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고려)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鄭敍
(? ~ ?)

1. 개요


고려의 척신. 이명은 정사문(鄭嗣文), 호는 과정(瓜亭)으로 고려가요 정과정의 작자다.

2. 생애


본관은 동래. 문안공 정항의 막내아들이자 경렬공 왕국모의 외손자로 음서를 통해 장사랑 양온승동정 관직에 나간다. 생애 초반의 큰 사건은 외척 임원후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처형 공예태후인종과 결혼하니 인종의 아들 의종, 대령후, 명종, 신종 등은 정서의 처조카가 된다. 인종은 처제의 남편, 즉 동서#s-2지간인 정서를 총애한다.
의종이 즉위한 뒤에는 내시낭중에 있으면서 같은 내시인 김존중과는 거리를 두는 한편 처남인 승선 임극정, 처조카 대령후와 어울린다. 의종 5년(1151) 5월 김존중과 환관 정함은 정서, 임극정 등이 종친 대령후와 밤에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뜬소문을 꾸며내고는 이를 그대로 의종에게 일러바친다. 왕은 김존중 등을 총애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심한다. 재상 최유청, 문공원, 유필과 간관들의 탄핵으로 정서는 관련자 4인[1]과 함께 어사대에 투옥되는데, 의종은 대령부를 폐하고 종이나 악공 한두명을 유배보내는 것에 그치고 정서 등을 풀어준다.
의종 5년(1151) 좌간의 왕식 등 대간이 끝까지 정서 등 5인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지대사 최윤의는 왕의 침소까지 들어가서 간쟁하니 의종은 결국 정서 등을 유배보낸다. 정서가 유배된 곳은 조상 대대로 호장을 지내온 고향 동래군이다. 의종은 정서를 보내면서도 "오늘은 일은 조정의 의논으로 급하게 결정된 것이니, 가면 마땅히 소환할 것이다."[2]라고 말한다.
한편 조정은 외척 세력을 배제하고 유필, 최윤의, 김존중 등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김존중 등이 죽은 뒤에도 정서는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의종 11년(1157) 대령후가 유배될 때 정서의 매부들이 다시 연좌돼 외직으로 쫓겨나는 것에서 정서가 복권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사찰을 둘러보러 다니기나 했으며, 끝내 정서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정서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된 뒤에서였다. 명종 즉위년(1170) 10월 무신정권에서 전왕 의종에 의해 무고한 피해를 입은 이들을 사면해 개경으로 불러들일 때 따라 들어와 직전(職田)을 돌려받는다.

3. 가족관계


  • 부: 정항
  • 모: 강릉군부인 왕씨
    • 본인: 정서
    • 처: 장흥 임씨
    • 누이
    • 매부: 최유청
    • 누이
    • 매부: 이작승
    • 누이
    • 매부: 김이영
정서는 넷째로 막내 아들이었는데 나머지 형들은 모두 요절했다. 본문에서 밝혔듯 모친 왕씨는 왕국모의 딸이고, 처 임씨는 임원후의 딸이다. 처 임씨는 정서가 유배중일 때 무고당한 일이 있다. 의종 15년(1161) 경상도 감음현(경상남도 거창군) 사람 둘이 임씨가 자기 고을 향리와 함께 임금을 저주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무고였음이 드러나 두 사람은 강에 던져졌으며 감음현은 부곡으로 강등된다.

[1] 비서정자 양벽(梁碧), 융기색판관 김의련(金義鍊), 대령부전첨 유우(劉遇), 녹사 이시(李施).[2] 今日事迫於朝議也, 行當召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