에 펑궈장이 대리총통 자리를 수락한다는 전보를 보내왔고 차오쿤, 펑위샹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돤치루이를 도와 베이징을 공격했다. 탕지야오를 비롯한 서남군벌들도 장쉰 토벌을 통전해왔다.
7월 5일 돤치루이는 토역군(討逆軍)을 조직하여 사령관에 취임했고 니쓰충을 토역군남로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토역군은 그 수가 5만 7천에 달했다. 같은날 돤치루이 소속의 복엽기가 자금성을 폭격하여 3발의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습이었다. 피해는 가마꾼 한명이 부상당한 것이 고작이었으나 청 황실과 변자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변자군들은 앞을 다투어 탈영, 5천에 달했던 변자군은 삽시간에 1500으로 줄어버렸다. 캉유웨이도 사태가 불리해짐을 알고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났다.
토역군은 10만으로 불었으나 장쉰의 1500 변자군은 계속 줄었다. 돤치루이는 투항을 요구했지만 장쉰은 거부하고 항전했다. 7월 12일 베이징은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3사단의 공격에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서쪽이 뚫렸고 펑위샹의 16혼성 여단이 국회 의사당과 선무문을 점령했다. 장쉰의 최후의 병력은 장쉰의 관저에서 저항했으나 결국 끝없는 포격에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장쉰은 휴전을 요청하다가 결국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달아났는데 장쉰의 주장에 따르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 한다. 장쉰의 주장에 따르면 궁지에 몰렸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때문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장쉰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으나 장쉰의 아들의 주장에 따르면 네덜란드 공사가 차를 보내어 장쉰의 뜻과 어긋나게 그를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데려갔다 한다. 어쨌거나 복벽은 그렇게 끝났다. 이 난장판에서 죽은 자는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내각을 조직함으로 장훈 복벽은 끝났다. 7월 15일 돤치루이는 펑더린 등 복벽에 옹호한 인물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으나 이들 다수에게 상징적인 처벌만을 내렸다.복벽은 폐하께서 원해서 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군주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위기의 순간에 내 자신의 안전을 찾아 도피해서 어린 황제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의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오늘 나에게 죽음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예로부터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제 내가 죽는다는 생각이나 처자식과 재산을 잃는 게 아니다. 나는 우리 군주께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럽다.
4. 뒷이야기
이후 쉬스창은 대리총통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면서 직계와 환계의 동시 추대를 받아 1918년 대총통에 당선, 1918년 10월 10일 취임했다. 대총통 당선 직후인 1918년 10월 23일, 쉬스창은 차오쿤과 장쭤린의 청을 받아들여 장쉰의 체포령을 취소하고 그를 사면했다. 1921년 1월 26일 장쉰은 장쭤린의 보증으로 장강 순열사로 추천받았으나 장쉰은 부임하지 않았다. 장쉰은 1923년 9월 12일 톈진에서 사망했는데 푸이는 그에게 충무(!)의 시호를 내리고 칙사를 보내 조문하였다.
복벽 사건은 분명한 민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이에 대한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다지 처벌받지 않았다. 참여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청나라의 유신이라 건드리기 그랬던 것도 있었고 당시 중국이 군웅할거의 난세라서 어차피 쉬엄쉬엄 넘어가는 문제도 있었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란 것이 그냥 사라지진 않아서, 당시 군벌들은 민국의 총통과 청나라의 섭정왕 자리를 모두 꿈꾸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쉬스창은 1918년 총통 당선 후에 자신을 어린 황제의 섭정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물론 구웨이쥔을 비롯한 신흥 관료 조직과 국민당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구시대적인 군벌들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 복벽사건의 영향으로 광저우 정부와 베이징 정부 모두 푸이를 평민으로 전락시키자는 합의가 나와 전국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끝내 실행되진 않았다. 돤치루이도 리위안훙도 펑궈장도 황제는 자주적 행위자가 아니니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결론을 발표하고 황실에 해를 끼치진 않았다. 남방 급진파들은 선통제가 반역자라면서 황실 우대 조건을 폐기하고 선통제를 처형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군벌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킨 후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실을 자금성에서 퇴출시켰다.
5.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복, 대명출판사
- 자금성의 황혼, 레지널드 존스턴, 돌베개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서문당 편집실.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臨時約法’體制下의 段祺瑞軍閥政權, 박준수, 동양사학연구 53권,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
- 청나라
- 선통제
- 왕정복고
- 신해혁명(1911.10.10~1912.2.12)
- 쑹자오런 암살 사건(1913.3.20)
- 선후대차관 사건(1913.4.26)
- 계축전쟁(1913.7.12~1913.9.21)
- 중화민국 국회 해산(1914.1.10)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호법전쟁(1917.9.19~1918.11.22)
- 하남독군 교체 파동(1920.2.23)
- 안직전쟁(1920.7.14~1920.7.23)
- 2차 호법운동(1920.11.28~1922.8.9)
- 영풍함 사건(1922.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