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습명
1. 개요
연일 정씨의 시조이자, 고려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까지 지낸 인물. 시를 매우 잘 썼다고 하여 석죽화나 증기와 같은 역작들을 남겼다.
2. 생애
고려 숙종(고려)(肅宗)朝 초(1096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의종(고려)(毅宗) 5년(1151년) 3월 21일 약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고려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대의 중신으로 성품이 강직(剛直)하며,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고 지(智), 인(仁), 용(勇)을 겸비하였으며 문명(文名)과 기개(氣槪)가 높았던 명신으로 고려사(高麗史)에서 평가받는다.
신라시대에 간관(諫官)을 역임한 정종은(鄭宗殷)의 후손으로, 그 중간은 족보가 실전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정종은의 후손 중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낸 이후 대대로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호장직을 세습하였다. 정습명은 이 정의경의 후손이다.
정습명은 일찍부터 성격이 대범하고 기이하였으며 작은 일에 속박 당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에 힘써 글을 잘 지었고, 배우는 데 힘썼다. 예종(睿宗) 때 향공문과(鄕貢文科)에 급제하였으며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2]
이하 연도별 업적을 정리하였다.
2.1. 연보
- 1116년(睿宗11年 丙申) : 약관(弱冠)에 서경도사(西京都事)를 역임 하고 예종말에는 내직으로 내시<內侍 : 고려때 內侍府의 官員.의종 이후에는 환관(宦官)들이 차지함>
- 1134년 7월(인종12년 갑인) : 안흥정(安興亭) 부근의 조운(漕運)을 쉽게하기 위하여 서해도 태안의 동측(東側) 지협(地峽)인 굴포(堀浦)에 방읍민 수천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팠으나 10여리는 굴착하고 7리를 남겨두고 실패.
- 1135년 1월(仁宗 13年 乙卯) :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 4,600여명에 전함 140척으로 순화현(順化縣)남강에서 적을 막았으며,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上 將軍) 이녹천(李祿千)등과 함께 서적[3] 토벌을 도모하였으나 대패[4]
- 1136년(仁宗14年 丙辰) : 국자감 사업 및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기거주(起居注)와 지제고(知制誥)겸임
- 1140년(윤) 6월(仁宗18年 庚申) : 김부식(金富軾), 임원애(林元●), 이중(李仲), 최주(崔奏), 최자(崔梓)등과 함께 시패십조를 상주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주언을 좇지않는다 하여 사직[5]
- 1142년(仁宗20年 壬戌) : 김부식의 별제를 빌어 우거(寓居)하자[6] 간관(諫官)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직에서 파직(罷職)되었으나 곧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승진
- 1146년 1월(仁宗24年 丙寅) : 예부시랑으로서 태자(의종, 毅宗)의 사부(師傅)를 겸함. 당시 태자가 우매(愚昧)하여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가 의종 대신 둘째아들 대녕후(大寧候) 경(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는데 폐태자 직전에 태자를 적극 옹호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인종은 선생의 충성심에 감격하고 기량이 넓은 풍도를 중히 여겨 승선(承宣:승지)에 발탁(拔擢)하고 겸하여 동궁의 태사(太師)로 삼아 부족한 태자의 장래를 부탁함.
인종 임종시에 태자와 선생을 동석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언제나 정 승선(承宣)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태자에게 이르고[7] , 또 선생에게는 충직한 경(卿)이 있어 안심하고 선위(禪位)한다고 하며 아직 발본(拔本)하지 못한 잔재들이 왕의 측근에 머물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붕어(崩御)하다.
- 1149년(毅宗 3年 己巳) : 한림학사, 추밀원 지주사에 제수됨.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十韻詩)로 조정시(趙挺時)를 시취(試取 :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함.
- 1151년(毅宗5년 辛未) : 의종이 부왕 인종으로부터 유언(遺言)을 받아 처음에는 선생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심치 못하더니 정함(鄭諴)과 김존중의 참언(讒言)에 쏠려 병중에 있는 선생을 김존중으로 하여금 대신케 하였다. 선생은 왕의 뜻을 알고 3월21일 약을 먹고 자진(自盡)하였다. 이 때 김존중과 정함의 무고가 있었는데 훗날 의종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가 없게 되었을 때 정습명을 잃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특히 동국통감에서는 '습명은 임금의 주위에 이와 같은 소인간신(小人奸臣)의 무리가 에우고 있는 한(限)은 끝끝내 바른 임금의 도리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마침내 앙약(仰藥) 자결하였으니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후에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출되어 쫓겨날 때, 눈물 흘리며 자신에게 바른 말로 간하던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의종의 최후는...
3. 시
3.1. 석죽화
대표적인 오언율시로, 동문선에서 출전됐다.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세상에선 모두들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栽培滿遠中(재배만원중) 뜰 안에 가득히 심고 가꾸네.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누가 알랴, 이 거친 초야에도
易有好花叢(역유호화총) 좋은 꽃떨기 피고 있는 줄을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어여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에 어리고
香傳壟樹風(향전롱수풍) 향기는 밭두렁 나무의 바람에 전하네
地偏公子小(지편공자소) 궁벽한 시골이라 찾아주는 귀공자 적어서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아리따운 자태를 늙은 농부에게 붙이네
젊을 적 초야에 묻혀사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촐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피어나는 야생화인 패랭이꽃(석죽화)에 비유하여, 세속에서 사랑 받는 모란꽃과 대조시켜 읊은 시이다.
인종이 이 시를 읽고 크게 감탄하여 정습명을 옥당(玉堂)에 보임하였다는 일화가 「파한집」에 전한다.
3.2. 증기(贈妓)
나이 든 기생에게 선물한 시. 세월의 야속함을 표현한 시이다.百花叢裏淡丰容 (백화총리담봉용)
忽被狂風減却紅 (홀피광풍감각홍)
獺髓未能醫玉頰 (달수미능의옥협)
五陵公子限無窮 (오릉공자한무궁)
온갖 꽃들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느닷없는 바람을 맞아 아름다움이 시들었네.
수달의 골수로도 옥 같던 얼굴을 고칠 수 없으니
풍류를 아는 공자님들 한없이 안타까워하겠네.
4. 기타
- 정습명의 10대손이 훗날의 고려 문하시중이자 최후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이다.
- 그가 죽고 나서 의종대 조정이 막장테크를 타기 시작했는데 사후 19년 뒤 벌어진 일이 바로 무신정변이다. 특히 정습명을 모함한 김존중, 정함은 막대한 부를 쌓으며 호의호식하는데 김존중은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시체가 온전치 못할 것이라 추측받는다. 또 정함은 이 무신정변의 원인이 되는 총신정치, 환관정치의 원흉이었다. 무신정변을 막지 못한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꺾여서 죽게 된다.