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원(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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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在遠
1917년 1월 4일 ~ 2017년 10월 9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소아과 의사. 두유 브랜드 베지밀을 만드는 정식품의 창립자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되었지만 연구는 계속 했다. 2013년 인터뷰. 2017년 10월 9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100세.

2. 생애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나 2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15세에 평양 기성 의학 강습소(箕城醫學講習所)[1]에서 교재를 등사하는 사환[2] 일을 하면서 의사 고시에 도전하여 1937년 6월 21세(만 19세)에 의사 검정고시 전과목에 합격했다. 당시기사(동아일보 1937.6.6).
명동성모병원[3] 견습생 시절[4] 생후 백일도 안 된 사내아기가 우유모유를 소화하지 못해 온몸이 축 늘어진 채 묽은 녹색 변만 줄줄 나오다 사망하는 것을 경험했는데, 당시에는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가졌었다고 한다. 이후 1960년 영국 런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장기설사병의 원인을 찾지는 못하다가 소아 알레르기 질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UC 메디컬센터에서 유당불내증 연구 논문을 발견하게 되고, 유당불내증이 그 아기의 사망 원인임을 알게 된다. 이에 유당이 함유되지 않은 대용유액을 궁리하던 끝에 우유 못지않게 단백질이 풍부한 대체 식품으로 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67년 '''두유(베지밀)를 내놓는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수공업을 접고 대량 생산을 위해 1973년에는 정식품을 설립했다.
'경쟁기업들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만든 두유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라며 OEM전문회사 '자연과 사람들'을 설립했으며, 1984년 '혜춘장학회'를 설립, 33년간 약 2,350여명에게 총 21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게, 정재원이 두유 제품을 개발한 의도 및 노력 자체는 사실이지만, '정재원이 두유라는 식품을 최초로 개발했다'라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것. 두유 자체는 언제 어디서 개발되었는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오래된 식품이다. 그가 개발한 것은 상술했듯 '콩으로 만든 대용유액'.
베지밀 개발로 제1회 발명의 날 대법원장상을 수상했고, 평생 콩 연구에 매진한 공로로 1999년 국제대두학회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부인은 김금엽(2004년 사망)이며, 그가 22세일때 가톨릭재단 혜성병원장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수녀원에서 실습 나온 17세의 견습생이었다. 1942년 결혼식을 올리고 6남매를 낳아 기르며 60여년 동안 해로했다.
정재원은 살아생전 인터뷰에서 장수 비결을 묻자 채소 위주의 식단, 그리고 자신이 발명한 베지밀 덕이라고 말하였다. 헤럴드경제 2017-10-10 ‘베지밀 창시자’ 정식품 정재원 향년 100세로 사망, 직접 밝힌 장수 비결은?
[1]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다.[2] 쉽게 말하자면 인쇄공과 같은 일을 한 것. 당시 청년 정재원은 의사 검정고시 시험지를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 등사하면서 문제를 암기하다시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경쟁률도 없었고 시험문제나 패턴이 바뀌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내가 만약 시험에 응시하면 합격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고 실행에 옮긴것 이라고 강연회에서 밝힌적이 있다.[3] 명동성당 앞에 있던 병원.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이다. 1986년에 병원은 여의도로 이사했고, 병원이던 건물은 가톨릭 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다양한 가톨릭 단체 및 가톨릭 관련 서점과 성물을 파는 상점이 입주해 있다.[4] 현재 일반의를 취득하고 인턴생활을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당시에는 국내에 체계화된 의학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면허 비슷한 것을 받았지만 사실상 단독진료를 하기보다는 의사들 옆에서 보조하면서 배우는것으로 현대 의대 본과생들 과정이라고 생각하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