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영(187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운동에 뜻을 두고 각지를 방문,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1915년 음력 5월에는 박상진·윤상태(尹相泰)·이시영·서상일 등과 함께 대구 교외 안일암에서 시회를 구실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하고 유세부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1916년 10월경 출국하여 중국, 한국, 러시아의 3국인을 결합하여 대동민국을 조직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할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2월경 다시 귀국하여 동지들에게 해외의 동정을 전달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에서 파견된 사한원(司翰員) 김기한 등과 함께 국내에 지단(支團)을 설립하고, 특히 송내호·강지형 등과 함께 서울지단의 설립 및 군자금 모집과 격문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부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1년 11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순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정순영은 1879년 4월 9일 경상도 성주목 대리방 수성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이러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1916년 10월경 출국하여 중국, 한국, 러시아의 3국인을 결합하여 대동민국을 조직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할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2월경 다시 귀국하여 동지들에게 해외의 동정을 전달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에서 파견된 사한원(司翰員) 김기한 등과 함께 국내에 지단(支團)을 설립하고, 특히 송내호·강지형 등과 함께 서울지단의 설립 및 군자금 모집과 격문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부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1년 11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순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