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수(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정동수는 1904년 10월 22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외동리(현 담양군 가사문학면 외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3일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등보통학교와 농고생 16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 회비 10전에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이기로 하고,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7년 3월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 누설의 위힘이 생기자, 그들은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했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1927년 11월, 정동수, 유치오·유상걸(柳上杰)·주당석(朱唐錫)·문승수 등은 광주 누문리에 소재한 김태호(金台鎬)의 하숙방에 모여 성진회를 계속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정동수는 1928년 3월에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후 성진회 활동과 관련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1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동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